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1~7:19


[1] 

그러한 날들 속에서 배우려는 이들은 더 많아졌는데, 

희랍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을 향해 불평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속한 과부들이 

매일의 구호 음식 받는 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 둘의 보냄받은 이들은 모든 배우려는 이들을 불러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두고, 

식탁에서 구호 음식 나누는 일을 맡아 하는 것이 뜻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숨님과 몸에 익은 지혜로 가득하여, 

여러분들 중에서 증인될 일곱을 찾으세요.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도록 합시다."


이 말을 모든 사람들이 맞다며 기뻐하고,

믿음직하고 거룩한 숨이 가득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프로코로와, 니카노르와 티몬과 파르메나스와 

안디옥에서 온 유대교 개종자였던 니골라를 선정했다. 

그들을 보냄 받은 이들 앞에 세우니,

보냄 받은 이들은 그들에게 두 손을 얹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났고, 

배우려는 이들의 수는 예루살렘에 차고 넘쳐,

많은 제사장의 인파도 이 믿음에 귀를 기울였다.

스데반은 위로부터의 거저주심과 힘으로 흘러넘쳐, 

큰 기적과 싸인들을 씨알 속에서 행했다.


[2]


그러자 어떤 이들이 들고일어났는데,

퀴레나이스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리베르티노스라 불리는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했다.

그러나 그들은 몸에 익은 지혜와 숨으로 말하는 스데반에게 강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이 때 이들은 사람들을 시켜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속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 


그들은 씨알과 어르신들과 문법학자들과 함께 움직여,

스데반을 덥쳐서 붙잡아다가 공동의회로 끌고 왔다.

거짓 목격자들을 세워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이 사람이 그 거룩한 장소와 율법에 반대되는 말을 쉴새없이 늘어놓더군요.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가 '나사렛 출신 예수가 그 거룩한 장소를 무너뜨리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준 삶의 습관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공동의회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대제사장이 말했다.


"저 말이 정녕 그러한 것이냐?"


[3]


스데반이 말했다.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뚜렷이 드러나셨습니다.

그가 하란에 머물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내가 네게 보이는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하란에 가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를 하란에서 지금 당신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옮기셨는데,

하란 땅에 있을 때는, 그에게 발붙일 만큼의 밭 한뙈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에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얻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고,

그와 더불어 그의 씨에게도 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씨가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이 그 씨를 종으로 삼아, 400년을 괴롭게 하리라.'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겠고, 

그 후에 그들은 거기서 나와 이곳에서 나를 섬기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고, 

이삭은 야곱에게 또 야곱은 열두 족장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족장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다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모든 압제에서 그를 건져내시고,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면전에서 그에게 카리스와 소피아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요셉을 이집트와 자신에게 속한 모든 집을 이끄는 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온 이집트와 가나안에 찾아와 큰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먹을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이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거기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다시 갔을 때에,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알리니, 

이 일로 말미암아 요셉의 가족 관계가 파라오에게 드러났습니다.

요셉이 사람을 보내서, 그의 아버지 야곱과 

모든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함께 불렀습니다.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그도 거기서 살다가 죽고, 

우리 조상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세겜으로 옮겨서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브라함이 세겜의 하몰 자손에게서 은을 주고 산 무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을 때,

그 씨알이 늘어나 이집트에 넘치도록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집트 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우리 겨레에게 교활한 정책을 써서, 우리 조상들을 괴롭게 하고,

갓난아기들을 내가 버리게 해서 못 살게 했습니다.


0.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예수행전 성령행전'이라 부르자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께서 등장하지 않으시면서도, 사람들은 그이의 이름을 말하고, 그이의 이름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은 사람의 밖에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속에 있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숨.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가진 이들은 안과 밖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그 하나님의 숨결로 삽니다. 오늘 우리 역시 그이의 이름으로, 그이의 숨결로 살아가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아직 숨을 받지 못했다면, 이 책을 통해 미리 숨을 만납시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을 믿어, 나도 이 숨을 달라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도덕의 근원이자, 존재의 토대이신 그 분께서 우리에게 숨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의 유혹들을 떨쳐버리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곧 인자의 걸음입니다.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곧장 나아가는 한 길은 숨 길입니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여, <사도행전>이 여러분 눈 앞에 있습니다.


