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I-B'를 끝내고, 이제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습니다. 여러 찜찜한 질문들을 남겨두고 왔는데, 이제 로마서는 진리로 우리를 씻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간 1:18~3:20의 내용을 잘 따라왔다면, 아래 전개되는 로마서의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새로운 내용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 3:21~4:25을 살펴봅시다.
로마서 3:21~26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아주 별개이면서도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그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뚤어져버려서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메시아 예수 안에서 벌어진 어린양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저 하나님 가족 삼아 주셔서, 최후 심판에서 옳은 자로 선언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언가 달라졌습니다. 이 말의 앞 뒤 맥락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1:18~3:20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그 모든 사람 안에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뚤어짐의 노예로 살아가는 시간은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심'의 현재와, 최후의 심판에서 정죄의 선언을 받게 될 미래뿐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언약백성 이스라엘이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비뚤어짐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언약 이야기를 통쨰로 말아먹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의로움에 대한 질문들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제의 법정 그림을 생각한다면, 지금 피고석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토라로 작성한 처참한 판결문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 토라와 별개이지만, 토라와 예언자들, 즉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 부릅니다. 이것은 분명히 피고석에 앉아 있는 '모든 살몸들'에게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어려운 말입니다만, 바울이 지금 창세기 12, 15장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미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 하셨습니다. 그 언약은 세상의 문제를 바로 잡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15장에서 동물을 쪼갠 피의 제사를 통해 확약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입니다. 다시 말해, 쪼개진 동물들이 죽음을 통해서 약속의 확실함을 드러냈듯, 예수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신실하셨다는 사실이(심지어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충격적인 전환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일을 예수께서 이루셨습니다. 예수의 신실하심이,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의 신실함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께서 이루신 새로운 출애굽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글쓰기가 그렇듯, 이 출애굽에 대해서는 뒤에서 얘기할 것이지만, 미리 주제를 던져놓습니다. 예수의 출애굽은 이방인과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지 못하는 타락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바로 1:18~3:20의 상황입니다. 이 '드러남'이라는 말은 곧 '영광'인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실패했다는 비참함은 아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비뚤어진 이들중 이스라엘에게 토라가 주어졌으나, 토라는 비뚤어짐을 올곧게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치부를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토라와 아주 별개인, 그러나 토라와 예언자들이 증언하던 한 분이 나타나셨고, 그 분은 하나님께 줄곧 신실하여, 마침내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셨고, 이것은 하나님의 의, 언약 이야기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신실한 예수를 세워, 이스라엘이 실패한 언약 이야기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온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예수의 새로운 출애굽은 언약백성은 죄에 대한 출애굽이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이 없습니다.(언약백성의 특권이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과 달리) 그리고 이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이뤄졌기에, 법정 그림에서 피고석에 앉았던, 죄가 분명하다고 판결났던 이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옳은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토라의 판결이 폐지된 것이 아닙니다. 토라의 판결은 여전히 유효하고, 토라를 지키지 않음에 대한 처벌을 예수가 대신 받은 것입니다. 피고석에 앉은 인류에게는 경천동지할만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옳은 사람으로 드러나는 현재적 표지를 가리켜 '의'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지키는 행위'를 '의'를 얻는 방식이라 여겼지만, 그들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부패한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은 피상적 행위는,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토라와 별개로' 예수의 새로운 출애굽이 벌어졌고, 예수를 통해 드러난 최후의 심판에서 옳다 인정받는 현재적 표지는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유죄판결을 받았던 이들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그러니 '거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이의 믿음직함을 통해, 그이의 피로써, 예수를 '법궤덮개' 앞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속에서, 현실로 달려오는 과거와 미래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기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그의 의가 현시대를 뚫고 바로 지금 나타났습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다는 것과 예수의 신실하심으로 출애굽한 사람들 또한 의롭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말입니다.
비뚤어짐의 문제가 한 사람의 처벌을 통해서 해결됩니다. 바울은 속죄제사의 그림으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언약백성의 모든 죄를 속죄 하기 위해, '법궤 뚜껑(시은좌)'에 그 피를 뿌립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만나 주시는 장소로서, 피가 뿌려짐을 통해 언약 백성의 죄가 용서됩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언약백성에 대한 속죄로 읽고 있습니다. 예수는 언약백성의 속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재적 심판은 곧 속죄를 위해 참으심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역시, 그 날에 옳게 드러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이미 바울이 밝혔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토대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야 말로 역사의 전환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시는 시작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기까지 신실하심,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고, 이것은 악이 승리하는 현시대 속에 떨어진 폭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이야기를 새롭게 갱신하시고, 이루시는 일이 마침내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신다는 사실이,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지금' 드러났습니다. 그 '지금',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어 출애굽한 사람들이 옳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예수의 대신 처벌받음을 통해서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다시금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서 1:18~3:20을 결정적으로 뒤집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져 독립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새로운 사람, 여기서부터 새로운 창세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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