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II'의 결론부에 이르렀습니다. II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5:3~5
이뿐 아니라, 우리는 압제 중에도 소리 높여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이 압제가 견딤을, 이 견딤은 단련된 성품을, 이 단련된 성품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을 낳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 '가온'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5:1~5를 공부했을 때, 이 본문이 앞의 1~4장을 요약해주면서도, 앞에 진행될 내용을 내다본다고 얘기했습니다. 5장 이후, 지금까지 내용을 찬찬히 살펴왔다면, 저 위의 5:3~5 본문이 새롭게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로마서 8:18~30
우리가 따져보니, 지금 이 때의 고난은 우리에게 곧 정체를 드러낼 그 영광과 비교할 가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세계의 간절히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세계가 허무함에 굴복하는 것은 제 뜻이 그러한게 아니라, 오히려 굴복하게 하시는 이의 소망 때문인데, 그 소망은, 바로 창조 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아이들 나타날 때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결론은 따져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따져본다"는 말은 앞에서 '산정'이라 번역했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산정'하시듯, 여러분도 스스로에 대해서 면밀히 따져보라고 말했던 6:11의 연장선이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지금 이때'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곧 정체를 드러낸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할 가치도 없을 만큼 '고난<영광'입니다. 우리는 '영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뚜렷이 드러남'입니다. 즉 고난 끝에 무언가가 뚜렷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 나타남'입니다. 이것을 창조세계 전체가(곧 우주입니다. 그래서 어제 '하나님의 우주 가족'이라 했습니다.)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뚤어짐과 죽음에 종노릇하고 있는 창조세계의 문제가, 하나님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며, 그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바울이 3장에서, 유대인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것이라 확언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결말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뤄집니다. 타락이 뒤집힙니다.
지금 이 창조세계 전체가 '죽음'이라는 허무함에 굴복하는 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토라를 통해 살펴봤습니다. '올'이 모두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기뻐하는 이 대체 누구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세계 전체는 그 올을 이루지 못하고 비뚤어짐의 노예 생활을 끊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짓눌려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창조세계 전체가 비뚤어지자 죽음이 왕처럼 군림했습니다.
어제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죽요리가 나왔습니다. 출연들이 이 '죽'자를 가지고 언어유희를 즐겼습니다. 한 사람은 그 요리를 '죽을 맛'이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이는 맛'이라 했습니다. 전자는 그 요리를 깍아 내리는 말이었고, 후자는 그 요리를 칭찬하는 말이었습니다. 세상은 결국 죽을 것이고, 이 죽을 창조세계 속에서 죽이는 것이 승리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언어에 고스란히 베어있습니다. 토라가 드러낸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알면서도 그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비뚤어짐입니다. 생각도 실천도 비뚤어져서, 비뚤어짐과 사람을 분리하지 못한채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컨데 인종청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언약백성이라 자랑하던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한 인종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민족들에 대한 경멸을 일상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문제입니까? 창조세계 전체의 문제입니다.('였습니다'라고 썼다가 고쳤습니다.) 원하지 않으면서도 비뚤어져만 갑니다. 그 끝은 인격의 죽음, 살몸의 죽음, 창조세계의 무질서입니다. 이 현시대의 끝이 그러합니다. 과학자들이 잘 봤습니다.
