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1은 7장부터 시작된 토라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본문입니다. 


마서 8:1~11


  의심의 여지 없이, 이제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유죄판결이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삶 속에서 성령으로 이뤄지는 토라가 당신을 비뚤어짐과 죽음의 토라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메시아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벌어진 출애굽이 무엇인지를 마침내 밝힙니다. 유죄판결이 없다는 얘기는 이미 4장에서 밝혔던 내용입니다. '의의 산정'은 최후의 심판에서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온에 새로이 창조해주신 신실함을 근거로 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이 가능했던 것은, 비뚤어짐의 노예로 아담성과 하나되었던 사람들 대신에, 메시아 예수께서 처벌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유죄판결이 결코 없습니다." 아담성으로부터 메시아 죽음에 합하여 죽고 살았으며(따라서 세례의 순간은, '미래'에 찾아올 최후의 심판이 '현재'가 된 것입니다.), 이는 홍해도하와 같아서 이제는 아담성과 끊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다스림 안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미래를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는 시대는 현시대에 '이렇게'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죽음과 합하여 들어온 '오는 시대'는 성령으로 다시 일어나 사는 부활의 삶이요, 토라를 모르더라도 토라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거듭남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토라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먼저 토라는 이스라엘과 아담성의 관계를 드러냈습니다. 뗄레야 뗼수없이 늘러붙어 있는 아담성과 이스라엘의 혼인관계. 그래서 여인도 비뚤어짐을 따라 비인간화의 길을 걷고 있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토라가 기소했던 내용 그대로 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살몸이 굳건치 않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죄에 속한 살몸 모양으로, 속죄제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살몸 안에서 비뚤어짐이 비뚤어졌다고 판결 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살몸 따라 행하지 않고 숨결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토라의 정당한 판결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토라의 두번째 기능은 "죄를 더욱 죄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뚤어짐을 토라를 통해 더욱 증폭시켜, 한 사람의 살몸에 정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는 죄를 (핑계를 댈수 없는) 더한 죄에 빠뜨리기 위함입니다." 즉 토라는 비뚤어짐의 전모를 드러내기 위한 유인책이었고, 비뚤어짐이 기회를 타서 토라를 이용하기로 작정했을 때, 비뚤어짐은 비뚤어지지 않은 한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토라는 일종의 '부비트랩'의 역할을 했고, 토라의 유인을 따라 걸려들었던 비뚤어짐은, 사람에게 기생하고 있던 그 실체가 드러났고, 이제 메시아 예수의 죽으심과 함께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비뚤어짐'을 끝장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이 방법이 아니라면, 자칫하다간 (사람들이 자구 그러듯) 비뚤어짐을 처리하려다가 사람도 같이 처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토라를 주시고, 그 토라를 통해서 진행하신 하나님의 방법 안에서, 하나인줄로만 알았던 죄와 사람이 토라의 메스로 예리하게 분리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사람은 건져내되 비뚤어짐은 끝장내는 섬세하지만 충격적인 방법으로 사탄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비뚤어짐이 비뚤어졌다고 판결내리신 것입니다." 즉 비뚤어지지 않은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는 비뚤어짐이, 정말 비뚤어졌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살몸 모양으로 매달린 하나님 아들이,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는 여자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이 십자가 사건이 속죄제사였다는 사실도 언급합니다. 속죄 제사는 고의로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 용서를 선언합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의 '나'에 대한 곤경이 여기서 해결되는데, 곧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은 원함과 행함이 달랐던 모든 비뚤어짐에 대한 용서인 것입니다. '시험에 빠진 곤고한 나'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구출되고 용서받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자가 병고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인류를 점령하고 있는 병이란 다름 아닌 인간성에 눌러붙은 비뚤어짐이었고, 하나님은 이 비뚤어짐을 메시아 예수의 속죄제사를 통해 고치신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고침받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의 사건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비뚤어짐은 죽었으니, 메시아 예수의 죽으심과 합한 사람들 안에는 더이상 죄가 머무르지 않습니다.(7:20의 역전입니다) 그리고 비뚤어짐이 죽어버린 그 자리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오십니다. 정의로운 집주인, 곧 나의 새남편의 숨결.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것이 예수 출애굽의 정체입니다. 바로 비뚤어짐으로부터의 출애굽입니다. 


  따라서 메시아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비뚤어짐의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를 얻어,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은, 비뚤어진 인간성이 아니라, 하나님 숨결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이 숨결이 곧 구름 기둥입니다. 비뚤어짐에 대해 유죄판결을 냈던(3장) 토라는, 이 새로운 인류에게 더이상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뚤어지지 않고 '곧'기 때문입니다.


  살몸을 따르는 자들은 살몸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 숨을 따르는 자들은 그 숨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살몸의 생각은 죽음이요, 하나님 숨 생각은 삶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살몸의 생각은 하나님과 맞서게 되니, 하나님의 법 아래 조화로이 있으려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몸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토라를 지키는 행위에 따라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다시 둘로 나뉩니다. 이것은 로마서 5장의 두 차원과 일치할 것입니다. 한 쪽은 '살몸'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살몸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 생각이란 죽음이요, 하나님과 맞섬이요, 하나님의 법에 대한 흘려들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할수도, 그 분의 기쁨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으로 읽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살몸은 다시 말하지만, 비뚤어진 인간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새로운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규명됩니다.


  여기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이 군데 군데 언급한 기이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살몸이 아니라 숨의 사람들이요, 이들은 삶과 평화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맞서지 않으며(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법인 토라를 이루는 사람들이고, 한 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광야는 이렇게 걷는 것입니다. 앞에서 범죄를 '빗나간 걸음'이라 번역했는데, 이 성령의 사람들의 걸음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타락을 뒤집는 새로운 아담들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하나될 기름(성령)을 준비한 처녀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숨이 여러분 안에 거주하시면 여러분은 살몸 안에 있지 않고  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메시아의 숨결을 갖지 않으면, 그이의 사람이 아닙니다. 또 만일 메시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살몸은 비뚤어짐으로 인해 죽은 살몸이요, 인격은 의의 판결로 인해 산 인격입니다. 또 만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숨이 여러분 안에 거주하시면, 메시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의 죽는 몸 마저도 소생시키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거주 하시는 그의 숨결로 말미암아.


  바울은 마침내 정체가 드러난 이 성령의 사람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묘사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메시지를 死生亡得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시아와 함께 죽은(死) 이들은, 성령을 받아 살아납니다(生). 메시아와 하나됨이란 살아서 겪는 아담성의 죽음이요, 이제 아담성은 죽고, 성령으로 메시아성이 내 안에서 일어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살아서 죽었으니, 죽어서도 살 것이요. 살몸을 잃는 것을 통해(亡), 새로운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得). 


  바울은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삶 속에서 성령으로 이뤄지는 토라"라는 언급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이 오는 시대의 삶이요, 예수의 신실함으로 사는 이들의 삶입니다. 현시대를 뚫고 들어온 오는 시대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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