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에서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 그런데 이 하늘과 땅은 곂쳐있어요. 그럼에도 우리의 생각과 해석에서 하늘을 끊임없이 밀어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이 없다 말하는 사람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사람입니다. 물질을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고 쪼개고 보면, 그것이 물질인지, 진동과 같은 비물질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즉 우리가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훨씬 더 큰 차원, 그 물질을 감싸고 있는 하늘의 차원이 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이렇게 마주 보고 있지만, 여러분과 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습니다.


  영광,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납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 '정의', '아름다움' 그리고 '하나님'. 이러한 순간이 영광의 순간입니다. 요새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를 '영광의 순간'이라 부르지만 말입니다.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의 무언가가 드러나도록 몸을 갈고 닦아, 결국에는 그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럼 영광입니다. 영광은 이러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광에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고, 또 하나는 몸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는 차원입니다. 즉 우리의 몸을 통해서 사랑이 드러났을 때, 정의가 나타났을 때, 아름다움이 구현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드러났을 때. 이러한 때가 '영광'입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화가의 붓을 통해서, 그림으로서 눈에 드러나게 됩니다. 들리지 않는 진동이, 연주자의 피리를 통해서, 음악으로 표현됩니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믿는 이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드러나게 됩니다. 영광입니다. 


  그럼 어떤 때에 우리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가 정의를 실천할 때, 우리가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즉 이 모든 상황들을 종합하면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위해서 견딜 때'. 즉 고난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무언가를 위해서 견디고 감내할 때, 그 더 큰 무언가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크기에, 우리가 그 뜻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뜻 드러냄은 견딤과 애씀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그 뜻을 드러내기 위해 견기는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사람은 이러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이 보이는 차원을 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우주가 지구를 덮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주의 통치자가 자신을 땅의 사람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삶을 요약하면 견딤입니다.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견디는 사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광야를 걸었고, 모세도 광야를 걸었습니다. 곧 하늘 사람입니다. 땅이 아닌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해봤습니다. 

  사람은 그칠 지(止)입니다. 말그대로 사람은 그치는 존재입니다. 어제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를 보러 갔다가, 영화 시작 전에 나오는 광고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이 그치는 존재라는 말은 딱 이 말입니다.



  "여기 이상한 승부가 있습니다. 이기면 참 많은 것을 얻을 것 같지만 이겨도 지고, 져도 또 집니다. 이겨도 당하고 져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무엇에 대한 표현으로 들리십니까? 누군가는 이겼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강연에 나와서 여러분도 이기시라고 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도 집니다. 이겼다고 말하지만, 결국 집니다. 자신은 패배자라고 말하는 사람 역시 또 집니다. 이거 무엇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죽음입니다. 삶의 패배입니다. 인간은 어떤 삶을 살던지, 죽음에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잠시간 죽음에서 해방된 것처럼 좋아하지라도, 그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그칩니다. 비가 그치듯, 끝없이 내릴 것 같았던 나의 시간도 언젠가 끝이 납니다. 그러니 사람은 '그칠 지(止)'입니다.

  저는 어제 이 그치는 것에 대한 아픔을 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 죽음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사지가 찢기는듯한 그 괴로움, 사랑하는 이의 무덤을 떠날 수 없는 그 애잔함.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말할지라도,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인간됨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막다른 골목을 만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아파서 일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족들에게도, '이제는 잊고서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습니까? 잊혀지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죽음을 잊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잊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평상시 살아가면서 죽음과 상관없는 사람마냥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잊고 살면, 꼭 영원하지 않은 무언가에 묶이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사니까, 정작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보다 돈 버는게 중요해지지 않습니까?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면, 내가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음을 한탄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답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음을 매순간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요, 그렇다고 죽음을 잊고 사는 것도 안됩니다. 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빠졌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소망할 수 있습니까? 이겼다고 말해도 지고, 졌다고 해도 지는, 이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어찌 삶을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과 세계는, 이 죽음 속에 영영 그치는 결말을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까? 


  희망은 하나입니다. 말 그대로 희망은 하나(一)입니다. 그치는 사람이 하나를 만납니다. 이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소망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를 만나면, 그치는 사람이 충격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꺼져가는 인생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길은 바른 길입니다. 올이 바른(正) 길입니다. 정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온통 그치는 것 투성인 땅을 따르지 않고, 한 길, 하늘을 따라갑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온통 그치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모으고, 합치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이 하나를 소망하는 사람은 그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날마다 순간순간 바름을 찍어나갑니다. 이것이 곧 영광입니다. 하나와 하나되어, 매순간 바름을 찍어나가는 삶, 그래서 그치는 세상 속에서 그치지 않는 것을 내 몸으로 드러내는 삶. 그래서 결국 끝내는 죽음을 이기는 삶.


  그러나 이것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하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짜먹으려는 사람들 역시, 사람들이 물질에 매이는게 좋지, 이 하나를 찾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를 따르면 아무에게도 굴복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짜먹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재 정권들은 국가를 막론하고, 성경보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래서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고 하면, 성경 보는 사람들은 이것에 반대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저런 말로, 지식으로 꼬득여서, 내가 너를 지배해도 괜찮다고 정당화시키는 짓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림이 이렇게 됩니다.


