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42


[1]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페이레와 함께 가진 것을 팔았다.

그리고 그 값에서 얼마를 떼어 남몰래 감추었는데, 이것을 그 아내도 함께 보았다. 

그 일부분을 보냄 받은 이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길,


"아나니아! 어찌 사탄이 당신 가온에 가득하여,

거룩한 숨결을 속이고, 땅 값의 얼마를 남몰래 감추었습니까?

팔리기 전에도 당신 땅이었고, 팔린 뒤에도 당신의 권한아래 있던 것을,

어찌 당신 마음에 이런 문제로 두어서,

사람에게 거짓말한게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하게 되었습니까?"


  아나니아가 이 말들을 듣고 엎드려져 숨을 거두니,  듣는 모든 이들이 크게 두려워 했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아나니아를 싸매고 나가서 묻었다.

세 시간쯤 지나서, 아나니아의 아내가 벌어진 사건을 알지 못하고 들어왔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물었다. 


"나에게 말하시오. 당신들이 판 땅이 이정도요?"


  그러자 그 여자가 말하길,


"네. 이 정도입니다."


  베드로가 여자에게 말했다.


"어찌 당신들은 숨님을 시험하는데 한 목소리를 냅니까?

보시오, 당신의 남편을 묻고 오는 이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는데,

또 당신을 매고 나가게 될 것이요."


  그녀는 곧장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져 숨을 거두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그녀가 죽은 것을 보고, 들고 나가서 그의 남편 곁에 묻었다.

온 공동체와 이 일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큰 두려움이 있었다.


[2]

  보냄 받은 이들의 손을 통해 많은 표적과 기적이 씨알에게 이뤄졌다.

호흡을 같이하는 모든 이들은 솔로몬 행각에 있으나,

그외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씨알은 그들을 크게 여겼다.

주께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더욱 많아졌으니, 

넘치도록 많은 숫자의 남녀였다.


  심지어 베드로가 지나갈때 그 그림자가 병든 사람들에게 덮힐까 하여,

들판으로 병든 사람들을 데려다가, 침상이나 깔자리에 눕히기까지 했다.

예루살렘 도시 근처로부터도 많은 이들이 모여서,

병든 사람과 씻기지 않은 숨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사람들을 데려왔는데,

이 모든 사람들이 고침받았다.


[3]

  그러자 대제사장이 들고 일어났고, 

그와 함께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보냄 받은 이들에게 손을 써서, 그들을 공공감옥에 가두었다.

주의 천사가 밤동안 감옥 문을 열어 그들을 이끌어내며 말하길,


"여러분들은 가서, 성전에 서서 씨알에게 말하세요. 

'이러한 삶'에 관한 모든 말숨을."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은 새벽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제사장은 도착하여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공동의회를 소집하고, 

이스라엘 지파의 모든 원로들도 (모이게 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끌어오라 했다.

수하에 있는 이들이 도착했는데 보냄 받은 이들을 그 지키는데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돌아와 보고하길,


"감옥은 빈틈없이 단단히 잠겨있었고, 

지키는 이들이 문 옆에 서 있었습니다만,

문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전의 경비대장과 제사장들이 이런 말들을 듣고는,

보냄 받은 이들에 대해서 '어찌 이런 일이' 하며,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떤 이가 도착해서 그들에게 알렸다. 


"보세요, 당신들이 감옥에 가두셨던 그 사람들 성전에 있던데요.

거기 서서 씨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경비대장이 그의 수하에 있는 이들과 부리나케 가서 그들을 데려왔으나,

씨알이 돌을 던질까 두려워 폭력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들을 데려와 공동의회에 세웠다. 그리고는 대제사장이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공표하여 너희에게 선언하지 않았느냐?

그 이름으로는 가르지치 말라고!

그런데 좀 봐라! 너희가 예루살렘에 너희 가르침을 가득하게 했으니,

너희들은 그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 것 아니냐?"


