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한 자가 나름 이해해보겠다고 이 아침에 성경을 풀어 적어보았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분명한 것은, 저 첫 줄에 "내 가족들이여"를 읽었을 때, 바울은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연결된 바울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우주 가족. 그러니 글자를 전달함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연대하고 있음을 글자를 통해 확인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


  나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힘있는 사람도 없었고, 귀족으로 태어나 출신 배경이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있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 기준으로 볼 때 힘없고, 출신 배경도 없고, 지혜 없는 이들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마치 출애굽했던 히브리 노예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택하셨으니, 힘있는 자들의 힘을 폐하시려고 심지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신실한 사람들을 새로이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그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전에 썼던 풀이들을 지우고 새로 씁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새로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특별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수원시 각 처에서 모여, 그것도 아침 여덟시에, 1000원짜리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낯선 혹슨 식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참이 아니라면 들을 이유가 없을 것이요, 만일 참이라면 그대로 살때만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부르심

  우리는 1장을 마무리 짓는 오늘 다시금 '부르심'을 발견합니다. 이 '부르심'이라는 말을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자면. '정체성'일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바울은 각자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말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을 떠올리는 말이었고, 우리로 하여금 1) 죄가 종노릇 하는 현시대를 떠났는지, 2) 오는 시대의 사람들과 연대(이 연대가 '에클레시아'입니다.)하고 있는지, 3) '인간다움'을 이루어(이것을 위해선 '코이노니아'가 필요할 것입니다)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을 이뤄야 하며, 그 결말이 어떠할지를 한 마디로 하면 '부르심'입니다. 누가 나를 불렀습니다. 아니, 누가 우리를 불렀습니다. 우리를 부른 이는 누구십니까? 저 부르심이라는 한 마디에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우리와 세상을,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합니다. 설령 우리가 보는 현실의 분열의 연속일지라도, 성령으로.


  그러나 이 부르심을 말로 바꿔놓으려는 세력은 타락 이후 언제나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입니다. 말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사건입니다. 무수한 말의 세찬 홍수 속에서도 1세기의 해골언덕의 십자가는 요동도 없이 박혀있습니다.


-말과 지배

  여러 단어를 끄집어 냈지만 결론은 쉽고, 까막눈 할머니도 끄덕일 내용입니다. '말씀'은 '말>씀'이 되어선 안됩니다. '도(道)'는 흐름(行)이요, 우리의 몸을 통째로 요구합니다. 우리가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흐르는 그 조화로운 흐름에 자신을 던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부르심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란 땅에 머물러만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말쟁이들은 '믿음'을 '믿는 생각(신념)'으로 축소시켜 놓습니다. 왜 삶을 말로 축소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죽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죽어서 새로 나기를 꺼리기 때문에 말만 합니다. 그 결과는 위계의 피라미드입니다. 말 잘 하는 이들이 대접을 받고, 사람이 사람 위에 자연스레 올라섭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에서는 저 따위 짓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 여러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고, 자신들의 거룩한 부르심을 쪼개놓고 그 뒤에 '편'이라는 글자를 붙여 놓았습니다. 


-케리그마, 새로운 왕에게 엎드려

  마음이 바쁩니다. 마왕을 없애러 가는 여행을 시작했는데, 매일 똑같은 던전을 뒤지고 있어선 되겠습니까? 부르심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주 밖에서 누가 나를 불러냈다는 말은, 내가 갈 길이 있고, 이뤄야 할 일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 부르심을 받았으면 어서 이집트를 바삐 떠나, 오는시대로 자신의 몸을 내던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과 편나눔으로 헤매고 있는 에클레시아를 향해 바울은 사건을 선언합니다. 그 사건 속에서 메시아 예수께서 편나눔의 악을 깨뜨리셨으니, 그 새로운 왕의 다스림 안으로 어서 들어가자는 현시대 안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선언입니다. 하늘과 땅의 왕, 인자. 하늘로 자신의 몸을 잠깐 감추신 메시아.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여러분들이 읽어서 이해 못할 내용이 없습니다. 바울은 각자의 현시대에서의 추잡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다시금 사건을 호소합니다. 그 현시대에서부터 출애굽할 수 있게 했던, 그 어린 양 메시아의 죽으심! 메시아의 죽음으로 떠난 여행, 오는시대. 나는 왜 이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새창조와 자랑

  제가 만든 '성경에서의 시간관' 종이를 떠올려 보세요. 현시대와 오는시대. 이 둘 밖에 없었던 시대 속에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친 새로운 시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시간을 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셨을까요? 이유는 뚜렷합니다.


  새로운 시간은 새로운 모태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시간 속에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람은 제자리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또 사람과 창조 세계 사이에서 제자리를 알고 찾으며 발견하고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끝내 자기 자리를 얻을 사람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말했던, 저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가 누구인지 드러냅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신실한 사람들을 새로이 창조하셨습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이 신실한 사람의 새창조에 대해서는 로마서 3~6장을 읽어야 하는데, 나중에라도 우리가 로마서를 가지고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신실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 뒤에 따라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랑'입니다.


  '자랑'은 '뚜렷'입니다.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전에 우리가 '영광'에 대해서 배웠을 때와 비슷합니다. '뚜렷'은 '뚜렷'인데, 하나님 편에서는 영광이고, 사람 편에서는 자랑입니다. 그래서 영광과 자랑은 서로 짝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자신을 뚜렷이 드러내시니 영광입니다.


  다른 무언가를 자랑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진정한 중심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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