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21~25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토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온전을 이루길 바라는 그 순간에도, 나에게 악이 함께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내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지만, 내 손과 발을 지배하는 이 또 다른 법도 봅니다. 그 법은 내 맘의 법과 대치하여 싸우며, 나를 내 몸이 바라는 비뚤어짐의 법 아래에 포로로 잡아옵니다.


  여기서 '나'는 줄곧 이스라엘입니다. 바울은 토라와 이스라엘을 숙고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토라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토라가 죄를 죄 되게 하는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것을 통해 언약백성 속에도 죄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을 붙잡아 종노릇하게 만드는 진정한 파라오입니다. 제국이 악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는 눈 앞이 아니라 내 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토라는 이것을 발견하게 해주었으나, 안타까운 상황은 역전될 수 없습니다. 이 종노릇에서 벗어나는 능력은 나에게도 없고, 토라에게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토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토라를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 닮은 토라에 기쁘게 반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라는 내가 아담성과의 연대에 긴밀하게 묶여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3절은 창세기의 '가인'을 떠올리는 구절입니다. 비뚤어짐의 곁에 있었던 가인은 결국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에게, "비뚤어짐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라를 기뻐하지만, 그 토라를 어길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은 비참한 가인을 닮았습니다. 


  나는 무거운 시험에 빠진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반면,  살몸으로는 비뚤어짐의 법을 섬깁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거운 시험입니다. 바울이 '죽음의 몸'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면서도 그 법을 줄곧 어길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선을 기뻐하면서도 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비뚤어짐의 노예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섬기던 이스라엘, 동생을 죽였던 가인, 그리고 이 벗어난 걸음의 시작이었던 아담.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든 인류. 같은 시험에 빠져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러니~감사합니다!"를 이 본문의 주제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바울의 버릇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는 분명히 해결되었기에 참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니 괄호로 처리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살몸은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곤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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