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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0~17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이제 나는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해야 하고, 여러분 가운데 틈이 없어야 하며, 바로 같은 생각과 같은 지식으로 온전히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 바울이 모든 메시아 예수의 에클레시아에 은혜와 평화를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초대 교회 공동체가 문제가 없이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가, 그것이 나중에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쉽지만, 오늘 우리가 보는 편지에서는, 이미 서로 다른 사람들이 메시아의 이름으로 하나된다는 것은 퍼즐조각이 불협화음 없이 딱 들어맞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붙잡고, 매순간 선택의 순간 속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일이었고,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이는 오늘 새벽에 저를 깨워, 저 '같은'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지식을 갖는다고 해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집단이든 그 집단은
공유하는 말과 생각과 지식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하나됨을 위해 섬기는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은 전체주의를 뜻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의 중심에 모든 것들이 굴종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명력은 구성력입니다. 각기 다른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생명력이 있습니다. 눈도 다르고, 코도 다르고, 입도 다르나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얼굴로 모아놓은데 생명력이 있습니다. 제각기 세포마다 생김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나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구성하고 모아놓은 데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은, 모든 것을 모아놓고서 자신은 사라집니다. 모든 것을 모아놓는 힘은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원자와 원자 사이를 붙잡고 있는 힘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지만, 실로 든든히 붙잡고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사람들을 연대시키는 성령. 그 연대는 강력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연대해봐야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생명력입니다.
그러니 저 위의 '같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중심을 따라 우리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분열을 낳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데, 보이는 것이 중심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등한히 여기게 됩니다. 우상이 달리 우상이 아니라,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는 부분이 가운데 놓이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주의'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주의'라는 말은, '~'를 중심으로 놓자는 말인데,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놓자는 말인데, 저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대표하시는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저 자리에 자유를 놓아도 안되고, 자본을 놓아도 안되며, 공산을 놓아도 안되고, 심지어 사람을 놓아도 안됩니다. 저 자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리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름 붙여놓은 것 아니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붙여 놓은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닐진대,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중심에 놓는 것이란 온통 자신이 이름붙인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피조물들의 이름을 붙일 자격을 주셨는데, 그 아담은 자신이 이름붙인 피조물을 제 중심에 놓는 꼴이니 자가당착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름을 붙일 수 없이, 처음부터 계셨고, 모든 만물을 대표하실 수 있는 한 분만이 중심이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1:20~23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름붙이지 않은 이름, 만물을 대표할 수 있는 이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게다가 우리는 이 이름만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은 언제나 표지판입니다. 이 이름이 귀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름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표지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들지 않은 표지판을 따라, 그 이름의 실체를 만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거룩한 숨결을 만나도록 이끄는 표지판이요, 그 성령을 따라 우리는 오는시대를 걷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계시록 7: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은 하나님을 가온에 놓은 말입니다. '같은 생각'은 하나님을 가온에 놓은 생각입니다. '같은 지식'은 하나님을 가운에 놓은 지식입니다. 하나님 곧 전체를 대변하는 말들이요, 분열하는 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에클레시아에 말 때문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말이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누구를 대변하는 말입니까? 누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입니까?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글로에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분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내게 생생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각각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메시아 편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분열은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중심은 하나여야 합니다. 둘 일 수 없습니다. 가운데 '중(中)'이 보여주듯, 위로부터 아래로 꿰뚫린 것은 하나 뿐입니다. 옛 선인들의 지혜가 보여주듯, 입에서 나오는 것이 왼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오른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중(中)'인데, 그것은 '하나(一)'입니다.
그런데 거짓 중심은 여럿입니다. 이 거짓 중심을 보여주는 말이 "편"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바울 편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아볼로 편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아볼로에 대해서 사도행전 18장에서 이미 살펴보고 왔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로부터 진정한 중심에 대해서 배운 아볼로는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섬기기 위해 아가야로 떠났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를 거짓된 중심삼는 사람들 마저 생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는 베드로 편이라 말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와 베드로가 어떠한 관계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메시아 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편'을 뒤에 붙일 수 있는 메시아는 보이는 인간들을 중심으로 내세우기 위한 나팔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메시아 예수는 전체를 대표하는 중심이시기에, 뒤에 '편'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하나됨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원수에게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하나의 이름으로
분열을 낳는 교묘함이 '메시아 편'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습니다. 아마도 '메시아'라는 이름을 내걸고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야구경기가 생각났습니다. 편을 나누어 서로 주도권 경쟁을 하는 구도 말입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게다가 에클레시아에 속한 이들은 주도권을 가지고 싸워야 할 경쟁상대들도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 로마 철학의 홍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제자를 삼으며 철학 학파를 만드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말을 가지고 하는 경쟁이었고, '어디가 강한 팀인가'는 오늘날처럼 사람들의 관심거리였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말을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철학학파로 오해한듯 합니다.
메시아께서 나뉘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따라서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외에는, 내가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메시아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으니, 만일 지혜의 말로 한다면 메시아의 십자가는 그 능력을 잃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열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십자가와 세례입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의 말로서 포착되지 않은 중심을 찾기 위해 바울은 사건들을 가져옵니다. 분열하는 말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가져옵니다. 바로 사건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시간 속 과거를 손댈 수 없습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그 변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이 분열을 싸매는 에클레이사의 방법이었습니다. 분열하는 두 집단 사이의 낀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이가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섬기는 우리는 분열을 막기 위해 낀자리로 들어가지는 못할망정, 분열을 낳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말을 넘어서.
이것은 말을 가지고 주도권을 얻으려는 철학학파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세례'와 연결시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 '세례'에 대해서 바울은 설명할 것이지만, 그 전에 이미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편'으로 오해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세례는 세례를 베풀어준 사람의 제자가 되어서 그들끼리의 분파를 만들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십자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는 죽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된 내가 죽고, 이제는 죄를 알고 죄를 저지르지 않는 의인으로 부활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따라서 죄를 모르고서 저지르는 나의 인간성은 세례와 더불어 죽어버립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편 나누는 육체의 인간성도 물 속에서 죽고 씻겨 일어납니다. 생존과 편 나눔은, 세례받아 물 속에서 다시 일어난 이가 추구할 것이 못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례 직후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곧 자신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로마서 2:7,8
사람이 참을성 있게 좋음을 행하므로, 뚜렷과 존귀와 불멸을 구할 때,
한 분은 그들에게 '오는시대의 삶'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편을 나누고, 참을 따르지 않으며, 불의를 행하는 이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따를 것입니다.
지혜의 말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드러난 메시아 예수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말을 붙인다 한들, 그 말들은 사건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을 따르겠다는 게 세례라는 또다른 사건이요, 십자가를 따르는 사건들을 만드는 삶 없이, 대체 무슨 말로 지혜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보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났던 회당장 그리스보가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보가 바울편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세례는
생사(生死)가 아닌 사생(死生)을 위해 받는 것이요, 이것은 편나눔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사 진정한 하나됨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편을 나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살아가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그저 세상의 철학 학파중 하나로, 스포츠 팀의 하나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혹시 오늘날 기독교인은 '메시아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메시아란 그 날의 사건들과 무관한, 그저 이름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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