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고 왔습니다. 음악도 좋고, 연기자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예수와 복음서에 대한 오해들을 가지고 극을 구성해나가려는 모습들이 영 눈에 거슬려 몰입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예수의 39대 채찍질은, 예수를 사형시키지 않기 위한 빌라도의 몸부림으로 그려집디다.) 군중들은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가는 것을 바라는 모습으로 그려졌다가도, 권력에 맞서서 혁명을 일으키자고 하기도 하고, 뭐하는 사람들인지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보고난 소감은, 사람들이 '예수와 복음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구나' 였습니다. 예수라는 소재만 빌려왔을 뿐, 그 속의 이야기는 예수다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정론자로 예수가 그려집니다)


  비슷한 일이 신약성경 해석에서도 벌어집니다. 오랫동안 유대인은 '노력'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허망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여겨졌고, 이에 반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노력없이 '어떠한 내용에 대한 관념적 동의'만 있으면, 비물질적 세계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행위'와 '믿음'의 대조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에서의 '자랑'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한 것에 대한 자랑이 아닙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은혜'아래 있다고 생각했지, 노력 하나만 가지고 구원을 이뤄보려던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노력으로 구원을 이뤄보려던 중세 카톨릭이 이미지가 역으로 신약성경에 투영된 해석이었습니다.


로마서 3:27~31


  그러니 자랑할 만한 게 어디 있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토라로 입니까? '행위의 토라'로 입니까? 아닙니다, '신실함의 토라'로 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토라 행위로가 아니고 신실함으로다' 라는 말이 우리 안에서 확실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참으로 유대 사람 아닌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할례자도 신실함으로, 무할례자도 신실함으로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에서의 '자랑'은 유대인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얻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이것이 '그러니'라는 접속사로 연결된 것은, 앞 본문에서 예수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행위'역시 '구원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겉모습으로서의 행위입니다. 마치 히잡을 써야 한다는 이슬람의 '행위'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대조시킵니다. 하나는 '행위의 토라'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토라'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토라가 '법'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말은 칸트식의 보편적인 도덕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편적인 도덕법으로 읽었기 때문에 행위와 믿음이 기독교 안에서 서로 맞서게 되었고, 그 결과 행위 없이도 관념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범람했습니다.(이것을 과도하게 밀어붙이면 구원파라는 이단이 됩니다) 그러나 법을 '토라'라고 읽으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면서도 우리가 어제 보았던 로마서 본문과 지금 본문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로마서 내내 토라는 버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토라는 지킬 것이었습니다. 언약백성은 토라를 지키기 위해 부름을 받았고, 할례는 '토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은 토라를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실패는 1) 자신들이 토라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2) 이방민족과 자신들을 차별화시키는 행위들에 의지해서, 3)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래의 문장을 이해해봅시다. 


  무슨 토라로 입니까? 행위의 토라로 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행위의 토라'라는 말은 위에서 번호를 매겨두었던 이스라엘의 실패를 가리킵니다. 즉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외적 행동으로는 토라를 지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오히려 유대인은 이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토라를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던져놓은 '기이한 사람들'에 대한 빵조각을 주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이한 사람들은 언약백성이요, 이면적 유대인이요, 하나님과 끊어져, 왜곡된 사고방식과, 왜곡된 행동에 사로잡힌 자들이, (어떠한 충격적인 사건을 거쳐) 마침내 토라를 지키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나는 사람으로 역사의 한복판에 새로이 등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사람들은, 어찌 토라를 지키겠습니까? 바울은 대답합니다. '신실함의 토라로!'입니다.


  저는 신실함으로 풀었지만, 일반적으로 신실함이라는 단어보다 '믿음'이라는 단어에 더 친숙합니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관념과 그 관념의 연장으로서의 물질이 분리되었고, 믿음이라는 단어 역시 실천적인 요소가 배제된 지적동의, 신념 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보다 신실함이라는 번역어를 저는 선호합니다. 이 '신실함'이란 단어는 앞 본문인, 3:22의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과 연결됩니다. 이 신실함에 대해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렇게 배웠습니다.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입니다. 다시 말해, 쪼개진 동물들이 죽음을 통해서 약속의 확실함을 드러냈듯, 예수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신실하셨다는 사실이(심지어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즉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곧 신실함이고 이것을 믿음이라 불러왔습니다. 토라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한 분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에 달려있고, 이것을 쉐마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원하신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는 타락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토라 행위로가 아니라 신실함으로다" 라는 말이 자신들에게서 확실해졌다고 말합니다. 이 '의(義)'에 대한 말이 따라나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이 곧 '하나님의 의'였기 때문입니다. 3:26에 바울은 하나님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의'와 '예수로 인해 출애굽한 사람들의 의'를 드러내셨다고 말했고, 오늘 본문은, 예수로 인해 출애굽한 사람들의 의, 곧 바울을 포함한 예수 공동체 일원들의 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의'가 무엇인지는 3:21~26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행위의 토라가 아니라, 신실함의 토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신실한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쉐마'를 인용합니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본래부터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이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마음 다함, 뜻 다함, 힘 다함. 이 마음은 새 언약으로 새롭게 된 마음이고, 우리는 이 마음이 기이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쉐마가 이스라엘을 정의합니다. 이것이 본래 토라에 기록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본래 자신들의 신실함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신실함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하나님은 예전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단 하나를 요구하십니다. 토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라를 지키려 행위 목록들을 만들고 서로를 감시하지 않아도,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함은, 그 토라를 이룹니다. 토라를 모르고도 토라를 이룹니다. 이 사람이 기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만 의롭다 선언됩니다. 즉 최후의 심판 때 옳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의 현재적 표지는 바로 신실함, 오직 신실함 뿐입니다. 지금 신실한 사람이, 최후에 인정받을 사람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신실한 사람만이 한 분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유대인은 신실함이 아니라, 할례와 그 밖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행위들로 오해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하나만으로, 최후의 심판에서 옳은 자로, 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선언된 이 사람들은 분리주의자일리 없습니다. 할례와 행위라는 외적 표지들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함'은 1:18~3:20의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면 신실함 때문에 율법이 폐기처분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건히 세웁니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도 토라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이룰 것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한 바 있습니다.(2:12~15, 17~20, 26,27,; 3:19,20) 기독교 안에서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도덕 규칙이라 생각하거나, 자유의 원칙에 어긋나는 강요된 행위 목록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토라는 이야기입니다.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실 하나님의 언약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셨고, 그들을 통해 온 인류에게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셨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 유대인들이 그 이야기를 말아먹는 위기 속에서, 예수는 처벌을 대신 감당하셨고, 이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시금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타락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출현한 언약백성은 쉐마 안에서 이 위대한 이야기를 이뤄갑니다. 그래서 "토라를 굳건히 세운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당신과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마침내 출현한 새로운 언약백성들이, 토라 이야기를 어찌 읽어야 하는지를 풀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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