1. 언약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그러한 숨 쉬는 사람들이 모인 언약 공동체에서도 매일 하하호호 웃으며 흘러가지 않습니다.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때로는 사람들끼리 의견이 부딪치곤 합니다. 


그러한 날들 속에서 배우려는 이들은 더 많아졌는데, 

희랍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을 향해 불평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속한 과부들이 

매일의 구호 음식 받는 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 둘의 보냄받은 이들은 모든 배우려는 이들을 불러 말했다.


  언약 공동체가 그 동네 과부들을 모두 먹여 살렸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회 최하층민이었던 과부를 살려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과정 속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는 사람을 돕기에 더 수훨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히브리말을 쓰는 과부들은 구호음식을 제때 제때 받았는데, 희랍말을 쓰는 과부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냄받은 이, 즉 사도들은 배우려는 모든 사람들, 즉 모든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언약 공동체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할까요?


  언약 공동체는 세상이 결코 꿈꿀수도 없는 탁월한 정치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정치 시스템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먼저는 한 사람의 통치자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 그 통치자 중심으로 일을 처리하는 군주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권한을 주는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 제도입니까? 군주제보다 민주제가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모든 정치제도들은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군주제는 빠른 의사결정과 대처가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제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모은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정책결정 과정이 느리고, 상황에 재빠르게 대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 공동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끄는 자들이 강제로 무언가를 명령을 내린 것입니까? 아니면, 따르는 자들이 이끄는 자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것입니까? 언약 공동체는 군주제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언약 공동체가 민주제일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의견보다 더 중요한 의견이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 공동체는 '군주제 + 민주제'입니다. 한 분의 군주가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자기 목숨 내어놓을만큼 사랑하시는 군주이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온 땅의 절대적인 군주이십니다. 군주제라 얘기해서 얼굴을 찌뿌릴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우리의 군주가 계시다는 것은, 그 아래 사람들은 모두 어떻다는 것입니까? 평등입니다. 여기에는 대통령이든, 목사든, 그런 것 없습니다. 모두 하늘의 군주 아래서 자기 몫의 삶을 가지고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 하나 의견을 묵살할 수 없습니다.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민주제의 약점을 돌파합니다. 소수도 다수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늘에 계신 군주 아래서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대화와 토론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러니 민주제입니다. 더불어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군주의 다스림  속에 있으니 군주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두고, 

식탁에서 구호 음식 나누는 일을 맡아 하는 것이 뜻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숨님과 몸에 익은 지혜로 가득하여, 

여러분들 중에서 증인될 일곱을 찾으세요.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도록 합시다."


이 말을 모든 사람들이 맞다며 기뻐하고,

믿음직하고 거룩한 숨이 가득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프로코로와, 니카노르와 티몬과 파르메나스와 

안디옥에서 온 유대교 개종자였던 니골라를 선정했다. 

그들을 보냄 받은 이들 앞에 세우니,

보냄 받은 이들은 그들에게 두 손을 얹었다.


  이 사람들의 판단을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보냄받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하는 일이 너무 많으니, 과부들에게 구호 식품을 나눠주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맡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7명을 선출해서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배우려는 사람들은 기뻐하며 일곱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그 다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뽑았습니까? 다 희랍사람입니다. 희랍 과부들을 돕지 못해서 희랍말을 쓰는 사람들이 서운해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그저 뽑은 것이 아니라, 이 속에는 위로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의 식구들은 피해자였던 희랍 사람들에게 이 일을 온통 맡겼으니 말입니다. 의견을 낸 사도들이나, 그 의견에 이렇게 반응한 제자들이나, 언약 공동체에는 탁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사람답게 살기에 탁월한 원칙들을 스스로 창초해나가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 만들기가 이토록 힘겨운 난항을 겪고 있는 이 나라와 달리 말입니다. 보냄받은 이들은 이 선출된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경을 따라서 일곱 사람을 선출하려고 합니다. 내년에 청소년부로 올라오는 일곱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멘토가 되어줄 섬김이들을 선출해서, 그 아이들이 청소년부 공동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최서영, 백지원, 임한나, 권태민, 권태진, 손승현, 진수용.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났고, 

배우려는 이들의 수는 예루살렘에 차고 넘쳐,

많은 제사장의 인파도 이 믿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말씀이 자라납니다. 이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말씀은 정말 자라납니다. 모두가 말씀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결정하며, 실제적으로 삶을 이뤄나갈 때, 눈에 보이지 않던 의미가 눈 앞에 드러나는 실체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몸입니다. 움직이는 유기체입니다. 곧 생명이요, 삶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당신의 신실함 속에서의 공동생활이 

모든 좋음을 깨닫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 '좋음'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인데, 다른 사람들이 이 좋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공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삶이, 그 하나님의 좋음을 깨닫게 하는 힘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이 좋음이 있으며, 이 좋음을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됩니다. 


