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7로 들어가는 도입,

  놀라는 이방인들과 시기하는 유대인들(9:30-33;10:18~21)

로마서 9:30~33


  그러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의를 따르지 않았던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으니, 이것은 신실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의의 (산정을 말해주는) 토라를 따라간 이스라엘은 토라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신실함이 아니라, 행위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은 잠시 멈추어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이제 바울은 '의'라는 단어로 돌아와 설명하고자 합니다. 지금 바울이 의식적으로 3장에 있었던 주제들을 다시금 꺼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셔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의의 산정을 기록하고 있는 토라'를 따르던 이스라엘은 의와 무관해졌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무등산 수박 스티커 얘기를 해야 합니다. 이 '의'라는 스티커, 하나님의 토라 이야기 안에 들어왔음을 알게 하는 이 표지가 바로 '의'입니다. 그런데 토라 이야기에 그토록 집착하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그 '의'의 표지를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토라 이야기와 상관없는 죄인(죄인의 실제 의미는 '토라의 유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으로 판명났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아닌 '(토라를 지키는) 행위(를 자랑)'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그동안 무엇을 추구했던 것일까요? 톰라이트는 말합니다. "특정한 목표를 향하야 걷기로 가장 굳게 결심한 사람은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반면에 반대 방향으로 정처없이 떠돌던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뤄집니다. 그래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즉 혈통과 도덕적 행위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언약 프로젝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 이야기로 들어감에 있어서, 어떠한 인간의 기준도 세워놓아선 안됩니다. 그것이 곧 왜곡된 권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이 토라를 그렇게 악용했듯) 다시금 말하지만, 신실함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도달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토라를 이룸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토라를 폐기하고,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토라 이야기를 이룰 사람들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한 길'이 놓여있을 뿐입니다. 바로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고 이루는 한 길뿐입니다. 원래부터 그러했고, 메시아 예수께서 걸으시고 이루셨던 길도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령이 이끄시는 길도 바로 이 길입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돌과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바위를 둘 것이니,

그에게 신실한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다시금 성경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28:16과 8:14인데, 둘 다 '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돌'은 무엇일까요? 어떤 학자는 '토라'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성전의 모퉁이돌 되시는 메시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벤'인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돌'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입니다. 톰라이트는 "살몸을 따라서는 그들로부터 온 분(9:5)"라고 결론 내립니다. 어찌되었든 의미는 분명합니다. 신실함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붙들었을 때(그것이 설령 하나님의 거룩한 글자 토라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은 실패하지 않으나(9:6), 그 말씀을 오해했을 때 자기 자신이 실패하게 됩니다.


  "살몸을 따라서 그들로부터 온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을 때, 유대인 전체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권력 앞에서 처참하고도 무기력하게 죽임당한 자는 메시아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에는, 자신들이 토라를 소유하고 있으며, 토라는 이스라엘'만'의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결국 이방제국들로부터 자신들의 약속의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토라 읽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부끄러워할 것은 비뚤어진 자기 자신이었고,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판도를 뒤집어놓은 하나님의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앞서, 이 판결을 통해 메시아의 대신 처벌 받으심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의롭다 산정 받은 사람들'이었고, 토라에 제대로 이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의 문제는 다시금 창조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숨고 가렸던 아담성이, 이스라엘에게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신데, 그 분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필시 아담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이것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인간다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 또한 희랍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주십니다. 좋은 소식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믿는 이의) 신실함에 이르게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의인은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산다"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지는 돌을 '시온'에 두신 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토라를 왜곡하는 이스라엘을 통해 비뚤어짐을 가장 최고치로 비뚤어지게 하고, 이것을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으로 단번에 해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의 십자가에 걸려 넘어진 이스라엘의 현상황이, '하나님의 타락을 해결하는 언약 프로젝트'(=말씀)을 이루시는 거대한 계획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다움을 이루는 새로운 맥락입니다.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 새로운 차원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새차원으로 부터 새 숨이 불어옵니다. 그 숨결을 따라 우리는 새로운 맥락 위에 섭니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점점 단련된 성품으로 인간다워지는 맥락. 그리고 그 맥락의 끝에 우리의 부활과, 우주의 새로움이 있습니다. 바울이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며 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맥락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말입니다.

반응형

'바울의 편지들 > 로마서 연구 v.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11:1~10  (2) 2015.07.31
로마서 10:1~21  (1) 2015.07.29
로마서 9:6~29  (3) 2015.07.28
로마서 9:1~5  (2) 2015.07.27
로마서 8:31~39  (0) 2015.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