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중심에 놓고, 거룩한 숨결의 이끄심을 따라 새로이 읽게 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포로기에 이릅니다. 어제 우리가 보았던 "아들로 받아들여짐~토라에 따른 예배"가 가리키고 있던 바로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들을 예정했다'는 의미로 많이 읽혔던 본문입니다. 즉 이스마엘이 버림받고, 에서가 버림받고, 파라오가 버림받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너희도 버림받았는데,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니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읽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는 하나님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폭군의 이미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그저 복종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왠지 불편한 느낌입니다.
로마서 9:6~2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로부터 난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가 '씨'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삭 안에서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살몸을 통해 낳는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씨'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약속이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돌아올테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 시작합니다. 살몸으로 메시아의 조상인 유대인들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내용은 로마서 3장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승리"라는 말을 잘못 오해하지(흘려 듣지) 않기 위해서는 4~8장의 위대한 이야기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바울이 '말씀'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찌 사용하는지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단편적인 명령이 아니라, 하나의 큰 이야기입니다. 저는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라는 표현을 써봤는데, 이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9:6이 시작되는데(결론은 11장에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토라에 대해서 고민했을 때와 비슷한 흐름입니다. 7장에서는 '메시아와 성령으로 토라가 어찌 기이하게 성취되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말씀이 실패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장에서는 저 위의 말에서 '토라'라고 된 것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메시아와 성령으로 이스라엘이 어찌 기이하게 성취되었는지'를 이야기 함으로써,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이삭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로부터 난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말 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로마서 2:28,29에서 '유대인'이라는 말을, "표면적 유대인/이면적 유대인"을 나누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단어 구분이 등장하는데, 바로 '자녀'와 '씨'입니다. "모든 자녀가 씨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자녀'가 있었지만, 그 중에 '씨'는 이삭뿐이라 말하며 다시 두 가지를 대조시킵니다. '살몸'과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내용은 "그 때에 내가 돌아올테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에게는 정말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이스라엘A : 자녀/살몸/이스마엘
이스라엘B : 씨/약속/이삭
이 뿐 아니라 리브가도 한 사람을 통해 임신했는데, 그 사람이 우리 조상 이삭입니다. 아직 그에게서 자식들이 나오지도 않았고, 무슨 잘한 일이나 못한 일도 없을 때였지만, 선택을 따라 하나님의 뜻이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부르신 이로부터 그녀에게 말씀이 있기를,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야곱은 내가 사랑하지만, 에서는 내가 미워했다" 함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씨/약속'의 또다른 예를 가져옵니다. 바로 다음 세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앞의 이삭과 이스마엘과는 달리 야곱과 에서의 아버지는 같습니다. 그리고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즉 혈통도, 잘 함도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은 뜻하신 바 계획이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A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야곱은 내가 사랑하지만, 에서는 내가 미워했다"는 이 구절을 불편해합니다.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도 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비뚤어짐의 노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만일 공평하게 한답시고, 혈통을 따지거나, 누가 잘 했는지를 따져봤다고 칩시다. 그럼 타락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에게 들려주는 이스라엘 이야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혈통과 도덕적 성취를 가지고 오랜 세월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거듭했던 민족입니다. 제국 사이에 끼어서 무수한 사람들이 혁명에 죽어나가는 중에도 그들은 순혈주의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잘 한다고 생각하며 모든 민족을 판단하는 문제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루기 위함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생존때문인지 헷깔리고 있을 때, 바울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새로이 읽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B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 는 전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저 구절은 거짓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비뚤어졌다는 참 위에 서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이스라엘B임을 안다면, 저 구절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불공정하다는 항의가 아니라, 어안이 벙벙한 감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일 없습니다. 그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성경은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너를 세운 이유이니, 곧 네 안에서 나의 힘을 나타내어 온 땅에 내 이름이 알려지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뜻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뜻한 자를 완고하게 하십니다.