2. 거저주심, 힘, 몸에 익은 지혜, 숨


  <사도행전>은 그렇게 뽑힌 사람들 중에서 '스데반'이라는 사람의 삶에 주목합니다. 이 사람은 목사도 아닙니다. 전도사도 아닙니다. 흔히 7집사 중 한 명이라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아까 봤던 일곱 사람 뽑는 이야기에는 '집사'라는 말이 안나옵니다. 하여간 스데반은 언약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한 사람입니다. 그의 삶을 들여다 봅시다.


스데반은 위로부터의 거저주심과 힘으로 흘러넘쳐, 

큰 기적과 싸인들을 씨알 속에서 행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이 들고일어났는데,

퀴레나이스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리베르티노스라 불리는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했다.

그러나 그들은 몸에 익은 지혜와 숨으로 말하는 스데반에게 

강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위로부터의 거저주심과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개역성경에서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로 되어있습니다. 사람들 속에는 '올'이라는게 있습니다. 이 '올'이라는 말을 도덕이라 해도 좋고, 양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하여간 마음 속에 옳은 것을 찾는 씨앗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 이 올을 가지고 있지만, 이 올이 곧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올을 가지고 있으나, 이 올은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온통 굽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있는 이 올이 굽었을 때를 가리켜 악(惡)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올'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도 나옵니다. 씨가 떨어졌는데, 땅이 딱딱하고, 혹은 돌이 있고, 혹은 가시덤불이 있어 이 올이 올곧게 자라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여간 인간은 이리 난처한 경우입니다. 올이 있는데, 올이 똑바로 자랄 수 없는 지경에 모두 빠져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심할 수는 있습니다. 속에 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일을 가기 어렵습니다. 올이 똑바로 자라질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올을 잡아서 곧게 펴주어야 합니다. 마치 곱추의 굽은 등을 교정하듯, 이 굽어버린 올을 똑바로 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거저주심'이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올을 곧게 펴주어 자라게 해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왜 내 속에 있는 올을 곧게 해주는 것을 거저주심, 은혜라 부르느냐, 아무런 댓가없이 그저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맞추는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 속에 있는 올을 더 욕망에 따라 굽게할 뿐,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능자의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의 굽은 올을 다시 일으킵니다. 예수를 부활시킨 그 힘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곧게 일어선 올은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은 도덕적인 힘입니다. 인격적인 힘입니다. 옳은 바대로 실천하고, 타인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스데반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속의 올을 바르게 해주셨고, 그 힘을 따라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씨알들은 스데반이 외국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닮고자 했습니다. 사실 우리 속에서부터 닮고 싶은 사람은 올바른 사람아닙니까?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우리는 올바른 사람을 찾느라 정치권 밖을 뒤집니다. 정치권 안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까 밖에서라도 뒤져봅니다. 그래서 문국현이든, 안철수든 정치에 무관했던 사람들이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곤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사람들은 다 속에서 올바른 사람을 찾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씨알들도 스데반을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올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올바른 사람들은 삶에 고난이 있습니다. 스데반의 명성이 멀리에도 퍼졌는지,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스데반과 논쟁을 하고자 했습니다. '논쟁'은 두 패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뭘 가지고 싸웁니까? 말 가지고 싸웁니다. 결국 하자는 것은, '내 말이 맞고 너는 틀렸다'는 것을 결론내자는 것입니다. 말로 자기 정당성 삼는 사람들은 죄다 빈껍데기입니다. 결국 속이 텅텅 비었으면서, 말 가지고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런 말쟁이들을 압도합니다. 자기 정당성을 위한 말로 하는거 아닙니다. 스데반은 지혜가 몸에 익어서 속이 꽉 찬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정당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참된 것을 모든 사람을 아우르며 말할 수 있습니다. 말쟁이들은 이런 사람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3. 진실을 질식시키는데 이용당하는 사람들 : 씨알, 어르신들, 학자 및 종교인