  베드로와 보냄 받은 이들이 대답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설득되는 것이 훨씬 마땅하지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당신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바로 그 예수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이를 모든 것을 시작하고 보존하는 이로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그의 오른손으로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생각바꿈을 주셨고,

피를 내는 일들로부터 벗어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말숨들에 관한 목격자들이고, 

거룩한 숨님 또한 목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설득되는 자들에게 숨님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보냄 받은 이들을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 때 공동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어떤 이가 일어났다.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인데, 율법을 가르치는 이로서 

모든 씨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가 명하여 그 사람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는, 공의회원들에게 말하길,


"이스라엘 여러분, 이 사람들을 어찌 다룰지에 대해서는,

여러분 자신들이 신중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일어나서 스스로를 위대한 인물이라 떠벌리니, 

그에게 4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나니까 그에게 설득된 모든 이들이 죄다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이 일 이후 갈릴리 사람 유다도 인구 조사 할때, 씨알을 선동해서 자기 뒤에 서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죽으니까, 그에게 설득된 모든 이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내버려 두십시오.

만일 이 뜻이 사람들로부터 생겼다면, 이 일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있다면, 여러분들이 저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고,

도리어 하나님과 싸우자는 사람들로 발견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설득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냄 받은 이들을 불러다가 채찍질 하고서, 

그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서 풀어 주었다.

보냄 받은 이들은 공동의회에서 일어난 이 일로 기뻐하며 떠났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그 이름 위해서 굴욕을 당하는 것이

정말로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가르치고 그 다스림을 선포하는데 쉼이 없었다.




0. D의 의지






  우리는 지난 주 '언약 공동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성경>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언약 공동체 이야기입니다. 전체를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람을 두셨습니다. 바로 이 창조 이야기부터 인류는 최초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최초의 남녀, 아담과 하와입니다. 공동체의 최소 구성인원은 두 명입니다. 혼자서는 공동체를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두 세사람이~"라고 시작되는 구절 역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여간,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최초 공동체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파국을 맞았습니다. 


  이후 그 파국은 전세계로 확산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타락'이라 불러왔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못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타락의 징후들은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작심삼일'이라던가, '사람은 안변한다'는 말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못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못살게 된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고, 서로 의기투합해서 탑을 으리으리하게 만든다 한들,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시날평지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흩으셨고, 민족의 경계를 그으셨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언약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타락을 역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도 언약 공동체로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는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비참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타난 한 청년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바뀌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가 참 이스라엘로 이 땅에 드러났고, 그 예수를 믿는 이들이 역사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렇게 언약 공동체로서 예수 공동체가 출범했습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역시나 타락의 뒤집음입니다. 예수께서 이것 때문에 사셨고, 우리가 이것을 위해 모였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이 언약공동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뚫려 이해됩니다. 예전에 <성경>은 개인에게 주신 책이 아니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성경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신 책입니다. <성경>의 낱권들을 생각해보세요. 구약성경도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책이요, 신약 성경도 예수 '공동체'를 위한 책입니다. 초점이 바로 여기, 언약 공동체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 공동체가 어찌 생겼는지를 봤습니다. 창세기를 지나,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나, 예수께서 나타나셨고, 그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숨부어주시니 그때서야 비로소 역사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 공동체의 씨앗을 심으시고, 오랫동안 가꾸셨습니다. 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이 책도 언약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책인데)에서 숨 받은 사람들, 곧 언약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필기했었던 이 구조가 기억이 날 것입니다.


A :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 (4:1~4)

 B : 이스라엘 공회의 심문(4:5~22)

  C :  언약 공동체가 시작됨 (4:23~31)

   D : 그 공동체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4:23~37)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아름다운 문에 앉은 지체 장애인을 고치고, 이 일이 자신들의 '수'가 아닌, 예'수'임을 밝히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심문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언약 공동체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내어놓는 바나바의 이야기가 지난 주의 결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 4,5장의 구조는 마치 데칼코마니 같이 똑같은 내용이 뒤집혀서 진행된다고도 예고 드렸습니다. 다음의 구조처럼 말입니다.


   D' : 언약 공동체를 깨뜨리는 남녀(5:1~11)

  C' : 언약 공동체가 지속됨(5:12~16)

 B' : 이스라엘 공회의 2차 심문(5:17~40)

A' :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5:41~42)


  이 구조 속에서 우리가 방금 읽었던 본문들을 다시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들여다보고 생각하면 할수록, 무언가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삶으로 살면, 우리가 바로 언약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그러라고 주신 책이니 말입니다.



