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첫째는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영광'이란 말은 '뚜렷이 드러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뚜렷이 드러내셨고, 모세에게 불붙은 떨기나무로 뚜렷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땅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드러남이요, 곧 영광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모세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난 이야기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땅에 보이는 일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눈에 뵈는 것만으로 낙담할수도, 실망할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꼭 붙들고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읽을만 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차원의 하나님은 땅보다 사람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땅<사람'입니다. 땅은 사람을 위해서 있지, 땅이 사람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주'라고 번역하는 'Lord'라는 말은 땅주인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 분을 이 땅구슬의 주인이라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이 이 땅주인인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이 땅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수의 사람이 이 지구를 독점하고서, 많은 사람들을 종으로, 노예로 삼고 왕 행세를 벌였습니다. 이 가짜 왕들은 땅을 차지하고자,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 속에 뒤틀린 생각들이 심겨졌습니다. '땅>사람'.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이토록 땅 차지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을까요? 땅이 사람을 부자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땅이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걱정이 없고, 돈도 많이 생기고, 자기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이든, 학교든, 교회든, 회사든, 국가든, 땅을 많이 차지하는 일을 좋다고 여기며 그 몸집을 불려왔습니다. 땅부자가 되길 바라고, 학교는 재단을 늘려가며, 교회는 대형교회가 되고, 국가는 다른 나라를 집어삼켜 제국이 되었습니다. 땅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허나 '땅<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큰 땅 이집트에서 사람들을 탈출시켜다가, 40년을 한결같이 땅 한평 갖지 못하고 떠돌이로 살게 하셨습니다. 왜 입니까? 제대로 된 정신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땅에서 생존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을 따라 사는 사람이 참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이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에는 이 보이지 않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입니다. 하늘은 미래입니다.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땅에 기대느라 자꾸 면적을 넓혀가며 누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잠언 6:9~11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땅에 눌러 있으면 안됩니다. 개미가 양식을 모아 미래를 준비하듯, 그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몸을 써가며 일해야 합니다. 허나 일하기 싫어서 땅을 많이 차지하고 싶어하는 파라오들이 오늘날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파라오들을 부러워합니다. 무엇이 부럽습니까? 하나님 땅을 제 것처럼 차지하고선, 그것 때문에 양 손 가득 무언가를 쥐고서, 미래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 무엇이 부럽습니까?


  스데반 이야기에서 땅을 널찍허니 차지하고선,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로 반역하는 건물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땅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면, 공동체가 유대 성전 마냥 됩니다. 그 성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1) 일도 안하는 자들이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를 빨아먹고, 2) 율법을 안다는 사람들은 지식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3) 로마와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생존할 수 없다고 온통 거짓말만 늘어놓지 않습니까? 

  유대 사람들이 성전을 으리으리하게 지어놓고서는,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하나님의 집에서 했던 일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짜먹는 일, 지식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일, 남들과 경쟁해서 이겨야만 살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수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땅 타령 하는 사람들은 하늘 사람 아닙니다. 이 땅 중독자들에게 스데반이 <성경>을 풀어줍니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오늘날 우리는 무수한 성전들을 보고 있습니다. 일도 안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를 빨아먹고, 글줄 께나 안다는 지식인들은 자신들 밥그릇 걱정에 할 말들을 아끼며, 북한의 위협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계속 겁주는 정치를 21세기에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다 땅 타령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절실한 필요도 없이 더 큰 집을 원한다면, 그저 돈 많이 버는게 취직의 이유라면, 적성과 상관없이 대학 간판의 서열에 놀아난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살 길이라 말한다면, 유대 성전과 다를게 없습니다. 이런 것 그만 하자는 게 예수님 말씀입니다. 땅에 기대지 말고, 하늘에 기대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말은 바보 소리같습니다. 그런데 이 바보들이나 할 법한 말이 정말 이뤄졌습니다. 땅이 아니라 온통 하늘에 몸을 맡긴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그는 사람을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지 않았고, 생존에 얽매여 허튼 꿈을 바라지도 않았으며, 최후에는 죽음 마저도 이겼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따르는 사람이라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아닙니다. 하늘을 온통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거룩한 숨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거룩한 숨님, 곧 성령님을 거역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숨을 거절하니, 땅에 중독된 사람들은 숨을 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숨이 아니고서야,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들이 마시지 않고서야,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도 그렇지만, 우리의 정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정신의 숨을 쉬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살게 하는 그 숨결을 가리켜 거룩한 숨결이라 합니다. 공기는 더러워질 수 있으나, 이 거룩한 숨결은 사람의 손 때를 탈 수 없는 공기이기에 '거룩'이 붙습니다. 이 깨끗한 정신의 숨을 쉬는 것이 하늘을 의지하는 것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생존이 조금 보장된 것처럼 보인다고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는, 이 보이지 않는 깨끗한 정신으로 살 생각을 안합니다. 땅보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참을 헌신짝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하늘을 말하고, 사람의 가치를 말하는 예언자들을 그렇게 무참히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안죽습니다. 참이라는 것은, 진리라는 것은, 옳음이라는 것은, 정의라는 것은, 죽어도 안죽습니다.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 예수를 죽이려고, 온 민족과 제국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십자가에 말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참을 없앨 수 있었습니까? 오히려 참은 죽어도 다시 살아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습니까? 스데반은 이것 믿었습니다. "진리는 죽음으로도 못 덮어!" 이것을 어찌 믿었습니까? 스데반은 숨 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불어오는 그 숨결로, 정신이 시원하게 숨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차원의 그 미래를 봅니다. 곧 인류와 세계의 결말입니다. 하늘에서 이뤄진 것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결국에 평화가 온다는 말입니다. 결국에 사랑이 이긴다는 말입니다. 결국에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과학자들이 하는 말과는 짜장 다른 말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구가 차디차게 식어서 죽고, 인류는 멸절할 것이기에 다른 별에서의 생존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도 세상이 점점 살기 어려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죽어가는 별에서 나 하나 사는 일에도 벅차서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하수구에 자기 정신을 빠뜨려놨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분이 이것을 보시고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미래가 뒤집힐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참으로 믿는 것입니다. 미래가 반드시 뒤집힐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아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우리는 단연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입니다.


