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에서 4:1~25의 위치를 잘 봐두시기 바랍니다. 1:18~3:20은 인간 타락의 참상을 묘사했다면, 3:21~31에서는 모두가 타락에 대해서 유죄판결을 받은 상황 속에서(심지어 언약백성 이스라엘 조차도!), '하나님의 의' 곧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이 어떠한 의미인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실함은 토라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는 것이었고, 바울은 이제 그 토라 이야기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로서 아브라함 언약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4:1~8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살몸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 하겠습니까? 만약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산정되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살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인했습니다. 사람을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생각하는 플라톤주의로는 성경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습니다. '살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비뚤어짐의 노예가 되어 비인간화의 과정이 진행되는 인간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인간성의 극단에는 남을 판단하는 문제가 걸려있었고, 이스라엘은 토라를 지키는 행위를 기준으로 내걸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살몸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겠습니까?" 라 반문합니다. 아브라함은 타락한 인간성의 측면에서 우리의 조상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토라를 지키는 행위의 정당성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은 토라를 지키는 모범으로 여겨졌고, 그러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토라를 지키는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살몸으로는 토라를 지킬 수도 없고, 아브라함은 살몸으로 연결된 언약백성의 조상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언약백성과 살몸으로 연결된 조상이라 생각한다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쉐마를 통해 하나되는 하나님 가족(3:29,30)을 거절한 것이요(이 가족은 타락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해결책임에도),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자신과 무관하다(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음에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아닌 것입니다. 타락으로 치닫는 인간성을 자랑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헛된 자부심은 '언약백성'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자랑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부터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야겠습니다. 그가 타락의 절정인 바벨탑 이후 부름을 받은 첫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언약하신 언약백성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보면, 언약백성 이스라엘은 어떠한 사람들인지가 밝혀질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은 '언약백성의 민족적 우월감을 부추기는 행위'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의'를 선언하신 것은, 분열을 낳는 행위를 자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하나의 기준은, 바로 신실함(믿음)이었습니다. 이 신실함이,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며, 자신이 하나님 가족임을 나타내는 현재적 표지였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다 선언하셨다."
노동하는 사람에게는 노동의 대가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할 급여로 산정됩니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고서도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산정하시는 분께 신실한 사람에게는, 그 분이 그 신실함을 의로 산정하십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절은 창세기 15:6입니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창세기 12장의 언약을 확증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란, 1) 살던 곳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갈 것 2) 많은 후손을 주실 것 3) 그들이 모든 민족의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될 것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길을 떠난 상황이었으나, 당시 그의 나이 100세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첫번째 약속은 그렇다 치더라도, 두번째 약속은 '그의 살몸을 봤을 때'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했습니다. 이 신실함은 지적동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몸을 움직여 그가 지시하는 땅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실함으로, 그는 위대한 서사 곧 토라 이야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여기시는데, 이 '의'란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것이라는 현재적 표지이고, 이 의롭게 여겨짐은 곧 하나님 가족임을 나타내는 무등산 수박 스티커였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 개인을 중심으로 풀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토라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간다면, 이해가 더욱 수훨해질 것입니다. 즉 신실함은 하나님의 토라 이야기로 들어가는 방법이자, 토라 이야기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토라 이야기가 반드시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줄곧 신실함으로 그 이야기에 들어가 살아갈 때, 그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역시 그 이야기의 이뤄짐과 함께, 옳다고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 인정받음은 미래의 일이지만, 오늘 내가 신실할 때 드러나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는 나 역시 옳다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이 하나님의 토라 이야기를 이루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토라 이야기로 들어갔을 때, 그에게는 기적같이 언약의 후손이 생겼습니다. 그가 이삭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 창세기 15~17의 맥락을 통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분리를 조장하는 행위의 자랑'이 아닌, 신실함에서 생겨난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그의 아들 이삭도, 또 아브라함과 연결된 수많은 언약의 후손들은 살몸으로 연결되지 않고, 신실함으로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은 신실함의 모범이지, 토라 행위를 자랑하는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저 '경건하지 않은' 이라는 말은, 우리를 1:18~3:20으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야 마땅한 비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모든 살몸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던 타락한 사람이,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이 되는 그 과정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피고석에 앉은 자들에게, 메시아 예수의 대신 처벌받음과, 성령으로 창조되는 새마음을 주어졌습니다. 이 새마음만이 쉐마로 시작하여, 하나님께 줄곧 신실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마치 죽을 아브라함의 몸에서 이삭이 나왔듯, 아무런 생명없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이한 사람들이요, 아브라함의 후손, 언약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 속에서 생겨나 실천으로 이어지는 '신실함'은 무언가 잘 한 일이 있어서 그에 대한 댓가를 요구하는 자랑과는 비교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노동없이, 하나님이 의롭다 산정되는 사람의 복에 관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범법자들이 용서받는다.
죄인들이 죄 덮인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
주께 죄를 산정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산정'이라는 단어를 제쳐두고 달려왔는데, 이제 설명할 차례입니다. '산정'이라는 말은, 개역성경에서 '여기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회계장부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생명책을 생각하고 적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책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주욱 적혀있고, 그 이름 옆에는 선악간에 몸으로 지은 모든 죄들과, 은밀한 죄들까지 죄다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비고란에는 '죄인'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고란의 '죄인'이란 글씨 위에 볼펜으로 두 번 쭉쭉 그으시고, 그 위에 '의'라고 적으십니다. 이 사람은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토라 이야기에 참여한 사람으로, 그 신실함 전에 성령이, 그 성령 전에 예수의 승천이, 그 승천 전에 예수의 부활이, 부활 전에는 메시아 왕의 대신 처벌받으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그의 죄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 죄를 의로 덮으십니다.
이에 대한 바울은 다윗의 예를 듭니다. 그는 앞에서도(3:1~8) 시편 51편을 인용할 때, 언급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으나, 용서받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인용한 시편 32편의 뒷부분에서는, 용서받은 죄인을 가리켜 (기이하게도) '의인'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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