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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도행전을 이쯤 살펴보고 이제 고린도전서로 들어갑니다. 바울이 고린도와 그 근처인 에베소에서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살펴봤습니다. 머리 속으로 그의 여정을 그려놓고, 이제 그의 글 속에서 우리가 상상했던 바울이 맞는지 확인할 차례입니다.​


고린도전서 1:1~9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시아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여러분은 각처에서 메시아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메시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고, 거룩함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이는 우리뿐 아니라 그들의 주도 되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메시아 주 예수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 소스데네가 보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18장에 나온, 바울을 갈리오에게 고발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했던 회당장 소스데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자신을 고발하려고 했던 이를 형제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 있는 '에클레시아'에 편지를 보냅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세 번째 편지일 것입니다. 이미 고린도와 바울은 여러 차례 편지를 교환한 흔적들이 있습니다.(5:9, 7:1) 바울은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근처 아가야 지역에 있는 고린도의 에클레시아와 편지를 교환했을 것입니다. 수신자를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로 원어를 가져다 쓴 것은, 이것을 '공동체'로 번역하기에도, '교회'로 번역하기에도 성이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공동 생활을 하며 서로의 재산을 함께 사용합니다. 오늘날 교회와도 사뭋 다르고, 그렇다고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고만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 사람들의 독특함을 살려 그저 에클레시아라 일단 명명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계약관계를 전제합니다. 즉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특정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때, 그와 '언약'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언약에 신실함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창세기 12장의 바로 앞 장이 바벨탑인 것을 기억한다면, 이는 실로 충격적인 관계의 전환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원수 삼고 대적하던 장에서, 한 장 넘기고 나니, 사람이 부르심을 받고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관계로 들어가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스라엘의 토라 이야기에 대해서 잘 몰랐을테지만, 그렇다고 계약도 희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린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특정한 계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계약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지만, 고린도전서 첫 장에서 바울이 표현하는 바를 따르자면, '메시아 예수를 통한 거룩함'이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떨어뜨려 놓는다'는 말입니다. 즉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무언가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따로 떨어지게 된 것일까요? 바로 이집트에서의 우상숭배하던 삶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비인간화로부터 이 사람들은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거룩해질 것입니다. 죄로부터 떨어져 나가 점점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계약의 내용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되었고, 되어가고 있으며,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마다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는 거리마다 기쁨으로 춤을 춥니다. 메시아 예수는 그들만의 주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불러 거룩함에 이르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메시아 예수를 통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전세계를 연결합니다. 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세계에 퍼져있는 이 에클레시아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늘 여러분을 두고, 메시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그이 안에서 모든 것, 곧 온갖 언변과 지식이 풍성해졌습니다. 메시아의 증거가 여러분 안에 세워졌기에, 여러분은 어떤 영적 은사에도 부족함 없이 메시아 우리 주 예수께서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이가 끝까지 여러분을 올바로 세우셔서, 메시아 우리 주 예수의 날에 흠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아들, 메시아 우리 주 예수와의 '코이노니아'를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의 뒷 쪽을 보면 알겠지만,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는 이 '은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점이 있었고, 이로 인해서 '평화'가 깨졌습니다. 바울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번째 문단을 읽으면, 뒤에 이어질 문제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울이 쓴 그대로 1. 온갖 언변 2. 지식 3. 은사 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들을 풀어내기 전에 감사부터 합니다. 그들이 비록 말과 지식과 은사에 대해서 문제를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거저 받은 말과 지식과 은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부정하다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균형을 이루느냐,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메시아의 증거가 여러분 안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이 증거가 무엇일까요? 저는 성령이라 생각합니다. 메시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 계심의 근거 중에 그 보다 강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성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 성령 계심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문제를 겪더라도 그 문제를 바로 잡고,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을 갈망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들은 올바로 세워지고, 마침내 메시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그들을 완전하게 하시리라 기대합니다. 이 일이 지금은 요원해보일지라도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계약의 내용이며, 하나님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약에 충실하신 이가 아들 메시아 예수를 보내시고, 그 아들의 승천에 이어 성령을 보내심은, 하나님과 에클레시아의 코이노니아 때문입니다. 이 말을 잘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라 번역되었습니다. 내 것 네 것 하지 않고 서로 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에클레시아와 성령으로 하나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에클레시아를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보니, 이 언약의 내용이 확실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의 짧은 서두에 아홉번이나 반복하는 그 이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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