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2~60

  "남자 형제들이여, 그리고 아버지들이여, 들으시오.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목격되었습니다, 

그가 하란에서 거주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말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그 땅으로부터, 

  너의 그 가족들로부터 떠나라,   

  지금 내가 너에게 보여줄 그 땅으로(εις).“


  그때 그 갈대아인들의 땅으로부터 떠나서 하란에서 거주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하나님은 그를 

여러분이 지금 거주하고 있는 바로 이 땅 속으로 집옮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 땅 안에서 상속을 주지 않으셨고
두 발의 안정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알리셨습니다, 

그에게 그것을 그와 그와 함께 하는 그 씨에게 상속 속으로 주시겠다고, 

그에게 자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셨습니다, 


  "그의 그 씨가 다른 곳에서 거하는 자가 될 것이고, 

  그들이 그 씨를 노예삼고 압제할 것이다, 400년 동안.

  그리고 노예삼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할 것이며,"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그것들 이후에 그들이 나올 것이고 나에게 예배할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그리고 그는 그에게 할례의 계약을 주었고 

그렇게 그는 그 이삭을 낳고 여덟번째 날에 그를 할례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그 야곱을, 그리고 야곱이 그 열 두 족장들을.

그리고 족장들이 그 요셉을 질투하여 이집트 속으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환란들의 모든 것들로부터 그를 뽑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거저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 앞에서,

그리고 파라오는 그를 이집트 위와 파라오의 온 집 위에 이끄는 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온 이집트와 가나안에 왔고, 큰 환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은 먹을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곡식들이 있다고 듣고서 이집트 속으로
우리의 아버지들을 처음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인지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에게 그의 그 일가친척(το γενος)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사람을 보내서, 자신의 아버지 야곱과 

모든 동류(συγγένεια)를 함께 불렀습니다, 75 프쉬케들 안에서,

그리고 야곱이 이집트 속으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와 우리의 아버지들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겜 속으로 옮겨놓였고 그 무덤에 놓였습니다.
(그 무덤은 아브라함이 세겜 안에서 하몰의 아들들 곁에서 은의 가치로 샀던 것이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그 알림의 시간(
χρόνος)이 가까이 붙었던 것처럼, 

그 씨알이 이집트 안에서 커져서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 다른 왕이 위로 설 때까지, 그 요셉을 모르는.
그는 우리의 그 일가친척을 교묘하게 다루어 그 아버지들에게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이 아기들을 그들로부터 던지게 만들어서

그 생존하지 못하게 함 속으로.


바로 이 카이로스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세련된(ἀστεῖος)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3개월 동안 그의 아버지 집 안에서 양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밖에 두었을 때 글르 파라오의 딸이 들어올렸고
그를 그녀에게 속한 아들로(εις) 양육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 안에서 교육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들과 그의 일들 안에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40년의 크로노스가 채워졌을 때, 

그는 걸어 올라갔습니다, 

자신의 그 형제들, 곧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돌보는 그의 가온 위로.

그리고 불의함 당하는 어떤 이를 보고 막아섰고

그 고통당하는 이에게 갚아줌을 행하여 

그 이집트 인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통해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다'에 함께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들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붙어있는 날에 그는 싸우는 그들을 보고 

그들을 평화 속으로 화해시키며 말하길, 

  '남자들아, 너희들은 형제들이다.
  어째서 너희들은 서로에게 불의하는가?'


  그런데 이웃에게 불의한 이가 그를 떠밀며 말하길,


  '누가 너를 우리 위에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너는 나를 들어올리지 말아라, 
  너는 네가 어제 그 이집트인을 들어올린 그 방식을 원하느냐?'

  그런데 모세는 바로 이 말 안에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마디암 땅에서 떠돌이(
πάροικος)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두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천사가 시내 산 광야에서 가시나무 떨기 불길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가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두려워서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학대받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다. 

이제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내니, 너는 가거라.'


이 모세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하고 배척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모세를 가시나무 떨기 속에 나타난 천사의 능한 손길을 붙여

지도자와 해방자로 세워서 그들에게로 보내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집트 땅과 홍해에서 놀라운 일과 표징을 행하여 그들을 이끌어냈으며,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도 그러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세우신 것과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회중으로 모여 있을 때에, 

시내 산에서 그에게 말하는 천사와 우리 조상들 사이에 중개자가 되어서, 

산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를 제쳐놓고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십시오.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온 그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두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내버려 두셔서,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가문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 

희생물과 제물을 내게 바친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몰렉 신의 장막과 렘판 신의 별을 받들었다. 