그러나 그 허무함을 이기는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셔서, 비뚤어짐을 드러내시고 확대하신 이유는, 그 비뚤어짐 자체를 유죄판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메시아 안에서 비뚤어짐은 유죄판결을, 그리고 사람에게는 새롭게 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소망이 드러났고, 창조 세계 전체는 하나님과 같은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소망의 정체란 바로 창조 세계 전체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풀려나, 하나님 아이들 나타날 때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예수의 출애굽은 우주적 출애굽이었습니다. 우주 전체가 썩어짐의 종노릇, 즉 비뚤어짐과 죽음의 연대에서 풀려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이들이 '나타날 때(곧 영광입니다. "하나님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나실 때")', 마침내 우주 전체는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그 하나님 아이들이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사람들이요, 한 분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요,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는 그들이 온세상에 뚜렷이 드러나는 그 날은, 그 하나님의 아이들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논한다면, 사람들끼리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를 나누고, 누군가를 배제하고 단절할 것에 대한 대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비뚤어짐과 죽음으로부터 얻는 자유를 논해야 할 것입니다. 메시아와 합하여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살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것입니다. 허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억압당하는 자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모든 이들의 자유를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억압하는 자를 봐주자는 말로 들려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자유를 추구했던 혁명군 지도자가 가장 악랄한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자유를 이뤘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비뚤어짐이 기회를 틈타 그 자유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자유를 이뤘다고 착각한 자가 또다시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수'라 부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억압하는 사람이나, 억압당하는 사람 모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삶의 형태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적절한 처벌이 간과되기는 커녕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정말로 '적절한' 처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 다시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말들을 요약하면 '화해'가 될 것입니다. 즉 화해를 위한 자유여야, 참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의 자유는 창조 세계 전체를 구해내는 자유입니다. 메시아와 죽고 살아서 얻는 삶이란 화해를 위한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요, 그러한 삶의 결말이 부활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과정 속에서의 고난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아름다운 결말을 보증합니다. 성령은 그 결말을 알게 하고 살게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이 고난이 오히려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그 인내가 우리를 부활의 사람으로 다듬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인간성이 메시아성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창조세계 전체가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산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거룩한 숨결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 역시 함께 속으로 슬퍼하며, 아들됨 곧 우리 몸이 새롭게 될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소망으로 우리가 온전해졌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하겠습니까! 우리는 현재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기에, 끈기를 가지고 기쁘게 기다립니다.
이런 놀라운 소망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창조세계 전체가 비뚤어짐과 죽음으로 오늘날까지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문제를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룩한 숨결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라는 말은 아마도 A.D.1세기의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아들됨'은 곧 '몸이 새롭게 되는 것'이고, 이 소망으로 고난을 견디어 나간다면, 그것이 곧 온전함, 즉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을 공감능력에 관하여 읽으면 어찌 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숨결을 받은 이들은, 이 창조세계 전체가 아파하는 것이 우연도 아니고, 당연한 것도 아니기에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모든 것이 우연의 일이고, 좋고 나쁨은 그저 사람이 정하는 일이라 말합니다. 누군가는 이 지구의 아픔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그저 달관하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공감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창조세계가 겪는 아픔이란 옛 사람이 비뚤어짐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사람을 점령하고 있는 죄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죄의 문제에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숨결의 첫 열매를 받은 사람들은 절망한채 떨리는 무릎으로 슬퍼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창조세계의 고통이 바로 산통이기 때문입니다. 청춘이라 아픈 것이 아니라, 산모라서 아픈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산통이 아니라 그저 고통이라 읽는다면, 이 본문은 절망의 본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의미가, 세상에는 고통 밖에 없음을 안다는 식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통은 산통입니다.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생명 낳는 과정 중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했던 고난은 바로 영광을 낳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 생명이란 사람에게는 부활이요, 창조세계 전체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곧 새롭게 된 사람과 새롭게 된 우주가, 예수의 출애굽의 결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이 이야기는 될 지언정,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살몸'은 비뚤어짐의 종노릇 할 것이 아니라, 산고를 겪는 창조세계 위에서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야 할 고난과 영광의 교차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신호를 받아 화면으로 보이게끔 송출하는 프로젝터입니다. 인간과 우주의 새로움을 끈기를 가지고 기쁘게 기다리며, 모두의 화해를 위해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참말로 자유의 사람들입니다.
전체 그림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비뚤어짐과 우주의 왕이 되어버린 죽음. 이 문제 앞에 유대인들도 빠져버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 때, '이미(미리)' 하나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방법을 준비하셨고, 그 준비에 따라 메시아 예수는 비뚤어진 사람들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비뚤어짐을 처리하셨고, 메시아 예수는 다시 살아서 하늘에 오르셨으며, 그 하늘에서 '오늘' 우리에게 거룩한 숨결을 부어주십니다. 그 숨결 속에서 왜곡된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올바른 실천력으로 나아가며, 세상 모든 '둘'의 문제를 가로지르는 기이한 사람들이 탄생합니다. 이들을 통해 창조세계는 소망을 확인하고, 마침내 이 소망이 이뤄지는 날에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 날에 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는 인정이 선언될 것입니다. 의의 산정이 완성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소망의 정체입니다.
