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1
그러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비뚤어짐 속에 머물겠습니까? 거저주심을 넘치게 할 목적으로? 일 없습니다. 비뚤어지는데 있어서 죽어버린 우리가 어찌 지금도 그 안에서 살고자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우리는 메시아 예수에게로 잠기다 못해, 그의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깊게 잠겼던 우리 아닙니까? 그 결과 그의 죽으심에 이르는 세례를 통해 그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것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온통 드러나시어 죽은 사람 가운데서 메시아를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새롭게 된 삶 속에서 걷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이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우리가 '함께 새싹이 돋아난 사람'이라면, 또한 그이의 다시 사심과 같은 모양으로 우리가 그리 될 것입니다.
3:8과 같은 질문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4,5장을 지나온 지금, 바울은 결론만 던져놓고 왔던 3장과는 다른 대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이 대답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4장에서는 신실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라 산정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었고, 5장에서는 이 우주에는 두 가지 타임라인이 있어서, 한 쪽에서는 죽음이, 다른 한 쪽에서는 메시아를 통해 신실함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스린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다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한다"는 말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같은 질문입니다. 거저주심이 비뚤어짐을 덮고도 넘친다면, 거저주심을 위해 비뚤어짐의 노예로 머물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시간 속에서 살겠습니까?
새로움. 그것은 죽고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아난 우리는, 이제 옛 사람과 결별하고, 새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 세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출애굽 내러티브를 새로이 읽어나갑니다. 메시아와 함께 죽었다 살아서(곧 신실함입니다), 오는 시대 속으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세례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이 길 위에 있는 '세례'가 홍해를 건넌 사건이라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0:2) 즉 우리를 추격하던 비뚤어짐은 말 그대로 '수장되어' 더이상 우리를 추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돌아갈 길이 완전히 막힌 것입니다. 그러나 아쉬울 것 없습니다. 이집트는 우리의 집이 아니기에 돌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돌아갈 곳이 막힌 게 아니라, 대적이 우리를 추격할 길이 막힌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를 기독교 입문을 위한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해선 안되겠습니다. 메시아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인격적 연합입니다. 이 길이 죽음으로 가는 현시대에서 벗어나 오는 시대를 사는 길이며, 마침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를 비뚤어지게 만들었던 비뚤어짐은 메시아의 죽으심과 함께 죽었고, 우리 역시 그 죽으심으로 하나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메시아의 다시 사심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걸음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걸음이 아담의 벗어난 걸음일 수 있겠습니까? 아직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속에 '새싹이 돋아났다'는 사실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연합'이라 번역한 단어는, '같은 근원을 가지고 함께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신실하셨던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신실함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예수는 같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우리는 '함께'입니다. 같은 근원을 바라보며, 함께 죽고, 함께 삽니다. 그러니 이제 그와 함께 같은 걸음을 걷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다시금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걷는 내내 아버지가 뚜렷해집니다. 예수의 신실함, 곧 죽고 살도록 아버지께 충성했던 그의 삶은 줄곧 하나님 아버지를 뚜렷이 드러내는 삶의 걸음이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아버지의 뚜렷을 바라며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 길의 끝은 죽고 다시 사는 것이요, 부활은 하나님 아버지가 뚜렷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 걸음, 부활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뚜렷히 드러내시는 방법이니, 실패할리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신실함'이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박혔습니다. 비뚤어짐의 거대한 몸을 아무 소용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이상 비뚤어짐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죽었던 이가 비뚤어짐으로부터 벗어나 의롭다 산정되었습니다.
본문의 옛 사람은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로 아담입니다. 그리고 이 아담의 비뚤어짐에 우리도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성'에 참여하고 있던 나의 과거가 곧 옛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비뚤어짐은 사람에게 기생하여, 그 사람들의 관계를 타고 거대한 악을 만들어냅니다. 본문에 "비뚤어짐의 거대한 몸"은 악의 연대를 보여줍니다. 그 비뚤어짐의 연대는 실로 거대하여(정부의 민간인 사찰이나, 멕시코 마약 카르텔, 재벌들의 연대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보입니다.(마치 골리앗 앞에 다윗처럼) 그러나 메시아와 함께 죽은 사람은, 더이상 아담성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더이상 비뚤어짐에 먹이를 주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것과, 남에게 인정받는 것과, 세상 권세를 주겠다고 회유, 협박하는 비뚤어짐에 대해서 우리는 죽었습니다. 죽은 이를 이용할 수 없으니, 오히려 악의 연대는 우리에게서 무력하기만 합니다. 왼뺨을 돌려 대는 것입니다.
의롭다 산정되었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광야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외침입니다. "너희는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 인정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규모와 의미의 비뚤어짐과도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메시아와 함께 죽었다면, 그와 함께 살 것을 또한 믿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메시아께서 다시 죽은 적이 없고, 이제는 죽음이 결코 그의 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비뚤어짐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입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비뚤어짐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들로 산정하십시오, 메시아 예수 안에서.
죽기만 했습니까?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음에서 메시아를 일으킨 생명력이, 지금 우리 속에 불어왔습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메시아와 함께 아담성을 죽이고, 성령으로 다시금 일어나 걷는 이의 발걸음은 광야의 먼지 위에 있습니다. 악의 연대에 참여하지 않으니 가난합니까? 이름이 나지 않습니까? 이 땅의 루저들입니까? 이 광야로 나오기까지 메시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레드카펫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눈 앞에 없어도, 메시아 예수의 붉은 영광에 사무치며 걷는 길입니다. 비뚤어짐에 대해서는 죽었어도, 창조주 앞에서는 살아있습니다. "불멸과 존귀와 영광"을 향하여!
그리고 이 길의 끝에 신실함으로 시작된 메시아 예수에게로의 연합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로 말입니다. (우리의 종착지에 대해서, 바울은 8장에서 자세히 풀어놓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다시금 죽는 부활이 아닙니다. 메시아의 부활은 영원한 순환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비뚤어짐이 죽음을 가져왔으므로, 비뚤어짐이 해결된 죽고 산 사람에게는 더이상의 죽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것이 살아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뚜렷이 드러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의 끝에, 우리도 산정하라고 말합니다. 산정은 하나님만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산정'하신 것같이, 우리도 위의 사건들을 생각에 넣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면밀히 계산해봐야 합니다. 만일 저 위의 사건들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고, 그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직도 비뚤어짐의 종노릇하며 홍해 앞에서 집어삼켜질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벌써 홍해를 건넌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서 산 자라서, 돌아갈 길 없이 한 길만 오로지 전진해야 하는 사람입니까? 당신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돌아본 이집트입니까? 구름 뒤의 가나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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