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했던 내용을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토라를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는 것만으로 언약백성의 지위가 여전할 것이라 크게 오해하고 있었고, 바울은 이에 대해서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있으며, 그들이 조상이라고 존경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메시아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이었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유대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산정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울은 5장으로 가서 아담과 메시아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아브라함 약속의 정체는 메시아와 같은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새로이 읽으니,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어떠함'에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였고(바울은 이미 1장에서 이 문제를 밝힌 바 있습니다.), 메시아는 바로 새로운 인간성을 이루셨음이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비뚤어짐과 죽음의 인간성, 그리고 메시아의 인간성으로 갈라졌고, 이것은 토라 이야기 전체를 새롭게 읽도록, 특히 출애굽 이야기가 한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부패한 인간성 전체로부터의 해방임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부패한 인간성으로부터 출애굽한 사람들은, 6장에 가서 홍해를 건너 새로운 인간성(곧 메시아)으로의 전환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이것을 나타내는 예수 공동체의 예식으로서 '세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순서를 따라서 바울은 이제 시내산에 당도합니다. 여기서 그토록 쟁여놨던 질문, '토라'의 정체에 대해서 밝힐 것입니다.


로마서 7:1~6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내가 모세 율법 아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세 율법이 사람의 사는 시간만큼만 다스리는 줄 모릅니까? 즉 남편 아래 있는 여인이 살아서는 그 남편에게 법으로 묶여 있으나, 그 남편이 죽으면 언제든지 남편의 법으로부터 벗어나 그 법이 쓸모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살아있을 때 다른 남자와 관계하면 그녀는 간통녀라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그녀는 다른 남자와 관계하더라도 간통녀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토라 아는 사람에게 이 말을 한다며, 청중을 미리 설정합니다. 그리고 결혼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설명을 시작합니다. 비유가 늘 그렇듯 비유에 등장하는 것이 어디에 대응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의미가 비로소 들어옵니다. 바울은 토라가 사람이 사는 시간만큼만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즉 죽으면 토라는 더이상 다스릴 권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남편이 죽으면 더이상 결혼에 대한 법적인 효력이 없듯 말입니다.

  문제는 '누가 죽었느냐?' 입니다. 남편이 죽었다는데, 이 비유에서 남편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토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토라가 죽었기 때문에, 더이상 토라는 필요없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6장의 내용을 뒤돌아봐야 합니다.


비뚤어지는데 있어서 죽어버린 우리가 어찌 지금도 그 안에서 살고자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우리는 메시아 예수에게로 잠기다 못해, 그의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깊게 잠겼던 우리 아닙니까? 그 결과 그의 죽으심에 이르는 세례를 통해 그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죽은 것은 토라가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죽어버린 우리라 함은 곧 '아담성'입니다.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누구입니까? 여인은 아담성과 하나되어 비뚤어짐의 노예로 살던 '나'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남편'도 나요, '여인'도 나입니다. 그리고 이 남편과 여인을 묶어준 것이 바로 토라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날마다 통제할 수 없이 그릇된 사고방식과 피조물 숭배로 얼룩진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와 어떤 여인이 결혼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지금이야 이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충격적인 범죄가 벌어지지 않고서야 이혼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여자 쪽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담성과 우리의 관계가 이러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혼'이라는 '법'을 폐기하면 이혼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바울이 토라를 폐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토라 이야기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는 결혼 이야기이기 때문이요, 이 결혼이야 말로 타락을 뒤집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남편이 죽었다면? 아담성이 죽어버렸습니다. 여인을 그토록 괴롭히던 망나니 남편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인은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결혼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오늘날 시대상과 이 비유가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의미입니다. 아담성이 죽고, 새로운 남편 즉 메시아아와 하나되는 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새로운 인간성으로의 변화입니다. 


  신비로운 것은 토라가 아담성과 유대인들 사이의 결혼관계를 지켜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해 파탄난 결혼관계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담성은 여인을 말 그대로 타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은 '토라(결혼)'이라는 법이 선하지만, 아담성은 이 토라 안에서 사람을 파멸시킬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로마서 3:20의 "토라로는 자신의 비뚤어짐을 깨달을 뿐입니다." 라는 말이 의미가 이것입니다. 아담성과 하나된 자아는, 그 어떠한 좋은 것이 주어져도 자신을 파멸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도 율법 앞에서 메시아의 몸을 통해서 죽임당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바로 그 분과 관계 하기 위해 나아갑니다. (모세 율법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몸 안에 있을 때에는, 율법을 통해 (드러나는) 견디기 힘든 비뚤어짐이 우리의 몸의 구석 구석에서 힘을 발휘하여, 우리가 죽음 앞에서 열매 맺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붙들어 놓았던 것 속에서 죽어버렸으니, 그 율법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격의 새로움 속에서 섬길 것이요, 글과 문법의 낡음 속에서 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서 아담성이 죽어버린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메시아의 죽으심은 곧 옛 남편의 죽음입니다. 자아는 해방되었고, 이제 새로운 남편 메시아와 하나되기 위해 나아갑니다. 망나니 남편이 아닌, 온전하고 아름다운 남편,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남편"입니다.

  그리고 이 남편과의 관계 안에서 새생명을 낳습니다. 본문에는 '열매'라 되어 있지만, 이는 곧 출산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와 하나되어 우리가 낳는 새생명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새로운 인격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흔히 윤리적 실천의 덕목이라 여겨지지만, 이 열매란 메시아와 하나되어 생겨난 새로운 인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타난 '새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몸', 즉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비뚤어진 인간성'으로 살아갈 때에는, 율법대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비뚤어짐만이 더욱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열매맺는 것과 달리, 바울은 '죽음 앞에서 열매 맺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모세의 출생과 예수의 출생을 가리킨다 생각합니다. 메시아와 하나된 인격은 새로운 인격, 생명으로 넘치는 인격을 낳습니다. 이 죽여도 죽일 수 없는 인격입니다. 그러나 아담성은 죽음이 뻔한 출산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임당했던 신생아들과 같이, 아담성이 낳은 인격은 죽음이라는 왕 앞에서 무력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메시아의 죽으심과 함께 아담성이 죽어버렸습니다. 우리를 저당잡고 있던 그 폭군같은 '나'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담성과의 결혼관계("그 율법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결론을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격의 새로움 속에서 섬길 것이요, 글과 문법의 낡음 속에서 하지 않습니다." 아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결혼 관계를, 글자를 지키는 것 수준으로 전락시켜 놓았습니다. 인격의 새로움과는 전혀 무관한. 그러나 새로워진 인격은 글과 문법의 낡음을 뛰어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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