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고린도전서 2:1~5


  나의 가족여러분,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하나님의 미스테리'를 뛰어난 말솜씨나 지혜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대할 때, 나는 메시아 예수, 특히 그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연약함 가운데, 그리고 큰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케리그마가 지혜있는 말의 설득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숨님 곧 능력 나타남에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신실함이 사람들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능력 안에 있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지금 고린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바울 편지의 맥락도 알 수 있다. 1:10에서 4:21까지 이어지는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는 분열입니다. 사실 분열의 문제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분열의 원인입니다. 분열로 드러난 현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 현상 이면에는 거대한 생각의 암초들이 놓여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에클레시아에는 반(反)바울 정서가 있었고, 바울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된 이유가 바로 '지혜'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르친 바는 기초적인 것이고, 그 기초적인 것을 넘어 얻을 수 있는 지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오히려 지혜를 외치는 각 사람에 의해 파벌을 만들었고,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바울을 따른 지혜', '아볼로를 따른 지혜', '베드로를 따른 지혜', '메시아를 따른 지혜'를 추구하느라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숙제를 맞닥뜨렸습니다. 하나는 지혜가 아닌 기초를 가르쳤다고 알려진 자신에 대한 혐의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고린도전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들입니다. 즉 사도로서 바울 자신이 누구인지와, 지혜가 무엇인지.


  바울이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방문한 것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복음을 '하나님의 미스테리'라고 표현하며, 이것을 다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못 박힘'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의 결과는 '설득력'이 아니라 '성령력'이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숨님 곧 능력 나타남'은 고린도에 있던 사람들의 인격적 변화, 회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일이 바로 저 메시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고린도 사람들이 추구하던 지혜와 달랐습니다. 바로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못 박힘. 이 소식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이신 숨님(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숨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이 나타났습니다. 즉 하나님은 힘을 발휘해서 사람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바로 메시아 예수 십자가의 소식을 통하여. 그런데 고린도 사람들은 이것을 기초로 여기고, 자신들은 메시아 십자가가 아닌 다른 류의 지혜를 추구하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고린도에 즐비한 철학자들처럼 설득력을 무기로 경쟁하고자 하지만, 정작 사람을 새롭게 하기는 커녕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이가 하나님이셨다는 충격적인 진실입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오해 속에서 하나님이 시체더미 위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어리석다고 말하나, 이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요, 사람들은 이것을 약하다고 말하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함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약함.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약함이 곧 사람의 강함된다'는 것이고, 이것을 성령께서 증명하십니다. 이 약함과 어리석음 없이는 새로운 실존도 없습니다. 희생당하는 어린양 없이는 출애굽도 없듯, 하나님의 약함 없이는 새로운 실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사람들은 이 메시아의 십자가를 떠나서도 자신들은 새롭게 온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혜'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약함 없이 새로운 실존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은 이미 아담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유혹입니다. 바울은 다시금 우리가 서 있는 토대를 분명히 합니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하나님 아들의 죽음. 바로 그 소식에서부터 성령의 나타남,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에클레시아를 하나되게 합니다. 나를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 하나님의 약함에 참여하게 합니다. 성령은 세상 아래를 굽어보는 바벨탑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는 농업입니다.


  메시아의 십자가가 존재의 토대요, 지혜의 근본입니다. 성령은 바로 죽임당한 어린양의 소식으로부터 나타나십니다. 이후 바울의 주장은 네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바울은 먼저 (1)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를 다루고, (2)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3) 성령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가 없는데, (4) 성령을 받았지만 사람의 지혜를 따르는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질책합니다.


다음과 같이 소제목을 붙여봤습니다.


(1) 6~10a : 두 가지 지혜의 대조
(2) 10b~13 :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통해
(3) 14~16 : 성령 없는 보통 사람
(4) 3:1~4 :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당신들은 누구인가?


(1) 두 가지 지혜의 대조


고린도전서 2:6~10a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시대나, 사라져 가는 현시대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닙니다. 즉 미스테리 가운데 보관해 놓으신 지혜로서, 우리의 영광을 위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준비하신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현시대의 통치자 중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해했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눈도 보지 못했고, 어느 귀도 듣지 못했으며,
  어떤 사람의 가온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숨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아마도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는 이 바울의 편지를 보고서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이 '지혜'에 대한 언급은 그들이 먼저 꺼낸 것인데, 바울은 그들의 어휘를 묵살하기는 커녕, 그 어휘를 그대로 가져와 내용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본문에 보이는 저 '성숙한 사람들' 역시 지혜를 가졌다고 주장하던 고린도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어휘일 듯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숙했다고 말하는 당신들은 사실 지혜를 논할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현시대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져 가는 현시대 통치자들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영향력'을 얻기 위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이 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은 성령 앞에서 사그러져 가는 풀일 뿐입니다. 


  참 지혜는 미스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혜를 세상에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본래 옳은 것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옳았던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처럼 쓰이는 지혜가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내려오는 '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올'이 미스테리였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현시대의 통치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지혜입니다. 영향력을 얻으려는 자들, 그리고 그 영향력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자들은 결코 그 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약함'을 이해했더라면, 메시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하려던 이스라엘과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로마는, 공모하여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었고, 바로 그 십자가에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창조되기 전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이 미스테리 속에 감추신, 참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가 밝혀졌을 때, 그 때는 현시대로 새로운 시대가 돌입합니다. 그 새로운 시대는 감당할 수 없는 지혜로, 하나님의 약함을 구현하는 새로운 가족들을 통해 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사야 64:4를 인용합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지혜,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지혜,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해골 언덕에서 무참하게 죽임당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 역사적 사건이 이해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알 수 없는 이 지혜를 숨님을 통해 계시하셨다고 말합니다.


