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의 얼개

A. 11:1~10 "남은 자"

  B. 11:11,12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의 풍성함

    C. 11:13~15 중심 : 사도직분, 몇이라도, 부활

  B'. 11:16~24 첫 곡식, 감람나무 비유

A' 11:25~32 a.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5~27)

                       b. 모든 사람을 위한 불순종과 긍휼(28~32)


로마서 11:1~10


  그래서 내가 마침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일 없습니다! 나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난 자이면서도, 베냐민 지파입니다. "하나님은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 그럴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증거로 바로 자기 자신을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씨"입니다. 앞에서 이스라엘A와 이스라엘B를 나누었습니다. A는 "자녀"라는 단어를 배정했고, "자녀가 모두 씨가 아니므로" 이스라엘 B는 "씨"라 불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씨의 후손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B이면서도 이스라엘A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A를 버리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스라엘A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A에 속한 바울을 건져, 이스라엘B로, 즉 "씨"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A에게도 오는시대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았다"는 말의 뜻은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우주 가족이 될 수 없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을 꿋꿋이 참으시면서, 모든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인간다움의 길을 열어두셨고, 신실함으로 그 길에 들어서는 어느 누구도 판단하고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말은, 그 길을 걷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에게도 한 가지 기준이 적용됩니다. 의의 산정을 통해 걷는, 메시아 예수와 죽고 사는 한 길, 인내와 단련된 성품으로 인간다워지는 길,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 새 몸을 얻고 새 우주를 상속 받는 길. 오직 이 한 길 뿐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A 상태를 고집하고 있다면,(그 정체성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인간답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새롭게 하시는 자비의 길을 거절한 것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어 열어주신 새로운 맥락을 배제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배제했다는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당신이 만유의 왕을 배제했습니다. 


  바울은 사무엘상 12:22를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는 이 한 절만 보고는, 바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 맥락을 살펴봅시다.


사무엘상 12:20~25 

사무엘이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이제부터는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마음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십시오!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쓸데없는 우상에게 반하여, 그것을 따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은 헛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기꺼이 자기의 백성으로 삼아 도와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기의 귀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 당신들은 주님만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 바쳐서 진실하게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주님께서 당신들을 생각하시고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하셨는가를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들이 여전히 악한 행동을 한다면, 당신들도 망하고 왕도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와 심판입니까? 아니면 긍휼과 호소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사무엘과 동일시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분명 그들에게도 차별없는 문을 열어두셨는데, 그 길을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그들을 위해서 바울은 사무엘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용에 추가된 "그 미리 아신" 이라는 말은, 8:18~30을 다루었을 때의 그 '미리'입니다.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유대인들은 폭력적 승리를 바라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미리' 계획해두신 길은, 모든 사람이 새로워지는 새로운 세계(세계라는 말도 아깝습니다. 우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미리'는 모든 것이 정해져있다는 숙명론도 아니고, 모든 것이 뜻없다는 허무주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 안에서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호소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 바울은 분명 하나님의 소망으로,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엘리야에 관해 기록한 것을 모릅니까? 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해서 고발하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주여, 저들이 당신의 예언자들을 죽였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어버려서,

나 하나만 뒤에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 마저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엘리야에게 무어라 했습니까?


"나에게 내가 남겨둔 칠천 사람이 있다.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이들이다."


  바울이 로마서의 세번째 토막, 즉 9~11장 이야기를 어찌 시작했는지를 떠올려봅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토기장이 이야기는 예레미야에서 인용한 포로기에 대한 내용이었고, 호세아, 이사야를 언급하며 포로기에 대한 진술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잠깐 멈춰서 9:30~33에서 이스라엘이 이 이야기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확인하고서, 신명기 30장의 재해석을 통해 포로 해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 포로해방의 소식이 "아름다운 발"을 통해 온세계에,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전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 속에서 바울은 의도적으로 빠뜨리고 온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이야기와 포로기 사이의 이야기, 즉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 인용이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인용이 '엘리야'입니다. 바울은 토라의 흐름, 성경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의 흐름을 알아야만 합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신명기 28,29장 말씀에 따라, 언약에 충실할지 안할지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놓였을 그 시절,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며, 심지어 예언자들을 죽이고, 이제는 엘리야마저도 죽이고자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왜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맞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때로 옳은 것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내 생각과 실천에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옳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언약백성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지만,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그들 조상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명기의 저주의 내용들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었고, 언약을 이루기는 커녕, 언약을 뒤엎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마치 바울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당시 목숨을 위협받던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비뚤어짐을 고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답변을 인용합니다. "나에게 내가 남겨둔 칠천 사람이 있다." 즉 남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씨"입니다. 자녀들이 패역한 와중에도,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씨를 남겨두셨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왕국시대의 이스라엘도 비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남은 자가 있다면, 오늘날도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이것에 대해 이사야를 인용하며 언급한 바 있습니다.