그것들은 너희가 경배하려고 만든 형상들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바빌론 저쪽으로 옮겨 버리겠다.'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 살 때에, 그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지시하신 대로 만든 것인데, 

모세가 본 모형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장막을 물려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땅을 차지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그것을 그 땅에 가지고 들어왔고, 

다윗 시대까지 물려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므로,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거룩한 숨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거룩한 숨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호흡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0. 


  스데반은 끌려 왔습니다. 그가 끌려온 혐의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고치려 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성전을 무너뜨리려고 했다는 점. 이 두 가지 혐의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지난 주 스데반이 들었던 마지막 말은 "그 말이 사실이냐?" 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전에 여기있던 몇몇 친구들과 <소라야의 죽음>이라는 영화를 함께 본 일이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소라야'라는 여자는 중동에 사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서, 투석형에 처해집니다.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성모독에 대한 처벌은 투석형이었습니다. 나는 깨끗한데 너는 더러우니, 내가 먼 발치에 떨어져서 너를 손대지 않고 돌을 던져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의 상황이 지금 이러한 상황입니다.


  만약 저라면, 내가 돌 맞아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열심히 항변할 것입니다. 할 말이 없는게 아닙니다. "너 율법을 고치려고 했지?"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거에요. 없애려는게 아니라 오히려 진짜 지키려는거에요!" 성전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건물 성전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말하는거에요. 그 몸이 부활한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정신없이 막 얘기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다릅니다. 정신없이 변명하기는 커녕 옛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들을 이야기로 끌고 갑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옛날 이야기라니요! 


1. 영광의 하나님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영광의 하나님'.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부터 시작되는 큰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무슨 뜻입니까? '영광'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은 차원'이 '보이는 차원'에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는 사람의 차원,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차원은, 하나님의 차원 속에 있습니다. 즉 땅은 하늘 속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하늘의 차원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베일이 벗겨지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이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계시(revelation)'하십니다. 계시라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re'는 벗긴다는 말이고, 'velo'는 라틴어로 '베일', '덮개'라는 의미입니다. 감추었던 하늘의 차원이, 이 땅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영광'은 세계를 두 차원으로 가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차원과 그렇지 못한 차원입니다. 서양철학은 계속 '있음'의 지평을 넓혀가는 방식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그래서 '뭐가 있냐?'를 묻고, 거기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주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물질에도 이름을 붙이고, 인간 심리에도 이름을 붙여가면서, 인간과 세계의 있는 것들을 연구해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있는 것만 있냐는 것입니다.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없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몰아세우고, 업신여기면 안됩니다. 오늘날 이렇게 하니까, 눈에 안보이는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람살이에서 무시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 정의, 평화, 진실이 눈에 보이는 돈 보다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다 서양철학 때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눈 돌아가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니 말입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말이 곧 영광입니다. revelation입니다. 이 말도 참 신기한 말입니다. '계시'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그 두 차원 사이에 얇은 막이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입니다. 이 막을 베일이라 부르는데, 이 베일이 vela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얇은 막 때문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막을 걷어버립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차원이 온통 드러납니다. 그럼 re.velation 입니다. 그래서 계시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성경을 읽는다는 사람들도 기적과 계시를 그냥 우리 일상의 차원으로 떨어뜨려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전 본 책에서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장면을, 야곱이 두려움과 싸우는 심리작용이라 설명해놨습니다. 아니,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과 씨름할 수가 없습니까? 모든 것이 가능한 분에게 기적과 계시는 불가능이 아닙니다. 그 분의 소통방식이 우리의 일상을 초월할 수 있다는 건, 그 분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거 아닙니까?


  스데반은 엄청 큰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제 아브라함을 이야기에 등장시킵니다. 


2. 아브라함과의 약속 : 땅이 아니라 사람 문제


  하늘의 차원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의 차원에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럼 무엇때문입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몸소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계시하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를 생각해봅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이들을 죽음의 노예로 만든 타락의 역사가 그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타락을 뒤집기 위함입니다. 


  그럼 타락을 뒤집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흔히 '언약 성취'라는 말을 쓰지만, 쉽게 말하면 '말지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 라고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심'으로 이 타락을 해결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말한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악을 해결하시는 방법입니다. 말씀으로 온우주를 지으신 그 분의 말은 곧 이뤄짐입니다. 우리의 낙담과 실망은 우리의 말과 행동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말하지만, 행동하지 못합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인간사의 뒤틀림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말한대로 이루십니다. 여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말'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 '땅'이 있었습니다. 그 '땅' 주실 것을 믿고서 아브라함이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말을 이루시리라 신뢰하여, 아브라함은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말합니다. 


