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의 주제는 메시아 안에서 일어난 언약 갱신과 언약 재정의
A. 10:1~4 토라의 결말, 메시아 예수
로마서 10:1~21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내 가온의 만족과 구원을 위해 그들대신 하나님께 간구함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출애굽)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음을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결말이 확실히 드러난 앎'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앎이 없는 그들은, 자기가 생각한 의 세우는데만 애쓰고, 자신을 하나님의 의 아래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모든 자를 의롭게 하시는 메시아가 토라의 결말이신데도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습니다. 바울은 지금 메시아 예수를 대적하고, 더불어 자기 자신도 대적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말이 확실히 드러난 앎'이란 바울이 지금까지 설명했던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는 언약 프로젝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지식'이라 되어 있는데,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로 인해 새롭게 해석된 토라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성경을 인용해왔고, 이것은 누구보다도 유대인들에게 호소하기에 적합한 방식일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로 인해, 모두가 새로워질 수 있는 새로운 맥락이 밝혀졌으니,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이 새로운 맥락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아담성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을 따라, 온전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부활의 길로 말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은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미 3:21~26에서 다루었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이 드러낸 것은 무엇입니까? 3장에서 사람들의 반론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즉 우리가 신실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산정받듯, '하나님의 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나타나는 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도 실패하게 될 것인가?" 에 대한 로마서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른 의를 세우고 있습니다. 흔히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의를 '도덕적 실천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의'라 생각합니다만, 그러한 읽기는 중세의 생각을 A.D.1세기에 적용한 시대착오입니다. 일단 '의'라는 단어 자체가 약속과 상관이 있고,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스라엘이 세워놓은 의가 하나님의 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의는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 그 약속을 기이하게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의는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배제하는 의입니다. 따라서 그 속에는 아담성의 죽음도 없고(5장), 홍해를 건넘도 없고(6장), 토라를 이룸도 없으며(7장), 성령의 이끄심(8장)도 없습니다. 만일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과 무관한 의를 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그저 살몸의 자랑일 뿐입니다. 뜨거운 심판 아래서 말라 비틀어질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끄러움이 사랑으로 해결되지 못한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여있습니다. 그들은 토라를 붙잡고 있으나, 토라의 '결말'인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토라의 결말인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토라를 자랑하지만(3:27), 온전한 인간성인 메시아를 거절했기 때문에 토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2:23) 이것은 그들이 비뚤어짐의 노예요, 하나님의 심판 아래있음을 보여줍니다.(1:18)
메시아가 토라의 결말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실함만으로 의롭다 산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그들은 신실하지도, 의롭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는 시대를 기다리고 있으나, 오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현시대에 남아 있습니다.
B. 10:5~13 신명기 28,29장의 맥락
즉 모세는 토라로 얻는 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토라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계명들 속에서 살리라." 신실함으로 얻는 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라거나
(이것은 메시아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짓입니다),
'누가 심연으로 내려가겠느냐?'
(이것은 메시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짓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합니까?
C. 10:9 언약갱신(신 30)의 정점
"말숨이 네 입 속에 있으며, 네 마음 속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신실함의 말숨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당신의 맘으로 한 분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즉 맘으로 신실하여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저에게 신실한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모든 사람의 한 주님은, 그이를 향해 소리쳐 부르는 모든 사람 속에 가득 차오르시어, 유대 사람이나 희랍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 그대로 '토라의 결말'인 신명기 30장을 인용합니다. 토라는 성경의 첫 다섯권의 책이니, 다섯번째 책인 신명기는 말 그대로 토라의 결말입니다. 그 신명기 30장이 등장하는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29장은 복과 저주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복보다는 저주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29장에서 이스라엘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고, 19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완고해질 것을 염려합니다. 그리고 만일 이스라엘이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로 돌아가면,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 보내심이" 현실이("오늘날과 같다 하리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포로기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30장으로 넘어가면 대망의 결말이 등장하는데, 제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은 30장의 표제어를 이렇게 써놨습니다. 바울이 지금 유대인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회개하면 포로에서 놓이리라."