로마서 9:27~29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렇게 외치기를,


"비록 이스라엘 아들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보존될 것이다.

주께서 이 땅위에서 온통 이루시며 잘라내실 그 말씀을 행하시리라."


이사야는 앞서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이 되었을 것이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는 이어져갑니다. '하나님은 의', 그 분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이 9장을 시작하며 했던 말이 정녕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지금'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거저주심으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장하듯) 특정 사람들의 노동과 자랑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비뚤어진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사람들 마저도 버리지 않으시고, 새 길을 여시어 남은 자를 보존해두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B로 넘어온 이스라엘A 출신 사람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A를 아담성으로, 이스라엘B를 메시아성으로 읽으면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신실함으로 준비된 남은 자들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저주심 속에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5:1,2

  그러므로 우리가 신실함으로 의롭다는 선고를 받았으니, 우리 주 메시아 예수로 하나님을 향하여 평화를 누립니다. 또한 그 예수를 통해 우리는 신실함으로 거저주심 속에 들어감을 얻었고, 하나님의 드러나심을 소망하며 소리 높여 한 분을 자랑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지금 쫓는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그것에 다다르지 못했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졌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구멍난 인격을 주셨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리.

오늘날 까지도."


  바울은 다시금 멈춰서서 이스라엘A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 내용은 앞에서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라고 설명했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A는 다다르지 못했으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B는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2:7,8

 사람이 참을성 있게 선을 행하므로,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구할 때, 한 분은 그들에게 '오는 시대의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편을 나누고, 진리를 따르지 않으며,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따를 것입니다.


  바울은 "나머지 사람들"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나머지 사람들"은 앞에 나온 "남은 자"와 다른 사람들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둘 다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헷깔립니다만, 맥락을 찬찬히 읽어왔다면 잘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남은 자"는, 이스라엘A에서 이스라엘B로 출애굽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뒤의 "남은 자"는 이스라엘B로 출애굽하지 않고, 남아있는 이스라엘A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머지 자녀들"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이 사람들의 특징은 완악함입니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이것은 파라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이 완악함 마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언약 이야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을 파라오 배역을 고집할 핑계로 삼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이사야 29:10을 인용합니다. 앞에서 토기장이와 진흙 이야기가 나오는 바로 앞 내용입니다. 바울이 어떠한 전체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지 염두하면서, 인용들을 따라갑시다.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의 밥상이 

저들에게 올가미와 사냥 덫과 돌부리와 

(저들의 행위에 대한) 마땅한 보응이 되게 하소서.

저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저들의 등이 항상 굽게 하소서."

 

  다윗도 왕국시대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포로기의 실제적인 원인을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즉 지금의 이스라엘이 붙잡고 있는, 그 고귀한(?)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찾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했다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비뚤어짐의 노예로 살아가는 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실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호소합니다. 바울은 시편 69:22,23을 연결합니다. 앞 뒤 맥락을 살피기 위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인용문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시편 69:19~24 

주님은, 내가 받는 모욕을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받는 수치와 조롱도 잘 알고 계십니다. 나를 괴롭히는 대적자들이 누구인지도,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수치심에 갈기갈기 찢어진 내 마음은 아물 줄을 모릅니다. 동정받기를 원했으나 아무도 없었고, 위로받기를 원했으나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을 타서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 그들 앞에 차려 놓은 잔칫상이 도리어 그들이 걸려서 넘어질 덫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누리는 평화가 도리어 그들이 빠져드는 함정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못 보게 해주시며, 그들의 등이 영원히 굽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분노를 그들에게 쏟으시고, 주님의 불붙는 진노를 그들에게 쏟아부어 주십시오.


  이 시편이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시편임을 알면, 이 시편의 화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밥상'이 가리키는 바는, 이방인들을 배제했던 유대인들의 밥상이요, 그들의 연대가 곧 악과의 연대가 되어 한 사람에게 수치와 조롱을, 그리고 죽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버림받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의 신실함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드러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만으로 저 충격적인 심판과 저주로부터 벗어나, 거저주시는 인간다움의 삶을 살 수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을 거절하는 동안에는, 저 메시아와 성령으로 새로이 이해된 토라 이야기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되십니까? 남은 자 여러분!


반응형

'바울의 편지들 > 로마서 연구 v.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11:33~36  (1) 2015.08.03
로마서 11:11~32  (4) 2015.07.31
로마서 10:1~21  (1) 2015.07.29
로마서 9:30~33  (0) 2015.07.29
로마서 9:6~29  (3) 2015.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