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5~23
비뚤어짐의 잘잘못을 가리는 토라 아래 있지 않고 거저주심 아래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어찌 막 비뚤어질 수 있겠습니까? 일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곁에 서서 섬기고자 하는 이의 말을 잘 듣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여러분이 곁에 서서 잘 듣고자 하는 자를 섬기게 된다 말입니다. 비뚤어짐을 섬기다가 죽음에 이르거나, 잘 듣는이로서 섬기다가 '의의 판결'에 이르게 됩니다. 참으로 거저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 곁에 여러분들이 섬기는 이로서 있게 될 것입니다. 비뚤어짐을 섬기던 여러분들이 전달받은 가르침의 기초 위에서 가온으로부터 잘 들고자 했으니 말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비뚤어짐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의(義)로 섬기는 이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은혜가 이길 것이고, 나는 마음으로는 은혜 편이니 나는 정말 괜찮은겁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일 없습니다. 바울이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괜찮다는 모든 류의 생각들은, 메시아 예수를 빠뜨린 그릇된 생각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지혜가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반증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밝혔듯이, 이 몸으로 누구를 섬기느냐가 관건이요, 그래서 '신실함(忠)'입니다.
누가 당신의 왕입니까? 비뚤어짐입니까? 당신은 아직 파라오의 발 아래서 종살이 중이며, 범죄와 왕국과 연대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 분께 몸을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 곁에 무엇을 두느냐가,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추억을 회상합니다. 로마의 예수 공동체들에게 가르침의 기초를 전달했을 때의 일입니다. 아마도 이 기초는 "예수가 주이시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10:9)"의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 날에 비뚤어짐의 노예였던 이들이, 마치 모세의 말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치 하나님의 언약을 듣는 아브라함처럼, 가온으로부터 잘 듣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 날, 이들이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곧 새로운 신분과 통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날에 우주적 출애굽이 벌어졌습니다. 아담성의 연대를 끊고 메시아 예수 안으로(거저주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의의 산정 속에서, 광야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1
(여러분이 몸의 욕구에 무력하니, 내가 사람을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과 발을 음란과 토라없음 곁에서 섬기는 이로 두어 토라없음(τὴν ἀνομίαν)에 이르렀던 것과 같이, 이제는 여러분의 손과 발을 '의'의 곁에서 섬기는 이로 두어 하나님닮음(ἁγιασμός)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몸의 욕구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살몸'의 욕구라 하지 않고, '몸의 욕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몸은 토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이지만, 이것을 어찌 사용하느냐가 인간성을 드러냅니다. 아담성은 몸의 욕구에 무력합니다.(에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메시아는 몸의 욕구를 이기고, 오히려 그 몸으로 뜻을 이룹니다.
아니면 여기서 '몸의 욕구에 무력하다'는 말은, 이들이 몸으로 죄를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예를 들어 말하는 것은, 쉽게 표현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예수 공동체들의 과거를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했던 로마서의 내용은, 이들의 현실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이들이 '곁에' 음란과 무질서를 두었고, 이들은 몸으로 하나님 아닌것을 섬겼습니다. 비뚤어짐의 노예가 되어 비인간화의 현시대를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곁에 '의'를 두어, 비인간화가 아닌 하나님닮음에 이르는 위대한 여정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의'는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으로, 내 속에 생긴 참 인간다움 곧 신실함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길에 들어섰고,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 세례를 받아, 퇴로를 끊고 같은 길을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2이것은 이들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이 비뚤어짐의 노예였을 때에는, 의로 얻는 새로운 삶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러워하는 그 일들로 (도대체)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그 끝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이 비뚤어짐으로부터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곁에선 노예가 되어, 여러분의 열매를 얻고, 하나님닮음에 이릅니다. 그 목적은 오는 시대의 삶입니다. 비뚤어짐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은 죽음이요,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것은 오는 시대의 삶입니다, 메시아 예수 안에서, 우리 주님이신.
바울은 노예 상태에 대해서 더 상술합니다. 비뚤어짐의 노예는 열심히 일하지만, 그 일은 부끄러운 일이요, 맺는 열매라고는 비인간화의 삶이요, 그 끝은 죽음입니다. 마치 아담의 무화과나무 옷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해서, 자신을 가릴 것을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이 부끄러움은 비뚤어짐에서 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비인간화의 삶은 모두 죽음의 비참함으로 끝장났습니다. 비뚤어지면 죽게 된다는 하나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그리고 앞 절과 같이 이 단락도 '이제는'을 기점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이제는 비뚤어짐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이제는 곁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요, 이러한 삶은 오는 시대의 삶을 누립니다.(어쩌면 신처럼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하와는, 삶의 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목적을 이루고 싶었던 성급함 때문에 그리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인간성의 이룸에는 광야의 여정이 꼭 필요합니다.)
바울은 짧은 단어들로, 그간 전했던 내용들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거저(은혜로) 주시는 오는 시대의 삶. 이 삶이 현시대를 뚫고 우리의 삶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 때문이고, 이제는 우리도 같은 신실함으로 광야를 걷습니다. 아담성은 이렇게 극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갱신된 사람에게 붙이는 새로운 무등산 수박 스티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할례'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나'는 아담성과 함께 죽고, 메시아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들 이삭이 생겨나듯, 도처에 기적같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들이 이면적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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