바울은 메시아 예수와 성령으로 새롭게 된 토라 이야기의 맥락 위에서, 토라의 결말인 신명기를 새롭게 읽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0:11~14의 인용은, 말씀을 찾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고 심연 깊숙히 내려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이미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시고, 인간 내면의 근원적 자리까지 찾아오신 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의 입과 가온에! 이것이 '신실함'이요, 토라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포로기를 끝내고 마침내 돌아온 사람들이 토라를 지키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숨이 네 입 속에 있고,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을 오해해선 안됩니다. 그저 말만 그렇게 하고, 생각만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8장에서 비뚤어짐의 노예로 있던 자들이 출애굽하면, 즉 포로기가 끝나면, 우리 마음 속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속에 살고 있던 비뚤어짐은 죽고, 거룩한 숨님이 내 속에 사십니다. 그래서 "말숨"이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속에 불어온 사람은 더이상 비뚤어짐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포로기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포로기가 종식되는 신명기 30장을 성령께서 속에 새로이 지어주신 신실함으로 비뚤어짐의 노예생활이 종식되는 것으로 읽고 있습니다. 마음과 입에 말숨이 있는 것은, 성령으로 인간성이 새롭게 되는 언약갱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당신의 맘으로 한 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이 더이상 비뚤어짐의 노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 속에 성령이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의롭다 산정되었고, 오는 시대의 새로운 맥락 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신명기 30장을 새로이 읽은 것이지, 그저 말뿐인 구원을 정당화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한 주님은, 그이를 향해 소리쳐 부르는 모든 사람의 맘에 차오르시어" 라는 말이 바로 성령에 대한 진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맘에 차오르십니다.(그래서 성령을 증인으로 세운 말은 '참'입니다.) 그 결과 우리 속에 신실함이 창조되고, 우리의 살몸은 하나님 거하시는 성전이 되며, 비뚤어짐을 이기며, 오는 시대로 돌입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며, 부활로 아들됨이 완성되며, 새롭게 된 우주를 상속받게 됩니다.
또한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음'은 타락이 뒤집어졌음을 보여주는 표지이자,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미 바울은 로마서 5:5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어, 부끄럽지 않다"는 말을 했었고, 또한 어제 확인한 바와 같이, 1:16,17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즉 메시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재해석된 토라 이야기)'가 부끄럽지 않다고 언급한바 있습니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마침내 드러났고, 인류는 메시아 예수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톰라이트의 말대로 "그이는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동시에 신실함의 대상"입니다!
고린도전서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살몸으로는 이스라엘에서 나신 그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충격적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그이는 '주'라는 호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이의 신실함을 통해 모든 사람은 차별없이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받습니다. 앞서, '구원'이라는 말 대신 '인간다움의 보존' 이라는 말을 쓴 것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그 형상이 새로워지고 완성되는 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 이뤄진다는 내용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즉 '구원'이라는 말이 죽어서 어디를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그 사람 마음을 채우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해서, 온전한 인간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A': 10:14~17 아름다운 발, 신실함은 들음에서
그들이 과거에 믿지 않았던 한 분을 어찌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과거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소식을 전하는 자 없이 어찌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없다면 어찌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왕의 소식을 전하는 발들이여!"
그러나 모두가 그 왕의 소식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주여,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믿었나이까?"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실함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메시아의 말숨에서부터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바울이 신명기 30장을 통해 언약이 새롭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성취의 중심에 메시아 예수가 계십니다. 그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에게는 토라를 지키는 행위로는 얻을 수 없는 의의 산정이 이뤄지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마음과 입으로 예수를 '주' 온 우주의 왕이라 고백하고, 새로운 인간성으로 살아갑니다.