1. 언약 공동체를 깨뜨리는 남녀



  오늘의 첫번째 사건을 봅시다. 아나니아라는 남자와 삽비라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부부입니다. 이 부부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류 최초의 공동체가 남녀였듯이, 이들은 언약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남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남녀는 어떤 남녀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잘못을 뒤집을 남녀입니다. 곧 새로운 아담과 새로운 하와입니다. 이들이 새롭게 되어 타락을 뒤집기 위해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으며, 하늘에 가셔서 숨 부어주심도, 이 새로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붙어 세상을 고치는 손과 발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전에 이런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열방의 빛'. 이스라엘 민족은 열방의 빛으로 사는데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한 이스라엘의 뒤를 이어 나오신 이가 예수요, 그 예수에 접붙임되어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사명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온세계의 '사람다움'이 이들에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갑작스레 비명횡사합니다. 남편이 먼저 죽고, 곧이어 아내가 죽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숨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에서 격려의 아들, 바나바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언약 공동체에 내놓았습니다. 이 사건을 바로 이어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들도 자신들의 땅을 팔아서 언약 공동체에 내놓을 생각을 했나봅니다. 정말 좋은 생각이지만, 이 일이 언약 공동체에 소속된 가족들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 공동체는 의무나 책임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와 같이 자원하는 맘으로 움직였듯, 언약 공동체는 자유로운 섬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 부부는, 바나바의 명성이 부러웠든지, 아니면 자신들도 뭔가 마음이 움직였든지, 어떤 이유로 해서, 땅을 팔아 내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나니아는 땅 판 돈을 감추고, 그 일부만을 언약 공동체에 가져옵니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아나니아! 어찌 사탄이 네 가온에 가득하여,

네가 거룩한 숨결을 속이고, 땅 값의 얼마를 남몰래 감추었소?

팔리기 전에도 당신 땅이었고, 팔린 뒤에도 당신의 권한아래 있던 것을,

어찌 당신 마음에 이런 문제로 두어,

사람에게 거짓말한게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하게 되었소?"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감이 오십니까? 아나니아, 삽비라가 갑자기 죽은 것은, 언약 공동체를 깨뜨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세계가 회복되는 그 중요한 시기에, 이들은 사탄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달리 사탄이 아닙니다. 거룩한 숨결을 속여, 언약 공동체를 마비시키려 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우리는 그간 '숨'얘기 엄청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본격적인 시작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이 숨 받으면서 시작되었고, 그 숨으로 지체 장애인을 일으켰으며, 살기가 등등한 지도자들 앞에서 그 숨으로 말하고, 베드로는 이 숨을 바로 예수께서 보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래서 '성령행전'입니다. '숨행전'입니다. 이 숨은 어떤 숨입니까? 하나님의 숨입니다. 타락의 바다에 깊이 잠겨버린 사람이, 이 숨줄 받아서 제대로 호흡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숨줄은 생명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보이지 않는 줄을 잡고 살아가는 길이, 인간답게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숨줄을 버렸습니다. 거룩한 숨결을 속이고, 제 속에 사탄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탄은 시종일관 이 언약 공동체의 탄생을 방해했습니다. 언약 공동체의 중심이신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는, 헤롯을 이용해서 갓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땅이 어미들의 곡소리로 진동해도, 사탄은 기어이 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를 없애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께서 곳곳에 다니실적마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최후에는 나라 전체와, 제국 전체를 이용해서, 그리고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마저도 제 수하에 넣고, 예수를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반전이 벌어졌습니다. 사탄은 이겼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끝까지 복수하지 않고, 거룩한 숨결따라 살았던 예수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리법칙과 죽음에 대한 상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에 굴하지 않습니다. 언약 공동체가 생기지 못하도록, 지금도 성전 지도자들이 제대로 숨쉬지 못하도록 그 마음에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심지어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마저도 이 사탄의 꾐에 빠져, 언약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릴뻔했습니다. 감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 자체를 틀어버리려는 시도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렇듯 사탄은 다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 살지 못하게 막는 게 사탄입니다. 언약 공동체가 제대로 서 가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게 사탄입니다. 왜냐하면 언약 공동체의 든든히 서감은, 곧 자기 자신의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요합니다. 끈질깁니다. 두 세사람이 모여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고, 그 뜻따라 전심으로 살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 일을 하고자 한다면, 즉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말 하나님 뜻따라 살기 위해 인생을 건다면, 이 사탄의 파도를 마주 하게 될 것입니다. C.S.루이스는 말했습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의 전차부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면, 정면으로 붙어봐야 한다고. 언약 공동체를 방해하는 사탄이 얼마나 강한지 알려면, 정면으로 붙어봐야 합니다. 언약 공동체를 올곧게 세우는 일에 뛰어드는 두 세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사탄의 강함을 맞딱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약함을 발견합니다. 강함을 이기는 약함. 한없이 약한듯 보이나, 결국 그 강함을 제압하는 부드러운 움직임(마치 태극권과 같은!). 곧 숨입니다. 예수를 일으킨 그 하나님의 힘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성경>이 어찌 묘사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이 표현은 우리말과 딱 들어맞습니다. 희랍어는 '엑스에푸쉬켄'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엑스'는 '밖으로'라는 뜻이고, '푸시케'는 '호흡'입니다. 더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된 것이죠. 이 말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탄에 빠진 이는 더이상 성령으로 호흡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그 위대한 부드러움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더라도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숨쉬지 않으니 죽은 것입니다.



