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2~14


  그러므로 여러분은 비뚤어짐이 여러분의 죽을 몸을 다스리지 못하게 해서, 몸의 욕구 아래서 조아리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여러분의 손과 발을 비뚤어짐 옆에 있게 마세요. 의롭지 않은 일의 무기가 되고 맙니다. 오직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 곁에 있게 하세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산 자들인 것처럼, 여러분의 손과 발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 곁에 있게 하세요. 비뚤어짐이 여러분의 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토라 아래 있지 않고 거저주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세례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 차원이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공간을 사는 것 같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른 타임라인을 살고 있습니다. 한쪽은 죽음으로 곤두박질치는 현시대요, 다른 한 쪽은 신실함으로 새롭게 되는 오는 시대를.

  따라서 비뚤어짐은 더 이상 우리 몸에 대해 권한이 없습니다. 비뚤어짐은 죽을 몸을 다스려서 우리의 인격을 몸의 요구 아래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몸을 오히려 굴복시켜서 올을 곧게 할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이런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짐승만도 못한 사람" 이란 말을 쓰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몸'은 개개인의 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몸도 뜻합니다. '여러분의 몸'. 이는 곧 예수 공동체는 비뚤어짐의 연대와 끊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연대하는 몸은, 거저주심 안에서, 의의 무기로,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을 비뚤어짐에 내어주든지, 아니면 죽고 살아서 하나님께 내어드리든지의 문제입니다. 현시대와 오는 시대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주님이신가? 우리의 몸을 누구에게 드릴 것인가? 바울은 말합니다. "비뚤어짐이 여러분의 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로 심대하게 타격을 입은 악은, 세례받아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 들어온 이에게 권한도 힘도 없습니다. 만일 그럼에도 우리가 비뚤어짐에 팔려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자신이 지금 어디있는지 다시 산정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늘 마지막 구절에서 두 가지를 대비시킵니다. "여러분이 토라 아래 있지 않고, 거저주심 안에 있다." '토라 아래 있다'는 말은 앞에서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저주심 안에 있는 우리는 토라 아래 있지 않습니다. 토라 위에 있습니다. 토라를 이루신 메시아 예수가 우리의 토대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거저주심에 대비되는 말이 비뚤어짐이 아니라 토라인지는, 우리는 7장에 가서야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단서를 던져주고 고민하게 한 뒤, 뒤에가서 전체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바울의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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