이와같이 숨님도 곁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즉 우리가 어떤 필요에 따라, 무엇을 기도해야할런지 알지 못해도, 숨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통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숨님의 생각하는 바를 아시는데, 이는 숨님이 하나님 (뜻)을 따라 씻어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와같이' 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제 숨님과 공동체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의 소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이"라는 말은, "이 소망과 같은 소망으로" 라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소망으로, 이제 공동체가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찍이 떨어져 이것을 지켜보시고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숨님으로 우리 곁에서 함께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인간과 우주의 새로움이 마침내 드러낼 영광'을 소망하며, 이겨나갈 수 있도록('이스라엘'의 뜻은 '이긴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에덴의 선악과 앞에서도, 바벨의 꼭대기에서도 말입니다. 우리가 그 분으로 숨 쉬기를 거절했을 뿐입니다.
본문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은 비뚤어짐과 죽음에 종노릇하는 창조세계를 바라보는 숨 쉬는 이들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이 반응은 그저 피상적으로 만들어진 반응이 아닙니다. 인간성 깊은 곳에서 비뚤어짐이 죽은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기도하시기에 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숨님이 기도하시는 바는,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탄식과 소망입니다.
이 탄식과 소망을 하나님도 아십니다. 따라서 숨님을 모시는 사람은, 내면 깊은 곳에서는 숨님이, 그리고 우주 전체로는 하나님이 연결되어, 그 사이에 놓인 사람입니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 창조세계 - 우리 - 성령
우리의 내면에 계신 성령과 하나님이 같은 소망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이 소망을 함께 마음에 품게 되었으니 변화(곧 새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살몸과 창조세계만이 신음하며 남아 있습니다.
본문에 '마음을 살피히는 분'이라는 말은, 로마서 2:16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은밀한 것의 심판이, 우리가 보고 있는 로마서 8장에서는 전혀 다른 늬앙스로 뒤집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잘못을 가려 심판하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어 도우십니다. 이 충격적인 전환이 어디에서 벌어졌습니까?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비뚤어짐의 노예들은, 이제 양아들, 양딸이 되었습니다. 우리와 대적관계였던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씻어난 이들"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주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숨님의 관계 속에 놓여있어, 마침내 새롭게 될 창조세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의 우주 가족입니다. 4장의 표현대로라면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으로 출애굽한 사람들입니다. 3장의 표현대로라면 기이한 사람들입니다. 토라 없이도 토라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바로 숨님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들이었습니다. 이 이끄심이, 할 수 없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함께 일하십니다, '좋음'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앞서 정하신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던 이들을, 그의 아들의 형상 본받을 사람들로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은, '그이'가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마침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모든 것을 함께 일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바울이 3:30에서 언급했던 '쉐마'를 다시금 발견합니다. 즉 하나님 한 분 사랑하는 것. 이것이 토라의 결론이자, 신실함이란 바로 이러한 마음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쉐마의 사람들의 "일"이란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바로 소망을 이루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소망 안에서, 사랑으로 연결되어 함께 그 소망 이루기 위해 일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일도, 이 소망 안에서 생각하고 실천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나 하나 어떻게 될까'에 대한 고민은 너무 작디 작아 이 소망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소망 안에서 하는 일들은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창조의 바로 그 좋음으로.
바울은 그 좋음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창조 이야기'에 등장하는 키워드들을 꺼내놓습니다. '좋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그 좋음이고,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할 때의 그 형상입니다. 즉 앞에서 말했던 내용들이, 창조를 새로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타락의 처참함은 사실 하나님의 새창조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의 핵심은 메시아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는 이스라엘'로서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도록, 맏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제 봤던 출애굽기 본문과도 공명하는 부분입니다. 그 메시아를 통해서, 메시아의 사람들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마침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지금까지 했던 모든 내용들을 요약합니다. 앞에서 "메시아와 공동 상속자는 상속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과정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신실함을 새롭게 창조하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산정하셔서 새 길을 걷게 하시고, 의롭다 산정하신 이들의 의로움이 그들의 부활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새로워지는 그 날에 창조세계는 고대하던 새로운 세계의 출산을 마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미리'라는 말이, 유대인들이 하던 모든 오해를 불식시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폭력적 승리를 바라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미리' 계획해두신 길은, 모든 사람이 새로워지는 새로운 세계(세계라는 말도 아깝습니다. 우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미리'는 모든 것이 정해져있다는 숙명론도 아니고, 모든 것이 뜻없다는 허무주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 안에서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같은 소망 안에서 열심히 일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마침내 완성된 창조의 좋음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그치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생각을 가지고서, 창세기의 한 구절을 읽어봅시다.
창세기 50:24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들을 돌보시고,
여러분들을 이 땅에서 인도해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어떻게 읽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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