이 소식이 곧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 하나님께서 기이한 방식으로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냄받은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사도는 '보냄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의 발이, 이제 유대를 넘어 온세계로 뻗어나갑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뤄지고 드러난, 모든 사람이 차별없이,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타락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맥락이 온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니 이 사도들의 발걸음은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심판을 꿋꿋히 참으시며, 메시아 예수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시고, 마침내 비뚤어짐을 해결하시기 위해 기이한 일을 이루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야 말로 창조의 좋음을 이루시는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이방인에게 보냄받은 사도로서 바울은, 이방 선교에 대해서 짧게 논평합니다. "주여, 도대체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습니까?" 아마도 적은 사람들이 신실함으로 주께 나아왔음을 보여주는 진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평이 아니라, 이사야서 53장의 인용입니다. 앞서 "아름다운 발"은 이사야서 52장의 인용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신명기를 새로이 읽었듯, 이제는 이사야서 51,52을 새로이 읽고자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이사야 53장은 그 유명한 '종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이 해석하기 어려워했던, 고난받는 종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이사야 52장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이사야서를 신명기 30장과도 연결시킵니다. "신실함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메시아의 말숨에서 나옵니다."에서 말숨이 바로 신명기 30:14의 "말숨이 내게 가깝다"의 그 말숨입니다. 메시아의 말숨을 사도들을 통해 듣습니다. 그리고 그 들음에서 신실함이 나옵니다. 그러니 메시아의 말숨은 사도들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바울은 시편 18:5도 인용합니다. 노래소리와 말숨소리가 온 땅에 퍼졌습니다. 따라서 "말숨이 네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정리해봅시다. 사도들은 좋은 왕의 소식, 곧 메시아의 말숨을 전하기 위해 전세계로 퍼졌습니다. 적은 사람들이 사도들이 전한(새롭게 이해된 토라 이야기)를 듣고서, 신실함으로 주께 나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발과 해석을 통해서 메시아의 소식은 모든 세계로 퍼져나기에, 사람들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도 말숨은 아주 가깝습니다!
여기까지(10:1~17)가 (2) 포로생활, 칭의, 하나님의 의, 구원
A: 10:1~4 토라의 결말, 메시아 예수
B: 10:5~13 신명기 28,29
C: 10:9 입, 마음, 언약갱신
B': 10:5~13 신명기 28,29
A': 10:14~17 아름다운 발, 신실함은 들음에서
9:30~33은 이 부분의 도입이 되고, 10:18~21은 이 부분의 결말이 된다.
놀라는 이방인들과 시기하는 유대인들(9:30-33;10:18~21)
그들이 정말로 듣지 않은 것입니까? 그러나 제 대답은 이러합니다. 아닙니다!
저들의 노래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저들의 말숨소리가 땅 끝까지 퍼졌다.
그럼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제 대답은 이러합니다. 먼저 모세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백성 아닌 자 곁에서 질투나게 하며,
내가 너희를 어리석은 백성 곁에서 성내게 하리라.
이사야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나를 추구하지 않는 자들 속에서 내가 찾은 바 되었고,
나에게 묻지 않는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또한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믿으려 하지 않고, 반박하기만 하는 백성에게
내가 온종일 내 두 손을(τὰς χεῖράς μου) 내밀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온세계에 퍼져나가, 가까이 있는 그 말숨을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는가? 그럴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주도면밀하게 핍박할만큼, 토라를 새로이 이해한 사람들이, 혈통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 재해석된 토라 이야기의 전모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모르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와 성령으로 이해되는 이 새로운 읽기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앎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시 신명기로 돌아와 그 맥락을 이어갑니다. 먼저 신명기 32:21을 인용합니다.
신명기 32:20,21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즉 이스라엘이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우상숭배를 벌임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백성 아닌 자' 즉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므로, 이스라엘의 질투를 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선교를 신명기 32장의 성취로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1차적으로는 이방인 선교요., 2차적으로는 이방인들이 토라를 통해 온전한 삶을 삶을 사는 모습을 통해, 유대인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같은 맥락으로 이사야 65:1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이방인들'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토라를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됩니다. 기이한 사람들, 하나님의 우주 가족. 지금 바울은 메시아를 통해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하게 된 예수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야 65장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찌 생각하시는지를 보여주고서, 비탄에 잠깁니다.
'바울의 편지들 > 로마서 연구 v.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11:11~32 (4) | 2015.07.31 |
---|---|
로마서 11:1~10 (2) | 2015.07.31 |
로마서 9:30~33 (0) | 2015.07.29 |
로마서 9:6~29 (3) | 2015.07.28 |
로마서 9:1~5 (2) | 2015.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