(2)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통해


고린도전서 2:10b~13


  그렇게 하심은, 숨님은 정녕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찾아 헤아리시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심은, 사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아무도 모르듯,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숨님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숨님은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가르침 안에서 지혜로운 이치로 하는 말이 아니라, 숨님의 가르침 안에서 말합니다, 숨님의 일들은 숨님으로 해석합니다.


  지혜와 숨님의 관계에 대해서, 바울은 '가르'로 시작하는 두 개의 문장을 이어갑니다. 


ㄱ) 숨님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
ㄴ) 숨님이 없으면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다.


  ㄱ)은 로마서 8:27과 같은 내용입니다.(http://jaeduggi.tistory.com/663 참조) 아무도 하나님을 본적이 없으나 그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숨님 뿐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참 지혜는 숨님으로부터만 옵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생각을 아시는 숨님을 받았으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시대에 드러나게 하는(영광) 사람들입니다. 그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약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해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그 하시는 일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울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으로 이해하는 지혜를 가지고 말할 때, 고린도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바울은 성령과 지혜에 대해서 두 가지 짧은 문장을 제시하고는 다시 앞에서 인용했던 이사야 64:4에 대한 풀이로 돌아갑니다. 아무도 본적도 들은 적도 생각해본적도 없는 그 지혜는 오직 숨님을 통해서만 이해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숨님의 일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숨님으로만 됩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지혜를 추구하는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일까요?


(3) 성령없는 보통 사람


고린도전서 2:14~16


  그러나 보통 사람은 하나님의 숨으로부터 온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숨으로 분별하는 사실이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숨님의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하지만, 그들 자신은 어느 누구의 분별에도 메이지 않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 분을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의 생각을 가졌습니다.


  본문에 '보통 사람'이라 번역해놓은 것은 '퓨시코스'라는 단어입니다. '자연인'정도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성령과 무관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숨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가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성령의 방식이, 그에게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반면 숨님의 사람은 숨님의 일들을 분별합니다. 그러나 자연인에게는 성령인을 분별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어찌 분별하겠습니까? 자연인이 어찌 분별하든지, 성령인은 성령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속한 사람들이 퓨시코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에클레시아를 세운 것은 분명 메시아 십자가의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숨님의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현시대에 속한 이들은 오는 시대에 속한 이들을 어리석다 생각합니다. 오는 시대에 속한 이들을 다른 말로 하면 '미래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일본 에도 시대에 떨어진 현대인 의사에 대한 만화를 봤습니다. 그를 보는 시각은 대부분 동경과 경탄, 혹은 질투였습니다만, 실제로 오는 시대에 속한 이들을 보는 현대인의 시각은 어리석음과 무관심인듯 합니다.


  어찌되었든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에는 애매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바울은 지혜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메시아 십자가의 복음을 떠나서는 성령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성령이 있습니다. 그들은 퓨시코스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받은 사람에 걸맞게 이해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숨님에 따라 모든 일을 분별하는 바울의 눈에, 그들은 성령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성령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도 분명합니다.

(4)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당신들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3:1,4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숨님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었고, 오히려 살몸 안에 있는 자, 곧 메시아 안에 있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하듯이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주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옛날 방식대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디든 시기와 말다툼이 있다면, 여러분이 한낱 보통 사람으로 행동하면서, 옛날 방식대로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나는 바울 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아볼로 편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니, 여러분은 한낱 사람인 것 아닙니까?


  바울은 그들을 '메시아 안에 있는 철부지 어린아이들'로 봅니다. '메시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들도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말은 그들이 올바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 자신은 성숙한 사람들이라 지혜를 논할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바울이 보고 있는 진실은, 그들은 철부지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러니 숨님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공동체 안에서 '숨님의 사람'과 '철부지'로 나눌 수 있는 일종의 계급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며 오랫동안 오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엘리트주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메시아 십자가를 서두에 언급한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숨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메시아의 약함에 동참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분열이 아니라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이 내 손목에 대못을 박아넣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참된 '영(숨님)성'은 분열이 아닌 하나됨을 이룹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값없이 하나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귀합니다.

  문제는 고린도의 에클레시아가 영적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현시대의 문제를 초월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현실을 살아내는 힘이 있을 때, 비로소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숨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숨 쉬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숨님의 사람으로 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애매함. 숨이 있음에도 숨의 사람으로 대할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은 부활을 부정하는데까지 이릅니다.(15장)


  그럼에도 바울의 언어 사용을 통해서, 편 나누기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전달하려는 그의 고분분투를 봅니다. '숨님의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을 비교하고, 이어서 '메시아 안에 있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라는 표현 속에서, 그들의 토대가 메시아 예수이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려는 따뜻한 어미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고린도 사람들은 어미가 자신들에게 전해준 것을 그저 '젖'이라 생각하며 폄하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들은 단단한 '지혜'를 먹고 산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서 바울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것은 커녕 젖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분열입니다. 옛날 방식의 삶입니다. 서로 분열하고 있으면서도 지혜를 운운하고 있으니 그 지혜는 지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현상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나, 성령을 받은 사람에 걸맞지 않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들 말입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바울이 무어라 말하는지 좀 더 귀 기울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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