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난 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보고 있습니다. 이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무게를 단단히 실어놓은 중요한 본문이라 이미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설교라기 보다는 최후변론이라 부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투석형을 당하기 일보직전에 했던 말들이니까요. 


  그 최후변론은 '영광의 하나님'으로 시작되는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낯설지 모르지만, 스데반이 했던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이 믿고, 그 속에서 살던, 익숙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그 앞에 생략해놓은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창조와 타락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의 시작과 그 세상의 뒤틀림입니다. 


  '창조'라 하면 진화부터 번뜩 떠오르지만, 사실 창조 이야기는 진화에 맞서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세상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시아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세상이 그저 그냥 있지 않았고, 분명한 시작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여럿이 생겨났고, 그 여럿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세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뒤틀림입니다. 멀쩡해보이는 세상이 온통 문제투성이가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창조가 하나에서 시작되었듯, 이 문제 역시 한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이 에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꼭 붙들어봅시다. 그래야 이스라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시작되었으나,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바로 이 단어입니다.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신을 뚜렷이 드러내셨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해결은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아브라함을 통해 생겨난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의 문제를 바로 잡고자 하셨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어찌 세상을 바로 잡으시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어제 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사진을 쓰고자 구글을 검색하다가, 스크롤 바를 더이상 내리지 못했습니다. 세이프서치 기능이 켜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들이 너무 잔인하여 보는 것조차 두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사지가 찢겨있는 아이, 머리에 포탄을 맞아 뚫려있는 남자. 이루말할 수 없이 참혹한 현장 사진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의 모습입니다.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로 잡는 방식이 '땅'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이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세계의 모든 질서가 다시 재편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에게 600만이나 학살당한 유대인들에 대한 동정여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동정여론을 등에 업고서, 영국령이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지속적인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땅을 얻고자 말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굳이 팔레스타인 땅이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을 얻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오니즘'이라 포장된, 이 가나안 땅을 얻는 것이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왜곡된 신념때문에, 그들은 굳이 팔레스타인 땅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제 3성전을 짓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무엇을 위함입니까? 땅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과연 땅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는 이 방법이 인간의 타락을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땅을 얻기 위해 싸웠던 것은 이스라엘뿐만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인류의 모든 전쟁은 땅따먹기였습니다. 넓은 땅을 얻고, 그 땅 위에 높은 건물을 세워, 사람들을 계급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열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수한 국가들이 무너지고 세워지고를 반복하며, 어느 나라는 식민지가 되고, 어느 나라는 제국이 되었지만, 결국 과정은 살인이었고, 그 끝은 몰락이었습니다. 분명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하란에 가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를 하란에서 지금 당신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옮기셨는데,

그 땅에 있을 때, 그에게 발붙일 만큼의 밭 한뙈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부르신 그 첫 사람 아브라함은 분명 땅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적에, 그는 가나안 땅 위에 있으면서도 밭 한뙈기만큼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약속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 약속은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땅을 당장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땅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땅은 나중에 받는다 합시다. 그럼 땅을 받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 더 중요한 일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준비하는 것보다 먼저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땅은 바라보게만 하시고,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사람을 길러내셨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주시면서까지 그 약속의 사람 길러내는 일에 하나님은 열심을 내셨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에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얻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고,

그와 더불어 그의 씨에게도 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씨가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이 그 씨를 종으로 삼아, 400년을 괴롭게 하리라.'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남의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종노릇을 400년간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입니까? 왜 하나님은 땅을 먼저 주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 아래서 노예 생활하는 사람들을 먼저 준비하신 것입니까? 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땅 하나 없이, 다른 사람들의 노예 생활하면서 하루하루 무엇을 붙잡고 살아갔겠습니까? 하늘입니다.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고 그 하늘을 붙잡습니다.


출애굽기 2:23 

...이스라엘 자손이 고역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역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어, 하나님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 곧 진정 아버지를 찾은 사람들입니다. 땅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하늘을 붙잡은 사람입니다. 땅은요? 땅은 얻는 게 아닙니다. 주실 그 날 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바보처럼 들립니까? 땅을 붙잡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그저 세상살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기르셨습니다. 허공의 하늘을 붙잡고,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이렇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사람'입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그렇게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이야기를 스데반이 꺼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에 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그 하나님은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땅을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 이야기를 하십니다.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그 땅에서 살기에 합당한 사람을 길러내길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제가 '합당한 사람'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럼 어떤 사람이 합당한 사람입니까? 합당한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고, 진리의 사람이 좋은 사람이며, 좋은 사람이 옳은 사람이겠지요. 다 그게 그거입니다. 그래요,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누구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까?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물질주의자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 가득 들어있는 동사는 have입니다. 누가 가졌고, 누가 가지지 못했는지를 따집니다. 그리고 더더욱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보이는 물질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모릅니다. 미래를 말할지언정, 코 앞의 가까운 미래를 말할 뿐, 인류와 세계의 끝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상이 없습니다. 꿈꾸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루고 말겠다는 텔로스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현실적인 물질주의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월감이 들기도 하고, 박탈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남들이 나를 어찌 대접하는지에 기민합니다. 가진 것 때문에 대우 받기를 바라고, 가지지 못하면 홀대받는 것이 두려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입니까?