이제 바울은 출애굽 이야기로 넘어 옵니다. 앞 본문에서 이스마엘, 에서의 배역이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에게 맡겨집니다. 출애굽기에서 파라오는 하나님의 재앙을 겪으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9:12~16
그러나 주님께서 파라오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하셨으므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파라오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파라오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여라.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백성을 보내어라. 그들이 나에게 예배드리게 하여라. 이번에는 내가 나의 온갖 재앙을 너와 너의 신하들과 백성에게 내려서,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을 너에게 알리겠다. 내가 팔을 뻗어서 무서운 질병으로 너와 너의 백성을 쳤다면, 너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여 주어,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하셨다는 구절이 로마서의 '내버려두심'입니다. 파라오는 비뚤어짐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가로 막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난다는 존 로크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인간은 비뚤어진채 태어납니다. 참다운 인간성을 이루지 못한채 미완성으로 태어납니다. 파라오는 비뚤어진 인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고집을 오히려 이용하십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고집 조차도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파라오의 고집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가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파라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즉각적인 심판을 벌이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시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 속에서, 죄는 더욱 죄 되고, 하나님의 이름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열 가지 재앙 속에서 이집트의 잘못은 더욱 분명해지고, 하나님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파라오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까? 지금 이스라엘A에게 벌어지는 일이, 바로 출애굽할 때 파라오에게 벌어졌던 일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욱더 고집을 부리고 있고, 그 결과 그들은 점점 비인간화의 길을 걷습니다. 이를 통해 죄는 더욱 죄 되고, 포로가 되어 온 세계로 퍼져나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전달됩니다.(우편배달부의 역할은 이렇게 수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A의 완악함, 완고함, 고집을 이용하셔서 자신의 언약 프로젝트를 완성하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스라엘A의 배역이 파라오라는 사실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걸맞는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나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도 그의 뜻에 맞설 수 없는데, 그 분은 어째서 여전히 사람을 나무라십니까?" 이 사람아! 감히 당신이 뉘기에 하나님께 맞서 반박하며 말하겠습니까? 빚어진 것이 빚은이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대하십니까?" 하겠습니까?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귀함 없는 그릇으로 한 덩이 진흙을 다룰 권한이 없단 말입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뜻하셨다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그 화를 나타내시어 자신의 힘을 나타내고자 하셨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부수려고 하셨던 화 그릇들에 대해서 아주 꿋꿋함으로 참으셨다면?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기 위해 만드셨던 그 긍휼 그릇에 대해서는 자신을 풍성하게 드러내시어,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하신다면? 이 그릇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유대사람 뿐만 아니라 이방사람 중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파라오가 된 것은, 이스라엘의 잘못이 아닙니까? 그저 이스라엘은 꼭두각시처럼 배역이 맡겨졌을 뿐, 그들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이 되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죄 있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같은 질문을 3장에서 이미 확인하고서 왔습니다. 이 물음들이 기억납니까?
1. 유대인의 의미는 무엇인가? -9:1~5
2. 이스라엘의 실패는 언약 이야기의 실패인가? -9:6
3.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9:14
4. 어째서 내(이스라엘)가 여전히 심판을 받는 것인가? - 9:19
지금 위의 본문이 로마서 9:19입니다. 우리는 저 질문들을 해결하면서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저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흔히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한 쪽은 구원하고, 한 쪽은 멸망시키지만, 그것은 하나님 마음이니 어쩔 수 없다'로 읽히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토기장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포로기 시절, 예레미야 18장의 인용입니다. 당연히 예레미야 18장의 맥락에 따라서 이것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예레미야 18:4
그런데 그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었다.
하나님이 진흙을 빚어(이 말은 '아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기는 커녕, 온통 망가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살몸, 즉 비뚤어진 아담성을 따를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8:6~10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그러나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백성이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복을 거둔다.'
이 본문이 어찌 어떤 사람들은 살리고, 어떤 사람들은 죽이는 제멋대로의 폭군의 음성이란 말입니까? 토기장이 비유는 '포로기'에 대한 진술이고, '새언약'의 진술입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이방 제국의 압제 아래서 괴로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점점 문제는 꼬여만 갔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불평하거나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비뚤어짐의 노예로서 그들이 겪던 포로기였습니다.(그들은 제국에 대한 포로기로 그릇된 사고방식을 고집했고,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이 제국에 의해 죽임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제국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포로기는 폭력으로도, 심지어 율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말 기이하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B가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B를 통해 자신을 알리시고, 이스라엘A는 자신이 비뚤어졌음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A가 어디로 돌아가야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바울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릇"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화 그릇을 부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긍휼 그릇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그릇"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분을 제멋대로의 폭군으로 읽을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은 망가져버린 토기에게도 호소하는 토기장이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 그의 내버려두심은 파라오들을 기다리심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다리심은, 긍휼 그릇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리고, 이스라엘A가 이스라엘B로 넘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두신 것입니다. 그 분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씨알아닌 자를 내 씨알로 부르겠고,
사랑받지 못한 이를 사랑받는 이라 부르리라.
또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말했던 바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바울은 긍휼 그릇, 이스라엘B에 대한 성경의 인용들을 찾아다가, 유대인들에게 제시합니다. 그가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시작이었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에 대한 근거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가 이스라엘B를 통해서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내 씨알 아닌", "사랑받지 못한 이"는 비뚤어짐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말했던 바로 그곳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일 것입니다. 그런데 비뚤어짐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이 씨가 되고, 사랑받게 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무언가 충격적인 전환을 거쳐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결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되어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이스라엘B 생겨나고, 이것이 이미 포로기 시절부터 호세아를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아들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보존될 것이다.
주께서 그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시며
속히 이 땅위에서 그 말씀을 행하시리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했습니다.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이 되었을 것이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하나는 10:22,23으로 아브라함 약속의 두번째 내용이 이뤄지더라도, 그 안에서 남은 자만 구원(보존)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심판이 준엄함 속에서 자녀들로부터 씨가, 살몸들로부터 약속이, 파라오들로부터 이삭과 야곱이, 비뚤어짐으로부터 신실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A에 머물러 있어선 안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호소합니다. 살몸으로 자녀인 것에 안주해선 안됩니다! 당신도 씨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를 마저 인용하면서(이사야 1:9, LXX), 만일 하나님께서 이 '씨'를 우리에게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씨'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씨'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미 답은 다 나왔습니다.
'바울의 편지들 > 로마서 연구 v.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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