그 땅에 있을 때, 그에게 발붙일 만큼의 밭 한뙈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에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얻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고,

그와 더불어 그의 씨에게도 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정작 받은 땅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죽음의 위기 앞에서 왜 이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혈안이 되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땅, 가나안을 지키기 위해서 당시도 로마에 맞서 투쟁했고, 오늘날도 이 가나안 땅은 피비린내가 나는 전쟁의 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땅을 지키는 문제가 목숨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은 그 땅을 약속 받았으나, 그 땅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노골적으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갑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이 땅의 소유주가 아니었는데, 왜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도 얻지 못한 땅인데? 


  땅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묘한 암시를 가지고 스데반은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정작 이스라엘이 땅을 얻는다해도 뒤집힐 타락이 아닙니다. 이제 스데반은 이 타락을 뒤집는 문제가 땅 문제가 아닌, 사람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은 밭 한뙈기 얻지 못했으나,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왜 영광의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땅은 못얻었는데, 자식은 얻었단 말입니까? 이유는 하나죠. 타락을 뒤집는 문제는 땅문제가 아니라, 사람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땅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약속의 사람들'이 준비됩니다. 바로 출애굽입니다.


3. 출애굽 이야기 : 떨기나무 같은 사람


  그렇게 남의 땅에서, 언약의 아들들이 준비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대한 성경의 표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즉 아브라함 약속이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살면서도, 히브리 사람들은 계속 불어났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타락을 뒤집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이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스데반이 붙잡혀온 이유도 이 지도자를 거절한다는 혐의로 온 것이니까요. 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그런데 이 모세에 대해서는 스데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족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의 편을 들어, 이집트 사람을 때려 죽여서, 

압박받는 사람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동포가 하나님이 자기 손을 빌어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애시당초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집트 관리를 죽였던 그 시절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고 스데반은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또 나를 그렇게 죽이려 하는가?'


  즉 스데반은 모세는 '버림받은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따르고 좋아하는 모세조차도 처음에는 버림받은 지도자였습니다. 마치 어떤 이와 같이. 그리고 스데반은, 그 옛날 출애굽의 지도자를 몰라봤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지금도 몰라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버림받은 지도자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나 40년간 시내산 광야에서 살적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붙은 떨기나무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타지 않고,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기묘한 일이었습니다. 앞에서 했던 말로하면,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하늘의 차원이 땅에 드러난 것입니다. 즉 하늘과 땅이 만난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역사는 이어져 내려와, 이제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셨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을 이루시려 하십니다. 언약의 사람들, 이 사람들을 통해 타락을 뒤집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버리지 않습니다. 스데반도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무어라 말합니까? 그가 '산 말씀'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스데반은 자신의 혐의 중 하나, 모세의 율법을 망치려했다는 혐의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모세는 산 말씀을 받아다가 이스라엘에게 왔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은 그 산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가고 싶어했으며, 심지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며 즐거워했습니다. 율법을 망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버림받은 지도자 모세입니까? 아니면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입니까? 버림받은 만왕의 왕 예수가 율법을 망쳤습니까? 아니면 그 예수를 죽인 사람들입니까? 지금 돌로 맞을 위기에 처한 스데반입니까? 아니면 율법대로 하겠다며 사람을 돌로 쳐 죽이겠다는 이 사람입니까? 


4. 성전의 정체


  스데반은 이제 성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성전은 본래 장막이었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은 건물을 짓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지시받은대로 이 이동식 텐트를 만들어, 그 장막을 통해 하나님 계심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 장막 안에만 계시다는 말 아닙니다. 그 장막을 통해 하늘과 땅이 만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막을 '증거의 장막'이라 불렀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고, 그 보이지 않는 차원이 이 보이는 차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거하는 장막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때에 와서 장막은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충격적인 오해가 발생합니다. 하늘과 땅의 접점이 되어야 할 성전은, 오히려 하늘을 가둔 감옥이 되었습니다. 거기 살면서 자신들이 하늘인척 하며 사람들을 짜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결국 스데반이 하고픈 말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거룩한 숨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스데반의 이야기가 영광의 하나님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이 말을 마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 계신 하나님이 그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 하나님의 오른쪽에는 인자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래서 그가 말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는 마치 불붙은 가시나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그를 태우나, 그는 타지 않는 나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스데반을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습니다. 그는 땅에 있으나 하늘을 봅니다. 그럼 누가 참 성전입니까? 지배자들의 건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스데반 자신이 참성전 아닙니까? 


  누가 타락을 뒤집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자신의 약속을 이루십니까? 이러한 사람입니다. 숨님으로 숨쉬는 이, 그의 마지막 말들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 내 호흡을 받아 주십시오"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부터 숨쉬는 이 사람의 숨이 다시 하늘로 돌아갑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끝까지 하늘과 땅을 하나되게 하겠다는 이 사람의 일념이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이 사람은 참말로 부활의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최후 변론_단락 구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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