2. 언약 공동체가 지속됨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 언약공동체는 어찌 되었을까요? 공동체는 이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다시 달려나갑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해 많은 표적이 일어나고, 이것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호흡하는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솔로몬 행각이 어디입니까? 그 성전 아름다운 문의 지체 장애인을 일으켜 함께 있던 장소가 바로 솔로몬 행각입니다. 이 장소는 예수 공동체에게 대단히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숨 받아 처음으로 사람을 일으켰던 추억이 있는 장소입니다. 게다가 그 일 이후, 성전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마치 보란듯이, 이들은 그 사건이 있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숨결로 예수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음 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더욱 많아졌으니, 

넘치도록 많은 숫자의 남녀였다.


  이들은 새로운 아담과 하와들입니다. 이들이 주가 보시기에 믿음직스럽게 살고자 언약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타락을 뒤집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언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크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이 사람들은 삶 자체가 상식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말씀대로 사는 일에 전념하는 이들의 모습은, 경외와 찬탄을 가져왔습니다. 아무도 이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지나갈 때면, 베드로의 그림자가 효험이 있지 않을까하여, 그 지나가는 자리에 병자들을 눕혀놓기도 했다니까, 당시 언약 공동체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렇게 그림자라도 닿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모두 병이 나았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병든사람, 그리고 씻기지 않은 숨들, 곧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고침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침받았다는 말은 다른 말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숨으로 숨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3. 예루살렘 공의회의 2차 심문



  그리고 또다시 심문이 시작됩니다. 성전 지도자들이 들고 일어나, 언약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가둘 수 있습니까? 사람의 방법으로 이 언약 공동체의 행진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누가 막습니까? 그를 죽음으로도 못 막았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날개가 달렸는지, 흰 옷을 입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천사'라는 말 자체가 '말 전하는 이'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에 보면 '사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맹수의 왕 사자가 아니라, 말 전하는 임무를 가진 이가, 천사 입니다. 하늘말 땅에 전하는 그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서, 성전에 서서 씨알에게 말하세요. 

'이러한 삶'에 관한 모든 말숨을."


  감옥에서 나가서, 성전 지도자들에게 두 번이나 붙들렸던 그 자리로 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삶'에 관한 모든 말숨을 이 나라의 씨알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삶'은 어떤 삶일까요? 다른 삶일 수 있겠습니까? 숨 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 호흡하는 삶입니다. 아니니아 삽비라가 속을 사탄으로 채우고선 거절했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인간다운 삶이요, 언약 공동체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해서 보이고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감옥으로부터 나와 성전으로 들어간 시각은 새벽이었습니다.