  그런데 위기는 점점 커집니다. 자신들의 껍데기같은 말로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으니, 이 사람들은 고전적인 방법을 써서 스데반을 이겨보려고 합니다. 바로 거짓 선동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고용해서 거짓을 말하게 합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돈으로 매수되었을 것입니다. 진실보다 돈이 중요한 사람들의 얼굴은 살인자의 몽타쥬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죄 없는 사람을 질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속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 


그들은 씨알과 어르신들과 문법학자들과 함께 움직여,

스데반을 덥쳐서 붙잡아다가 공동의회로 끌고 왔다.

거짓 목격자들을 세워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인류의 끔찍함을 봅니다. 그 끔찍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신의 무언가를 이루려는 야심말입니다. 세계의 큰 전쟁들은 모두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이슬람을 말살하리라는 십자군 전쟁이 그러하고, 유대인들을 다 죽여버리겠다는 2차 세계대전의 독일이 그러하며, 심지어 징기스칸 역시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 할 때 역시, 자신의 행위를 '성전(聖戰)'이라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글자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일에 이용당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씨알들입니다. 글자 때문에 선동당하여,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씨알이 목청을 높입니다. 우리는 불과 60여년전에 그깟 글자로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상이 아무리 잘 짜여져있다 한들, 숨 쉬며 살아가는 한 사람 귀한 줄 모르면 그게 어디 쓸만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무지한 씨알이 자꾸 이용당합니다. 씨알을 이용할 때 늘 써먹는 것은 생존입니다. "너희의 생존이 위협당하니까 어서 싸워야 해!" 이렇게 말합니다. 





  앞 부분에 등장하는 여학생의 말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으키는 전쟁이기 때문에, 그 전쟁을 반대하는 하워드 진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이 학생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나의 생존, 나의 나라의 잘됨이 다른 나라 사람의 목숨보다 더 큽니다. 이것을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면 그것으로 좋은 국가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국가에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전쟁인데도 말입니다. 하늘의 군주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이것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차원의 무언가 옳은 것을 붙잡지 않으면, 이것을 어찌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보이지 않는 한 분을 붙잡는 씨알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에 붙잡혀도 안됩니다. 자기 생존에 붙잡히는 건 더더욱 안됩니다. 보이지 않는 한 분만이, 모든 국민에게 주권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의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신 것은 민주주의가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시작인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미국의 독립혁명은 모두 "양도할 수 없는 천부께서 주신 인권"을 그 시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천부인권을 풀어보면 무엇이 됩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인간다움의 권리'가 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초석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혁명만은 길을 달리 갔습니다. 1789년에 벌어진 프랑스 혁명입니다. 프랑스 혁명에는 천부가 없습니다. 어떤 신도, 어떤 권위도 거부한다고 벌어진 혁명입니다. 아무 내용도 없는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며 씨알들은 권력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선출된 국민의 대표는 유럽을 전쟁통으로 몰아넣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지금도 프랑스 혁명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 후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민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이들이 우리의 전도대상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참으로 '민주'를 이룰 수 없음을 그들에게 역설해야 합니다. 누가 말입니까? 언약 공동체의 삶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다시 <빌레몬서>를 인용합니다.



