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로마서의 세번째 토막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여기뿐만 아니라 3장에서도 한 번, 7장에서도 한 번, 이 유대인의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 3장에서는 "유대인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될 것이냐?"는 질문을 남겨놓았다면,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토라를 통해 벌이신 기이한 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8장의 장엄한 결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유대인들에 대해서 할 말이 남아있단 말입니까? 있습니다. 바로 "그렇다면 메시아 예수를 거절한 유대인은 어찌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서의 1/4에 해당하는 분량을 할애해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9:1~5
내가 메시아 안에서 참을 말합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거룩한 숨결 안에서 나와 양심이 함께 증언하는 것은 나에게 큰 슬픔이 있고, 내 맘에 사라지지 않는 걱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형제들 곧 살몸을 따라 나와 동류인 사람들을 대신해서라면, 메시아로부터 나 자신이 끊어져도 좋다고 내가 줄곧 기도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들로 받아들여짐과 드러남과 언약들과 토라를 제정해주시고, 그 토라에 따른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있고, 살몸으로 따지면 메시아도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그이는 만물을 향해 계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입니다. 아멘)
바울은 자신이 '참'을 말하지, '거짓'이 아니라 말합니다. 우리말 '참'은 '속이 꽉 차있다'는 말이고, '거짓'은 '거죽'에서 왔습니다. 이와 비슷하게도, 바울은 자신의 말이 참인 이유에 대해서, 자신과 함께 있는 거룩한 숨결과 양심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빈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토록 거룩한 숨결과 양심을 증인삼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쁜 내용이 아닙니다. 슬픔과 걱정입니다. 흔히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슬픔과 걱정이 없어야 한다고들 생각하지만,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에게도 슬픔과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슬픔과 걱정의 내용을 밝히기 전에, 자신이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언급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입니다. "메시아로부터 나 자신이 끊어져도 좋다고 내가 줄곧 기도해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단어는 '아나떼마'라는 단어입니다. 세계사 시간에 교황권과 왕권이 대립했다는 내용을 배우면서 '카노사의 굴욕'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때 교황이 왕에게 선언하는 것이 '아나떼마'입니다. 즉 언약 공동체에서 끊어졌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의 이 충격적인 기도 이면에는 모세의 기도도 떠오릅니다.
출애굽기 32:30~34
이튿날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서, 당신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빌겠습니다."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이 충격적인 기도를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언약 이뤄짐을 이야기했지만, 바울은 그 언약 이뤄짐에서 자신이 끊어진다 할찌라도,(이 말은 그가 앞서 말한 '메시아의 대신 처벌 받으심', '의의 산정', '세례', '단련된 성품', '부활',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모두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줄곧 무언가를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나의 형제들 곧 내 살몸을 따라 나와 동류인 사람들." 바울은 불과 바로 앞 내용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으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길 바라면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그만큼 바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반유대주의나, 어떠한 류의 혐오주의와 연관시키려 했던 모든 읽기들은 거절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망할지언정, 이스라엘은 구원받게 해달라 하는 이 바울의 기도(그리고 앞에서 확인했던 모세의 기도도)를 통해, 9장 시작의 "거룩한 숨결"이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숨결"은 곧 예수께서 숨 쉬셨던 숨인데, 그 성령으로 숨 쉬었던 사람,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이 바로 바울의 기도였습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고, 모든 사람을 살게 했던 바로 그 걸음 말입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던 그이가 그토록 괴로워하셨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습니다.(그랬다면 그에게 폭풍우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던 제자들을 혼내실 이유도 자격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이유는, 많은 사람을 위한 제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과 끊어지는 저주를 자신이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소리쳤던 말을, 훗날 사람들은 실패한 혁명가의 절규로 들었지만, 그것은 예수도 모르고 거룩한 숨결도 모르기에 오해한 것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27:46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시편 22:1의 인용입니다. 시편22편 전체를 읽으면, 예수께서 어떠한 숨결로 사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숨결로 바울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 숨결로 숨 쉬는 공동체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린도후서 4:12)"
우리가 흔히 '희생'이라고 말하는 가치는, 자신이 버림받는다는 아픔을 겪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나 하나 죽고 끝내자'가 아닌(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포기'입니다), 자신이 상처와 아픔을 감내하더라도, 그 뒤에 새로운 결말이 펼쳐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것을 '화해'라 배웠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믿기 때문에 상처와 아픔을 견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어려움 속에서 인내와 단련된 성품을 얻어, 이것으로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가장 극한의 어려움. 메시아 예수를 전하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동족들을 어찌 바라보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거룩한 숨결 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입니다. 이 세번째 토막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성령으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기도 내용을 밝히다가, 앞에서도 몇 번 보았듯이 자연스레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이미 성령으로 숨쉬는 바울의 생각과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들로 받아들여짐과 드러남과 언약들과 토라를 제정해주시고, 그 토라에 따른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있고, 살몸으로 따지면 메시아도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그이는 만물을 향해 계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입니다. 아멘)
"그들에게는 아들로 받아들여짐" 이라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떠오를 것이고, 그 후손들에게 '영광'과, 언약들이 있었고, 시내산에서는 토라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줄곧 이어져 포로기를 지나왔고, 그 포로기 속에서도 그들은 예배와 약속과 조상들의 뜻을 전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살몸의 후손으로 메시아도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만물을 향해 계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마침내 드러났습니다.(이것이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만물을 향해 계시는 메시아,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았으나, 지금은 서로를 판단하며 어둠 속에 남아 있고자 하는 이들을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겠습니까? 올바른 사고방식(9~11장)에서부터 올바른 실천(12~16장)이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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