  이 시각, 성전 지도자들은 공동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공동의회가 예수를 죽였던 바로 악명높은 공동의회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였는데, 정작 붙잡아놓은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감옥은 문제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만 없습니다. 말로 죄 있다 죄 없다 정해서, 감옥에 가두는 게 이 사람들 일이었는데, 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중에서야 갇혀있던 사람들이 성전에서 다시 가르친다는 말에, 또 붙잡으려고 성전 경비대장이 출동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이 재밌지 않습니까? 


경비대장이 그의 수하에 있는 이들과 부리나케 가서 그들을 데려왔으나,

씨알이 돌을 던질까 두려워 폭력으로 하지는 못했다. 


  이 말은, 씨알이 언약 공동체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았더라면, 응당 폭력으로 패가면서 감옥에 데려왔을 거라는 말이지요. 폭력에 익숙한 사람, 그런데 남의 눈치보면서 일을 판단하는 사람. 별로인 사람이지요. 그리고는 기껏 데려와서 한다는 말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우리가 공표하여 너희에게 선언하지 않았느냐?

그 이름으로는 가르지치 말라고!

그런데 좀 봐라! 너희가 예루살렘에 너희 가르침을 가득하게 했으니,

너희들은 그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 것 아니냐?"


  결국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려고 자꾸 그러는거지? 뭐 이런 겁니다. 이 책임론은 지도자들의 고질병입니다. 왜 청와대가 유병언을 잡는데 혈안이 되었습니까? 왜 판교 공연 책임자가 경찰조사를 받고 와서 자살 했습니까? 무언가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이것이 누구 책임이고, 그 책임자에게 처벌을 부과하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누구 하나 죽으면 문제가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여전합니다. 사람이 죽어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죽을 각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도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다른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 자들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다른 거 아닙니다. "나는 책임 없어요" 이 소리 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 아닌 사람에게 자꾸 책임을 넘기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장면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렇지만, <성경>에서도 그렇습니다. 최초 남녀에게서 이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남자는 여자 책임이라고, 여자는 뱀 책임이라고, 서로 그렇게 책임을 전가하던 장면 말입니다. 지금 언약 백성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공동의회는, 언약 공동체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타락을 뒤집기는 커녕, 타락의 현장을 재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책임 아니다"를 연실 말하는 대제사장 앞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설득되는 것이 훨씬 마땅하지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당신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바로 그 예수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이를 모든 것을 시작하고 보존하는 이로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그의 오른손으로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생각바꿈을 주셨고,

피를 내는 일들로부터 벗어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말숨들에 관한 목격자들이고, 

거룩한 숨님 또한 목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설득되는 자들에게 숨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당신들이 죽인 것 맞다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당신들이 죽였던 예수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남들을 짜먹고 피내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 일의 목격자고 증인이니, 나를 보고서 정말 그렇게 해주시는 숨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드로가 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괴로워하실적에, "난 예수 몰라요"하고 그 어린 꼬마 아이한테 윽박지르듯, 세 번이나 소리치던 그가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라서 그 증거가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배신자가 돌아와 언약 공동체의 일꾼이 되는 충격적인 변화의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니, 이보다 확실한 말과 증인이 어디 있습니까? 설령 이 사람이 말하는 숨이 보이지 않더라도, 이 사람의 눈에 보이는 변화를 보고서, 그것이 진짜 있음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성전 지도자들은 이들을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이들은 둘 밖에 볼 줄 모릅니다. 너와 나 밖에 없고, 양 편 밖에 없습니다. 마치 스포츠와 같습니다. 이기고 지고가 모든 결과입니다. 마치 정치와 같습니다. 어떻게든 저 쪽이 책임을 지게 해야 내가 삽니다. 선악과를 시작으로, 세상에 잘못되어 가고 있는 온갖 것들은 둘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한 건 셋입니다. 니 편도, 내 편도 없고, 모든 사람을, 심지어 자신을 죽인 원수마저도 안으시는 예수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3입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고, 모두를 살게 하는 새로운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이, 성전 지도자들에게는 셋으로 들리지 않고, 둘로 들립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자신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니 아예 죽이려고 합니다. 둘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가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이것이 자칭 언약 공동체라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공동의회 장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일 수 없습니다. 하나는 한 분이십니다. 