당신의 신실함 속에서의 공동생활이 

모든 좋음을 깨닫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 '좋음'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이용되는 사람들이 어르신들입니다. 이런데 이용당하는 어르신들은 대체로 요즘 것들과 자신들을 금그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지켜오던 전통적 가치에 위협이 되는 것이 있다 싶으면 언제든지 들고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선동 당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도 분명히 나중에 어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것들은 말이야" 이 따위 소리 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야 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요즘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하고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이것으로 편을 나누면, 분명히 권력놀음에 이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삶에 있어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보수'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수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엇을 지키느냐' 입니다. 어른으로서 자기 입지를 지키려고 했을 때, 그러한 보수는 썩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자기 생존이 아닙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 지를 예수께 배우자는 것이 기독인입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인들과 학자들입니다. 이 글자를 가지고 밥벌이 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의견을 지지해줍니다. 그러니 글자 가지고 싸우려고 하면 안됩니다. 글자보다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지킬 것은 사람입니다. 글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글자로 이루어진 사상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이 그 영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글자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옷은 시대를 따라 계속 새로운 옷을 만들어갔고, 또한 옷을 여러 차례 바꾸어 입었습니다. 이 옷이 '나'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옷이 나라고 하면,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이러한 옷만 입어야 해! 라고 주장하면 안되지요. 옷은 계절에 따라 바뀌어갑니다. 그럼에도 그 옷을 입는 나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숨으로 만나는 이 위대한 경험을 글자로 환원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 이번 주면 우리 고 3학생들이 수능을 볼 것입니다. 간곡히 부탁드리는 말씀은,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공부여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진실을 없애는 지저분한 일에 선동당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생존'입니다. 자신들의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더니, 그 생존을 위협한다는 일에 쉽게 들고 일어섭니다. 학자들, 언론인들, 종교인들은 이 사회라는 몸의 신경망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제대로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사회는 눈 먼 사회가 됩니다.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그 죽음에 굴복한 소리가 생존의 소리요, 생존이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문제라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생존보다 더 큰 하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곧 생명입니다. 내 속에서 시작된 부활의 생명이, 세계와 우주의 완성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으로 넘치는 결말입니다. 수능은 이 하나님의 큰 그림에 이용되어야지, 우리가 시험에 이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듯, 사람은 수능의 주인입니다. 내 생존은 수능시험 점수를 떠나서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그러니 살리기 위해 공부하고, 살리기 위해 시험보고, 살리기 위해 계획하고, 그렇게 살림을 사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생존을 뒤로하고 살리고자 했을 때, 선동 당할리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선동당하지 않는, 이 사회의 신경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회에서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살리기 위해 살고자 대학 마저도 이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말쟁이가 되고자, 그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점유하고자 시험본다면 그것처럼 비인간적인 것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다들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A.D. 1세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씨알들과, 어르신들과, 종교인들과 학자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이 사람이 그 거룩한 장소와 율법에 반대되는 말을 쉴새없이 늘어놓더군요.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가 '나사렛 출신 예수가 그 거룩한 장소를 무너뜨리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준 삶의 습관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공동의회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대제사장이 말했다.


"저 말이 정녕 그러한 것이냐?"


  이 논쟁이 아직 결판이 안났습니다. 예수는 진정 성전을 무너뜨리시는가? 예수는 진정 율법을 없애버리시려는가?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이라는 장소 없이도 되는가? 율법이라는 글자 없이도 되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질문을 자신들의 삶에 대한 위협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율법을 고친다는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것이고, 스데반도 지금 같은 혐의로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사람들이 예수와 자신을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오해에 대해서 이제 해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

4. 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

스데반이 말했다.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뚜렷이 드러나셨습니다.

그가 하란에 머물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내가 네게 보이는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하란에 가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를 하란에서 지금 당신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옮기셨는데,

하란 땅에 있을 때는, 그에게 발붙일 만큼의 밭 한뙈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에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얻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고,

그와 더불어 그의 씨에게도 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씨가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이 그 씨를 종으로 삼아, 400년을 괴롭게 하리라.'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겠고, 

그 후에 그들은 거기서 나와 이곳에서 나를 섬기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고, 

이삭은 야곱에게 또 야곱은 열두 족장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족장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다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모든 압제에서 그를 건져내시고,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면전에서 그에게 카리스와 소피아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요셉을 이집트와 자신에게 속한 모든 집을 이끄는 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온 이집트와 가나안에 찾아와 큰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먹을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이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거기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다시 갔을 때에,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알리니, 

이 일로 말미암아 요셉의 가족 관계가 파라오에게 드러났습니다.

요셉이 사람을 보내서, 그의 아버지 야곱과 

모든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함께 불렀습니다.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그도 거기서 살다가 죽고, 

우리 조상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세겜으로 옮겨서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브라함이 세겜의 하몰 자손에게서 은을 주고 산 무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을 때,

그 씨알이 늘어나 이집트에 넘치도록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집트 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우리 겨레에게 교활한 정책을 써서, 우리 조상들을 괴롭게 하고,

갓난아기들을 내가 버리게 해서 못 살게 했습니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