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7장에 들어오면서 전남편(아담성), 여인(이스라엘), 새남편(메시아)의 관계를 통해 '토라'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메시아와 아담성은 모두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고, 이것으로 여인은 아담성과의 연대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새남편과의 새로운 연대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인격을 출산하는 일이었고, 이 모든 과정을 세례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의문은 남았습니다. 전남편이 죽었다는 확실한 사실 속에서 '토라'가 무엇인지는 더 아리송해졌습니다. 아담성과 이스라엘을 묶어두고 있었던 것이 토라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7:7~12


  그러면 우리가 율법이 비뚤어졌다 말하겠습니까? 일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뚤어짐이 기회를 붙잡아 계명을 타고서 내 속에 온갖 탐심을 만들어냈습니다. 


  먼저 간과하기 쉬운 미묘한 차이들부터 분류해 나가야겠습니다. '나'와 '우리'를 달리 생각하는 것 부터가 이 본문을 이해하는 시작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세례를 받고 기이한 사람들이 된 예수 공동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일반적인 나'가 아닌 토라를 통해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로 읽어야 합니다. 이미 앞에서 바울은 모세 율법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말한다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바울이 '나'라고 지칭할 때, 이 표현은 여러 의미의 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나'는 자신의 옛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옛모습은 지금 유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말하며 '나'라고 자신을 가리킬 때는, 비뚤어진 유대인에게 '나도 당신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과 이스라엘 사이에 금을 긋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들을 깊이 처지를 깊이 이해하며,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이 동일시가 단순히 수사적인 방법이 아니라, 바울의 절절한 마음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9:3) 저는 이것이 (바울이 앞에서 말한) 판단하는 죄를 넘어 진실을 전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 문장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그러면 '우리' 즉 '메시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토라 자체가 비뚤어짐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바울이 결론을 내기를, "토라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토라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간 토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일관해왔던 기존의 해석에 경종을 울립니다. 토라는 거룩합니다. 따라서 폐기하고 버릴 것이 아니라, 토라는 기이하게 성취되어야할 무언가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우리'가 토라를 굳건히 세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토라는, '내(이스라엘)'가 하나님과 얼마나 닮지 않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토라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에도 하나님을 닮아갈 수 없는 망가진 인간성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아담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토라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하자면,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토라를 지키려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토라를 "가온으로부터" 지킬 수 없는 타락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 속에 신실함이 없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토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이 하나님과 하나됨에서 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 안에서 토라를 이룰 수 있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이러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할례도 받지 않았고, 토라를 모르던 아브라함은 하나님 한 분께 신실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롭다 산정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했을 때, 탐내고 있는, 그리고 이 탐냄을 끊어낼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 분 하나님 사랑하며, 그 분께서 병든 자기 속을 고쳐주시기를 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앞에서 인용한,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기를 마다 않는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아갔습니다. 토라의 글자를 더욱 더 붙잡았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토라를 지킬 수 없으나, 어찌되었든 이 글자의 내용대로 행동하고, 그 행동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 자기 속에 있는 수치가 감추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자의 내용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토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죄인이라고, 이방인이라고 멸시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속은 점점 병들어 갔습니다. 이 모든 것이 토라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입니다.


  토라는 선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주소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인데, 아담성은 오히려 이 토라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의 본거지를 삼았습니다. 아담성은 토라 안에서 더 세력을 확대하고, 아담 한 명에서 시작된 비뚤어짐이 '토라를 매개로' 민족 전체를 집어 삼켜 버렸습니다. "비뚤어짐이 기회를 붙잡아 계명을 타고서, 내 속에 온갖 탐심을 만들어냈습니다."가 바로 그러한 구절입니다. 토라의 선한 글자들이 주어질 때마다, 그 글자가 말하는 것마다 그와 정반대의 의도가 제 속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계명이 주어질 때마다, 아담성은 그 계명과 정반대의 악한 마음을 자기 속에서 만들어냅니다. "비뚤어짐이...내 속에 온갖 탐심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는데, 비뚤어짐은 오히려 토라로 집을 짓고, 자기 자신의 몸을 더욱 불려갑니다. 토라를 이용하여 남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고서,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방패막이로 사용합니다. 공격과 방어의 무기. 토라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나, 바벨탑이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던 돌처럼 토라를 사용했습니다. 그럼 토라가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토라를 이룰 수 없는 인간성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토라를 받은 이스라엘에게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율법을 먹지 않으면, 비뚤어짐은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전에 율법에 떠나 있을 때에는 내가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내 속에 들어오니 비뚤어짐이 다시 생기를 얻고, 나는 죽어버렸습니다. 즉 나를 참된 삶으로 이끄는 그 계명이 오히려 나를 죽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뚤어짐이 기회를 붙잡아 계명을 타고서 나를 완전히 속이고, 계명으로 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좋으신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율법을 먹지 않으면, 비뚤어짐은 죽은 상태가 됩니다" 이 문장을 5:13,14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토라가 있기 전에도 비뚤어짐이 세상에 있었으나, 토라가 없을 때에는 비뚤어짐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인) 죽음은 (그 영향력을 발휘하여)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같은 '벗어난 걸음'을 걷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비뚤어짐의 정체를 오히려 잘 몰랐다면, 비뚤어짐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토라를 이토록 '분열에' 이용해먹는 이스라엘의 끔찍한 상황보다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셨고, 언약백성은 비뚤어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심지어 토라라도!)을 자랑삼아 비뚤어진 아담성과의 결혼상태를 유지해갑니다. 토라를 붙들었더니, 오히려 아담성은 그 토라를 먹고 더욱 난폭하게 그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이 상황은 시내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대표로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토라를 수여받을 때, 이미 아담성은 그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산 아래서 금 송아지에게 절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토라가 주어진 순간, 비뚤어짐이 살아나고 언약백성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본문에서 시내산 사건과 에덴의 사건을 연결시킵니다.(위의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토라'와 '계명'을 따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계명'이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그 계명을 통해서 아담은 자신의 비뚤어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때가 선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뚤어짐은 계명을 타고서, 인간성을 완전히 타락하는 길로 사람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덴과 시내산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뚤어짐이 기회를 붙잡아 계명을 타고서 나를 완전히 속이고, 계명으로 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드러내는 것은, 아담과 이스라엘이 같은 인간성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토라'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 토라는 이스라엘 안에서 아담성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할례를 받더라도, 토라를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언약 백성이라 주장하는 민족 전체를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비뚤어짐은 강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담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고, 하나님 주신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살 방도를 찾아나섰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앞에서 말했던 피조물 숭배의 길, 비인간화의 길입니다. 아담도, 이스라엘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토라가 이것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이 문장이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계명이 내 속에 들어오니 비뚤어짐이 다시 생기를 얻고, 나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토라가 나쁜 것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좋으신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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