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로마서의 두번째 파트, II 를 정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는 5장 서두로 돌아가서, 로마서 8:31~39의 결론이, 5:1~11에서부터 시작된 사유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8:31~39
그러니 이 일을 마주하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에 두시면 누가 우리를 아래 두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울은 지금까지 이야기들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이 일을 마주하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이 일'이란 로마서 5~8에 이르는 더 크게는 1:18부터 시작되었던 토라 이야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메시아 예수를 통해 새롭게 된 토라 이야기입니다. 곧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이것을 밝힌 후에, 이제 어떠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를 다시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네 개의 질문과 짤막한 대답이 이어집니다.
첫번째 질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짓밟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란 메세아의 신실함을 따르는, 하나님의 우주 가족, 성령으로 숨쉬어 날마다 온전해지는 사람들, 하나님 한 분 사랑함으로 토라를 이루는 기이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존재 근거는 바로 메시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위해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었습니다. 만일 그 아들을 '거저' 주셨다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이들에게 거저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란 숨님과, 우리들의 부활과, 새롭게 된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들을 고발하겠습니까?
그들을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두번째 질문은, 법정의 그림입니다. 그들이 옳다고 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판단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의롭다는 산정은 영광으로 귀결될 것입니다.(그의 말씀은 이뤄지므로)
누가 비뚤어졌다 하겠습니까?
메시아 예수께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으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비뚤어졌던 이들을, 의롭다 산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판단의 이유가 바로 메시아 예수이십니다. 그의 죽으심은 비뚤어짐에 대한 유죄판결이요, 그의 살아나심은 죽음을 이긴 생명의 증명이며, 그의 승천은 그가 '인자'라는 사실의 증명이요, 그의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어 놓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싼 압박이나, 죄여듬이나, 폭력이나,
배고픔이나, 욕보임이나, 위험으로 내몰림이나, 칼입니까?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한 낮 내내 우리가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가 희생당할 양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바울의 카메라는 하나님일 비추었다가, 메시아 예수를 비추었다가, 이제 고난의 한 가운데 있는 공동체의 상황을 비춥니다. 그 상황은 죽임당함의 상황, 희생당할 양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이 모든 일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를 통해 압도적으로 이깁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들이나 권력자들이나 현실 문제나, 앞으로의 문제나, 할 수 있음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우리 주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압도적으로 이깁니다. 이것은 무조건 이들은 승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실함의 표현입니다. 설령 죽더라도(세상은 이것을 패배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죽더라도 하나님과 자신들의 승리를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어제 요셉의 유언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압도적으로 이깁니다" 완전히 새로운 소망 속에서.
그리고 아마도 바울은 이 위대한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뚤어진 이들을 의롭다 선언하신 아빠 하나님, 그리고 그 선언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으신 아들 예수님, 그리고 그 비뚤어진 이들의 생각과 실천을 새롭게하시는 (글자로 써있지는 않지만 분명) 성령님. 바울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고난 속의 공동체 속에서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리켜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사랑. 그 무엇도 끊어놓을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이러한 구성은, 우리가 앞서 확인했었던, 이 두번째 파트의 입구였던 5:1~11과 동일합니다. 굵은 글씨로 표현한 키워드들을 보시가 바랍니다. 의롭다 산정하시는 하나님, 메시아 예수, 부어주신 숨님, 이를 통해 이뤄지는 사랑.
로마서 5:1~11
그러므로 우리가 신실함으로 의롭다는 선고를 받았으니, 우리 주 메시아 예수로 하나님을 향하여 평화를 누립니다. 또한 그 예수를 통해 우리는 신실함으로 거저주심 속에 들어감을 얻었고, 하나님의 드러나심을 소망하며 소리 높여 한 분을 자랑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고난 중에도 소리 높여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이 압제가 견딤을, 이 견딤은 단련된 성품을, 이 단련된 성품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을 낳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 '가온'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메시아께서, 우리가 연약하여 말씀대로 살 수 없었던 그 때에, 경건하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의로운 이를 위해서도 좀처럼 죽지 않으며, 선한 이를 위해서 용감히 죽으려는 이도 어쩌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비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와 단단히 묶어두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피로 의롭다 산정되었으니, 그이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더욱 더 구원받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서로 적이었던 하나님과 우리마저도 만일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는 사이가 되었다면, 이미 화해한 우리는, 이 아들의 다시사심 안에서 더욱 구원을 얻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소리 높여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이 예수로 인해 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있습니다. 창조주의 뜻 아래,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 성령의 숨쉬는 삶. 이 모든 것을 '거저주심'이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바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살몸을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럼 이 위대한 사랑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과연 어찌 되는 것일까요?
'바울의 편지들 > 로마서 연구 v.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9:6~29 (3) | 2015.07.28 |
---|---|
로마서 9:1~5 (2) | 2015.07.27 |
로마서 8:18~30 (1) | 2015.07.22 |
로마서 8:12~17 (0) | 2015.07.21 |
로마서 8:1~11 (4) | 2015.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