  스데반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고, 그리고 자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두 부활 사이에 삽니다. 예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 사이에서 그는 죽음을 이깁니다. 돌을 들고서 그를 내리치려한들, 그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이 두 부활 사이에 서니, 스데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의 삶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으니, 그는 부활한 상태로 사는 것처럼 현재를 삽니다. 이 생각을 하고나니, 예수님의 말씀이 번뜩 생각 납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할 것이요, 생명을 얻을 것이니" 이렇게 말씀 안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죽지 않으셨음에도, 나는 부활'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믿고 사는 삶에는 죽음이 끼어들 수 없고, 설령 끼어든다한들, 부활은 그 죽음을 삶에서 몰아내는 힘입니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부활하셨으니, 역사적인 힘이요, 실제적인 힘입니다. 


  여러분도 부활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어찌되었든 부활입니다. 그러니 죽음은 여러분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올바르게 살 수 있는 힘입니다. 부활이 힘입니다. 이 부활의 미래로부터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옵니다. 성령의 바람입니다. 내 삶 속에서 죽음의 악취를 씻어내는 깨끗한 바람, 죄인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입김입니다. 창조의 입김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숨쉰다 함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완전한 미래를 바란다는 말이고, 그 미래를 믿으니까 이 몸뚱이를 그 미래를 이루는 일에 쓴다는 말입니다. 미래를 바라니 '소망'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내 몸뚱이 아까운 줄 모르고 그 미래에 맡기니, 이것을 '사랑'이라 부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라는 한 사람의 '과거' 이야기에 기초해있으니, 그 이야기 위에 서는 것을 '믿음'이라 부릅니다. 참된 토대 위에 서서, 몸을 써가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인간됨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치 날아가는 화살 같습니다.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믿음이요, 과정이 사랑이며, 미래가 소망입니다. 믿음으로 날아간 화살이 사랑을 지나 미래의 과녁에 적중합니다. 이 모든 과정 속을 공기가 두르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반대로 참된 인간의 출현을 믿지도 않고, 몸도 쓰지 않으며,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지도 않는 것을 가리켜 죄라 합니다. 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삐뚤어짐이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까? 잘못된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고 사는게 다름 아닌 죄입니다. 과녁에 꽂힐리 없습니다. 그런 화살은 바람을 탈줄 모르고, 공기를 그저 저항이라 생각합니다. 성령에 맞서니, 온통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땅 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존 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정리해봅시다. 여러분에게 할 말은 이것 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요,

  땅보다 사람이요,

  공동체를 땅 차지에 혈안이 된 성전으로 만들지 말자는 말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성령으로 숨 쉽니다. 그 사람이 참된 성전입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말을 들어봅시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호흡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뚜렷이 보는 이였고, 그를 죽이는 사람들은 땅 차지에 눈이 돌아간 사람들이었으며, 숨 쉬는 사람이었던 스데반은, 끝까지 성령으로 숨 쉬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수가 처벌받는 미래를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최후의 순간 마저도 하나님의 미래를 갈망했습니다. 그 미래는 저 사람들에게 죄를 돌리지 않는 미래입니다. 자꾸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가 뚜렷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이런 사람이 됩시다. 숨 쉬는 사람입니다. 제 손에 아무 것도 주어진 것 없어도, 숨 쉬기에 살아갈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이 숨은 거저 주어졌으나,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킨 바로 그 힘임을 기억합시다. 내가 여기서 했던 말들이 얼만큼 남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말은 사라져도 숨쉬는 사람이 남으면 그것으로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나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오해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나신다는 말이, 무언가 우리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일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예배에 온다는 말은, 우리의 각막에 무언가 충격적인 상이 맺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이런 것 바라느라 숨쉬는 것을 잊었던 사람들이 유대 사람들입니다. 나도 하나님께 예배 하러 오지만, 하나님이 저의 지각에 뚜렷이 드러나신 적은 제 일생에 두 번 뿐이었습니다. 매번 예배를 오지만, 그 옛날의 격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서도 하나님은 드문드문 나타나셨지, 항상 아브라함은 격한 감격과 충격 속에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하나님이 없습니까? 숨 쉬는 이에게 하나님은 분명합니다. 정신으로 호흡하는 이에게, 선한 생각을 주시는 이는 또렷합니다. 예배에 와서 하나님은 만나지 못해도, 사람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 숨쉬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땅이 아닌 하늘을 온통 의지함을 봅니다. 그러니 이 공동체를 통해서 권선동은, 하나님을 못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숨결로 숨쉬는 사람은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고, 그래야 예배입니다. 숨 쉬는 사람이 됩시다. 이 소리를 듣고, 나도 숨을 쉬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반증입니다. 부활을 믿고 삶에서 어두움을 몰아냅시다. 


  처음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염이 심해서 코로 숨 쉬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는 비염 환자처럼, 사람과 세상이 성령으로 가득차게 될 미래가 분명하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숨 쉬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럼 나중에는 순하게 쉬어질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시원하게 성령으로 숨쉬고, 이러한 호흡이 익숙해질 날을 고대합니다. 그러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하늘을 봅시다. 넘어져도 또 일어나 하늘을 봅시다. 그 보이지 않는 차원에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뚜렷해지도록.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예수만 하실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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