  사람다운 사람을 하나님이 길러내신다고,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마침내 땅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약속의 정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광야를 걸을 수 있는 사람들, 곧 '하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늘 사람' 기르신다고 하시곤,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요셉 시대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통 까먹고, 이 약속도 깡글이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약속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할례를 통해서 말입니다. 할례는 이 약속을 믿고 있다는 표식입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늘 사람 삼으시겠다는 약속,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땅을 얻게 된다는 약속 말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손가락만 걸어놓으면 약속이 다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할례만 받으면 만사 오케이인줄 알았습니다. 그런 민족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시고자 합니다. 바로 출애굽입니다. 즉 하늘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타락을 역전시키십니다.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십니다. 땅을 많이 얻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붙잡은 사람들을 통해서 타락을 뒤집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약할 때 강함되시는 그 분을 온통 의지할 줄 아는 사람들이 바로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라는 말입니다. 땅을 얻고자 혈안이 된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가, 낙타가 바늘문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고, 부유해진 국가들은 예수를 버리고 무신론으로 멋을 부릴 때, 가난하고 핍박받는 제3세계에서는 예수를 단단히 붙잡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꿈은 '임대업'입니다. 모두가 땅을 붙잡길 바랍니다. 땅을 붙잡으면 편하게 살 수있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불로소득을 얻고, 그것에 의지하여 하나님 없이도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땅을 소유하는 것을 굉장히 예민하게 경계해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본래 땅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레위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저 이 땅을 맡은 청지기요, 나그네일 뿐이라 했습니다(25:23). 그런데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우상이 있습니다. 바로 '바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온통 바알 투성이입니다. 땅을 붙잡고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땅을 붙잡고, 하늘을 바라보니 바벨을 지었던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가야 합니다. 하늘을 붙잡고서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늘을 지붕삼고, 대지를 마당삼고, 산을 배게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손에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땅을 쥐지 못해서 아쉽습니까? 아쉬워할 것없습니다. 지금 손이 비어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니 헛헛한 마음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스데반이 출애굽을 말합니다. 땅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땅이 아니라 하늘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종으로 부리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겠고, 

그 후에 그들은 거기서 나와 이곳에서 나를 섬기게 되리라.'


  스데반이 말한 것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가 땅을 약속받았으나, 땅을 소유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이야기를, 죽기 직전에 꺼낸 이유 말입니다. "형제들이여, 아비들이여! 당신들 지금, 로마의 손에서부터 가나안 땅을 되찾는 혁명에 눈이 돌아가 있지만, 이것은 타락을 뒤집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야! 하나님의 방법은 바로 우리 자신이야!" 이 말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도 오늘 똑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타락을 뒤집는 방식은 학벌이 아니야! 땅 위에 위엄 넘치게 서있는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게 아니야! 오히려 그 건물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에게 걸어가고 있는 바로 너야! 너를 통해 타락이 뒤집힐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그러니 기독인은 땅을 차지할 생각말고, 하늘을 차지할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을 침노하는 사람들입니다. 땅보다 더 큰 것을 붙잡으려 함입니다.



 그럼 그 분을 어찌 붙잡는단 말입니까? 그 분은 우리의 손으로 붙잡을 수 없고, 숨으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을 들이마시면 됩니다. 그 분의 생각을 들이마시고, 그 생각으로 눈이 시원해지며, 그 생각으로 코가 뚫려 생각하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스럽게 되면 됩니다. 그럼 하늘은 곧 내가 되고, 나는 곧 하늘이 됩니다. 내가 하늘을 호흡으로 붙잡으면, 하늘은 나의 온몸을 감싸 붙들어 줍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람이 있느냐?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아무 말씀 안하셔도, 그 분은 숨 쉬는 이시라, 그 분의 거룩한 숨결이 쉴새없이 불어옵니다. 어딜가나 들이마시면, 거룩한 숨님께서 내 속에 계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고, 

이삭은 야곱에게 또 야곱은 열두 족장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할례를 통해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도, 전수되었습니다. 할례가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약속의 사람은 땅을 바라봅니다. 땅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땅을 주실 때까지 바라봅니다. 대신 꽉 붙잡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꽉 붙잡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얻어서 나그네로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 와서는 성령이 됩니다. 성기에 상처를 내어 내가 약속의 후손임을 밝히는 방식이, 예수의 시대가 되면 숨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 내가 약속의 후손임을 밝힙니다. 로마서 2: 2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진짜) 유대사람은 눈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할례는 살가죽에 보이게 해놓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유대사람은 비밀스럽게 감춰져있으며,

할례는 규정이 아닌, 하나님의 숨결 속에서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이 말은 어떻습니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거룩한 숨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할례 받았습니까?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느냐는 말입니다. 그 약속을 신뢰한다면, 우리 손에 쥔 것을 놓고, 우리는 마땅히 숨님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숨님을 붙들면 할례받은 사람입니다. 진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진짜 유대인이 정말로 땅을 상속 받습니다. 그 땅은 무엇입니까? 가나안입니까? 아닙니다. 난 더이상 이 말을 감출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1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땅이 진짜 우리가 얻을 땅입니다. 땅은 인간의 차원,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새'가 붙었습니다. 인간의 차원이 새로워질 날이 옵니다. 그 날이 '주의 날'입니다. 그렇게 새로워진 인간의 세계가 땅입니다. 숨님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 땅에 걸맞는 새 몸으로 부활하여 그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 땅 주실 것을 믿고, 숨님을 붙드는 이제, 이제, 이제. "가난한 우리가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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