  그치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안죽으려고 합니다. 안죽으려고 한다는 말은, 자기 생존, 우리 생존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는데, 안움직이려고해요. 그 자리에 눌러 앉아 땅을 잔뜩 차지하려고만 해요. 허나 이렇게 살아봐야,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지만, 이것 역시 이겨도 지는 게임입니다. 다 죽을 것 아닙니까?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순간 순간이, 영원한 것을 붙잡아, 죽음을 극복하는 삶이 아니면, 우리는 대체 어디서 우리 삶의 의미를 찾는단 말입니까?


  스데반이 유대성전을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이라는 성전이, 그치는 사람들이 모여, 안그칠려고 바둥 거리는 혁명가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꼴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하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와 함께 바르게 살아야할 사람들이 서로를 짜먹으며 이렇게 거대한 생존의 피라미드를 만든 것입니다. 이 유대성전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이 속에서 제사 드리느라 늘 바쁜 사람들이지만, 정작 이 성전을 통해 이 땅에 벌어지는 다스림은, 소외자를 만드는 다스림, 너와 내편을 만드는 다스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라 부르는 그 분의 다스림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 즉 완전한 사람, 완전한 세계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그 분의 시간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들은 건물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굳었습니다. 멈췄습니다. '사람'이 되기 전에 '땅'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민족이라며,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대로는 살지 않으면서도, 이 성전에서 예배만 드릴 수 있으면 된다는 허망한 생각들을 낳았습니다. 허나 되긴 무엇이 됩니까? 


이사야 1:12~15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자기 생존에 눈에 어두워서, 땅 많이 차지할 생각이나 하고, 그렇게 성전이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었으니 바벨이 따로 없습니다. 성전이, 성전에 들어올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갈라놓는 38선이 되었고, 나중에는 로마와 유혈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작당 모의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 자랑하던 그 건물이, 하나님의 약속을 전면으로 거절하는, 배신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서 예배한다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면, 가짜 평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 다음 줄에 나옵니다.


이사야 1:16,17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하나님과 하나되어, 한 뜻으로, 우리의 몸을 사용해서, 정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럼 영광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를 통해 드러나시니, 그 다음 감사입니다. 즉, 건물 아닙니다. 회반죽을 발라놓은 돌 덩어리가 하나님 다스림의 중심일 수 없습니다. 손으로 발라 만든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그 분은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디에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땅을 사람을 통해 다스리십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한 집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니 집단에서의 안정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땅 위에 무언가 지어놓고, 그 속에서 '나는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지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늘에 기대야 합니다. 그 분이 내 속에 들어와 앉아 계시니 평안합니다. 인간은 속이 깨져서 뭘 넣어도 만족할줄 모르고, 끊임없이 욕망합니다. 깨진 독과 같은 내 속에 들어와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나의 두꺼비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 분으로 인해 만족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와 하나되어, 바름을 찍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 그 사람은 씻은 사람입니다. 씻은 사람은 곧 성인입니다. 거룩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치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되었으니, 그 사람 속에는 하나가 있습니다. 하늘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 속에서 들리는 마음의 소리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말합니다. 그리고 행동합니다. 하늘의 소리를 제 속에서 듣고 말하니 곧 이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씻어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1) 하나님이 나와 함께, 2) 하나님이 나를 통해, 3)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약속을 이뤄가심을 압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과 함께, 나는 하나님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위해 약속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몸을 통해서, 하늘이 땅에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서 이뤄진 것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도대체 무엇이 이뤄졌단 말입니까? 


요한계시록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하늘에는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말은 형제들을 고자질하던 자가 쫓겨났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하늘에는 고자질쟁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늘에 이루신 바입니다. 하늘의 차원에서는,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지적하고, 붙들고 늘어져 누군가 처벌을 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없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처벌을 당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을 안한다는 말입니다. 원래 사탄이 그러한 일을 했었는데, 그리스도의 권세가 그 사탄을 이겼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상대의 잘못을 찾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서 부당함을 끌어안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입니다. 타인을 위해 부당함을 끌어안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로 인해 하늘에 이뤄졌습니다. 


  땅으로 돌아옵시다. 무수한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이 어린 양 예수를 따라, 아무도 정죄하지 않고, 스스로 부당함을 끌어안으면서 이 땅의 문제들을 해결해왔습니다. 이 일에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스데반도 이러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이 내 속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 하늘에서 이룬 것이 그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서도 이뤄집니다. 정죄가 아닌 사랑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흙으로 솥만들고 나뭇잎 그릇으로 아기자기 만들더라도, 엄마가 부르면 가야 합니다. 소꿉장난 하다가 친구들끼리 싸웠다 칩시다. 이런 문제를 누군가를 처벌해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까? 아닙니다. 가끔 친구 엄마가 나타나서 내 머리를 쥐어박고, "너 왜 그러니!"하고 쏘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얼마나 서럽던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엄마고, 남의 아들들은 혼낼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까, 다 엄마 자식들인거 있죠?


  잘못한 상대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당할수록 더 성을 내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가 혼날까봐. "나 안그랬거든. 내가 그랬지만 그건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거든!" 변명과 핑계와 자기 정당화가 이어집니다. 옳고 그름의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에덴에서 하나님으로부부터 그 뜻을 몸에 익혀나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품으세요. 그럼 정죄가 아닌 모두를 품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이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8:10~12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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