  다행히 가말리엘이라는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 있어서, 공동의회가 그나마 괜찮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의 말을 들어봅시다.


"이스라엘 여러분, 이 사람들을 어찌 다룰지에 대해서는,

여러분 자신들이 신중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일어나서 스스로를 위대한 인물이라 떠벌리니, 

그에게 4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나니까 그에게 설득된 모든 이들이 죄다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이 일 이후 갈릴리 사람 유다도 인구 조사 할때, 씨알을 선동해서 자기 뒤에 서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죽으니까, 그에게 설득된 모든 이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내버려 두십시오.

만일 이 뜻이 사람들로부터 생겼다면, 이 일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있다면, 여러분들이 저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고,

도리어 하나님과 싸우자는 사람들로 발견될 것입니다."


  이 사람 말은 무엇입니까? 공동체라는 것은 지도자가 죽으면 다 흩어지고 없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없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공동체가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지도자가 죽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결이 사람들을 이끌고 있으니, 언약 공동체는 지도자 하나 없다고 망할 일 없습니다. 가말리엘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자연히 없어지던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공동체이거나 할테니, 어쨌거나 이 사람들과 싸우지 말자 합니다. 자연히 없어진다면, 안싸워도 될 것이요, 정말 하나님이 그 공동체를 이 땅에 나게 하셨다간, 그들과 맞서는 것은 하나님과 맞서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말리엘의 이 말 이후 2000년이 흘렀습니다. 이후 언약 공동체가 어찌 되었습니까? 훌륭한 지도자들 많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모두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언약 공동체가 이 땅에서 사라진 적이 있습니까? 고난당한 일은 많았으나, 사라진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니, 언약 공동체는 그 분의 숨결 안에 있습니다. 예수 공동체 영원합니다. 


  또한 저는 이 가말리엘의 말을 읽어보다, 이런 생각도 났습니다. 만일 공동체가 그러하다면, 사람은 어떠할까 생각해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죽더라도 부활하여 영원히 존재한다면, 절대 사람과 싸워서는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싸우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이 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시원하게 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언약 공동체 사람들은 똑같은 심문을 받고서 또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채찍 맞고, 욕 먹고, '니네 또 예수 이름으로 가르치면 죽어' 이 소리 듣고 왔는데, 지금 이들은 웃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그 이름 위해서 굴욕을 당하는 것이 정말로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해졌지요? 이상해져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굴욕받는 것이 즐거운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상하지만, 이 이상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자, 왼뺨을 댐이자, 십자가이자, 곧 진정한 인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 기꺼이 굴욕을 당하고 웃을 수 있는 마음. 누구를 엄청 닮지 않았습니까? 같은 숨을 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



  그리고 우리가 지난 주 그렸던 사도행전 4,5장의 구조를 이렇게 완성할 수 있습니다. 데칼코마니입니다. 우리는 이 전체 구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정리한 것을 들여다보다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구조의 가장 가운데는 누가 있습니까? 남녀가 있습니다.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는, 타락을 뒤집는, 언약 공동체의 최소 단위로서의 남녀 입니다. 이 남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갖 시련에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언약 공동체입니다. 그럼 또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공동체에 대한 압박과 시련입니다. 공동체를 어떻게든 와해시키려는 외부의 세력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또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고난 보다 크신 구원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이 이름을 붙잡은 이는 전체를 얻음입니다. 전체는 곧 하나님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전체의 이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A :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 (4:1~4)

 B : 이스라엘 공회의 심문(4:5~22)

  C :  언약 공동체가 시작됨 (4:23~31)

   D : 그 공동체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4:23~37)

   D' : 언약 공동체를 깨뜨리는 남녀(5:1~11)

  C' : 언약 공동체가 지속됨(5:12~16)

 B' : 이스라엘 공회의 2차 심문(5:17~40)

A' :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5: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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