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늘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저는 지금 바보같은 소리를 하고자 합니다. 하늘 사람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땅을 의지하는 것은 쉽습니다. 땅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인간의 차원입니다. 얼마 전 장래 희망을 조사했더니 이 땅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꿈이 임대업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즉 땅을 가진 사람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이런 결과는 빙산에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땅을 가지고, 또한 그 면적을 늘려서, 그 위에 굳건히 서고자 하지 않습니까? 학연, 지연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연은 같은 학교 출신의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이 일 처리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지연은 같은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이 일 처리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땅을 의지하는 것이고, 자기 선 곳을 넓혀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내 편의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 살기 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연, 지연이 문제를 더 심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공평무사하게 일처리가 되지 않고, 아는 사람 중심으로 그렇게 처리되는 일은 부정직입니다. 그럼에도 누구 우리 학교 출신인 사람 없나, 누구 우리 지역 출신 사람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이 역시 땅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인은 꼭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신의 꿈이, 땅을 차지하길 바라는 것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어쩌건, 뭐라 하든 간에, 하나님이 기르시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사람은 '하늘 사람'입니다. 하늘 사람은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하늘 사람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뭐가 있냐고, 그게 뭐 의지할 게 되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하늘에 뭔가 있음을 밝히 드러내신 분이 예수 아니겠습니까? 예수는 다름 아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 기대는 사람입니다. 사탄이 자꾸 시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해보라고 말입니다. 먹을 것을 의지하든, 자신을 추종하는 씨알을 의지하든, 높은 권세를 의지하든, 사탄은 예수께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든 의지하게 해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끝내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폭력을 쏟아부어서, 예수의 의지를 꺽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하늘 사람을 땅 사람 만들고 싶어서 작정을 한 것이 사탄입니다.


  얼마 전 일본에 갔을 때, 'JR타워'라는 곳을 올라갔습니다. 제가 갔던 동네인 삿포로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고, JR타워가 38층으로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꼭대기층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삿뽀로 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보입니다.



  이 사진은 제가 찍은 사진은 아니고, 구글에서 구했습니다. 그런데 JR타워로 검색하고 전망대 사진을 찾는데, 대부분의 사진들은 초점이 눈에 보이는 건물들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허나 제가 JR타워에서 본 것은 휘양찬란한 도시의 불빛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온통 덮고 있는 하늘이었습니다. 땅은 건물과 차들과 사람들로 뺵빽한데, 하늘은 정말 말그대로 공활(空豁)하여, 높고 모든 것을 끌어안을만한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큽니다. 그리고 땅은 하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땅에서는 서로 살겠다고, 공간을 차지해보겠다고 싸우고 있는데, 하늘은 이토록 넉넉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땅을 바라지 않고, 하늘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넉넉한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 사람은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차원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침략을 당한다. 침략하는 자는 빼앗는다.


  즉 하늘은 넉넉하게 그 품을 열어놓아, 그 하늘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는 자신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땅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출애굽의 그림을 떠올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 그 땅을 얻고자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과해야했던 땅은 다름 아닌 광야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땅을 주신다고 불러놓았는데, 그 사람들은 광야를 지났습니다. 왜 입니까? 땅을 얻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땅에 중독될 사람이 아니라, 땅을 다스릴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릴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함께 다스려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오히려 땅의 것에 중독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키십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땅 중독에서 벗어나, 하늘을 붙잡는 사람 삼고자 하심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다시 땅을 다스리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정체입니다. 이 약속을 붙들면, 당장 내 손에 땅이 붙잡히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약속은 promise입니다. pro는 '앞으로'고, mise는 '보낸다'는 말입니다. 즉 앞으로, 미래로 보내놓은 것이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미래에 던져놓으셨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온통 의지하여,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게 될 새로운 시절을 약속해두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가 곧 현실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어, 오늘 내가 하늘 사람으로 살면 그 믿음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입니다. 오는 시대를 내가 지금 사는 것입니다. '이제' 하고선, 과거로부터 출애굽한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대로 믿는 자는 결국 모든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새 땅입니다. 새 하늘 아래 드리워질, 깨끗게 된 땅입니다. 믿는 이는 온 세계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그 땅을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그 임무가, 하늘 사람들에게 다시 새로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시험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말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매 순간 묻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비워둡니다. 두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아도 만족합니다. 하늘을 얻었고,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하늘을 얻는다니요? 아무리 손을 뻗어서 하늘을 쥐어보려고해도 하늘은 잡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지각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늘을 의지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늘을 손으로 잡을 순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을 잡을 수 있는 다른 기관을 주셨습니다. 



  自我 



  자아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자(自)'는 코를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왜 '나'라고 할 때, '자아'라고 할 때, 코를 그려놨는지 참 신비한 일입니다. 코가 나를 대표합니다. 왜냐하면 이 코야 말로 하늘을 붙잡을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코가 어찌 하늘을 붙잡습니까? 손이 잡을 수 없는 것을, 코는 잡을 수 있습니다. 바로 숨입니다. 공기입니다. 코는 어떻게 그 보이지 않는 숨을 붙잡습니까? 들이마심으로 하늘을 붙잡습니다. 그렇게 코가 숨을 들이마시고, 폐로 숨을 붙들었다가, 욕심부리며 계속 가지고 있겠다 하지 않고 다시 내뿜습니다. 그렇게 코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하면서 하늘과 연결됩니다. 이 코로하는 호흡이 보이지 않는 차원과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생명은 지금도 이렇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을 붙잡는 코. 이것이 '나'입니다. '나' 라는 사람 전체가 온 몸으로 하나님의 숨결을 들이 마시고, 그것을 고백하여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고 하면 우리는 하늘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붙잡았으니, 그렇게 따라가면 됩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을 따라갔듯이, 그 보이지 않는 차원의 무언가를 우리는 숨 쉬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럼 땅을 차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늘을 얻었으니, 우리는 땅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약속을, 내가 숨쉬며 살아가는 동안 믿기 때문입니다.


  하늘 사람은 이렇게 삽니다. 다시 말해, 하늘 사람은 성령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숨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삶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땅이 없습니다. 마치 아브라함 같습니다. 부인이 죽었는데도 매장할 곳이 없어 세겜 지역 남의 땅을 사야만 했던 그 사람 마냥, 하늘 사람에게는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땅이 없어 가난한 사람이, 하늘을 얻은 사람이요, 마침내 이 땅 마저도 얻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5, 새번역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은 '친절한'의 의미가 아닙니다. '가난한' 입니다. 이 땅에서 땅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이 땅의 주인임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하늘 사람으로서 이 땅을 광야같이 한 걸음씩 걸어갑시다. 그 길이 진짜 자아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숨길, 그 숨이 내뿜어져 나오는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거룩한 숨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호흡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스데반이 이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죽이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까? 저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하늘 사람인 스데반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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