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23~37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나는 길에 동료들에게로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낱낱이 알렸다.

동료들은 이 말을 듣고서, 같은 숨으로 소리 높여 하나님께 말씀 드리길,


"대주재여!

당신은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바다와 모든 만물을 그 속에 지으셨습니다.

당신은 거룩한 숨결로 당신의 종인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날뛰며, 씨알들은 텅 빈 일을 돌보는가?

    이 땅의 다스리는 이들은 맞서 일어나고,

    지도자들은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였다.'


참을 따라, 당신이 기름 부으신 씻어난 아이, 당신의 예수를 향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민족들과 이스라엘 씨알과 함께 이 성에 모였습니다.

그러고는 당신의 손과 당신의 뜻이 미리 경계지은 그 일을 이루도록 움직였습니다.


이제도, 주여, 저들의 위협함을 보시고,

당신의 종들에게 막힘없이 당신의 말씀을 말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병을 고치시고,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게 하소서.

당신의 씻어난 아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고,

그들 모두가 거룩한 숨결로 흘러넘쳐, 하나님의 말씀을 막힘없이 말하게 되었다.

신실한 삶이 시작된 무리들은 가온과 호흡으로 하나되어,

자신에게 속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고,

오히려 서로서로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보냄 받은 이들은 큰 힘으로 주 예수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거저줌'과 '큼'이 그들 온 무리에게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다가,

그 판 돈을 가져다가 보냄 받은 이들의 발 앞에 놓았고,

보냄 받은 이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요셉이라하는, 보냄받은 이들이 '바나바'라 부르는,

(번역하면 '숨아들') 레위 사람이요, 키프로스 태생인 자가

자신이 가진 땅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보냄받은 이들의 발 앞에 놓았다.



1. 지금까지의 이야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사도행전 4,5장의 전체 구조를 봅시다.


A :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 (4:1~4)

 B : 이스라엘 공회에서 심문 받음(4:5~22)

  C :  공동체가 시작됨 (4:23~31)

   D : 그 공동체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4:23~37)


  이 순서를 잘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하나씩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밝히 드러냄'. 성전 아름다운 문에 주저 앉아 있던 사람을 일으킨 사건이 3장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놀랍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의 의미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이들을 붙잡아다가 잘잘못을 묻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막힘없이 밝힙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확인할 내용이 C와 D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이 구조를 가지고 이야기를 들여보자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5장부터는 이 이야기의 순서가 거꾸로 뒤집혀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이 구조를 역순으로 반복합니다. 이걸 알고서 들여다 보면, 우리는 한 절 한 절 의미가 무엇인지 찾던 것을 넘어서, 더 큰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블 코믹스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언맨도 보고, 토르도 보고, 헐크도 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모여서 캐릭터를 구성하고, 더 큰 이야기를 구성하니 그것이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묶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괜찮은 이야기들은 이렇습니다. 부분이 전체를 이루며 의미에 의미를 더합니다. 전체에서 빠져도 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전체'를 모르고서 '부분'이 전체인 줄 착각할 때입니다. 그 때 이야기는 자기 정당성으로 왜곡됩니다. 내가 보는 게 전체라고, 내 말이 맞다고 우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는 몰라도 <성경>은 그렇게 읽으면 안되지요. 자꾸 전체를 깨고 깨서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그럼  앞에서 설명드린 구조가 그럼 '전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더 깨야할 것들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렇게라도 3장에서 5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보는 건, 깨야할 여러 층들 중에 하나를 깨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깨고 깨서 전체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틀을 깨고 깨서 이르러야 할 그 전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전체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틀을 깨고 깨서 하나님에 이르도록 이야기를 계속 깨서 읽자는 말입니다. <성경>은 오랜 옛날에 쓰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이르러 사람살이의 핵심을 알도록 하는 책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 말하지 않습니까? 이 말이 딱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내 속에 하나님 닮지 않은 생각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깨고 또 깨서, 그 하나님에 이르도록 <성경>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본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읽은 성경이 전체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꾸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척이나 재밌고, 삶의 이치를 보여주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자꾸 그 속에서 내 생각만 발견하게 되니까, 내용이 다 뻔한 것 같고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인도의 계단식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깊게 파들어 갑니다. 그런데 파들어가면 갈수록, 전체가 넓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시원해집니다. 모든 삶의 국면에 들어맞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끝나는 그 이야기가 한 목에 들어오도록 시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삶으로 살면, 우리는 걸림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전체에 이르렀으니, 부분 때문에 걸릴 일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막힘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라고 주신 책입니다. 성령은 성경과 세상을 시원하게 관통해서 불어오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2. 누가 진짜 왕이냐?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 힘!



  종일 문초를 받고 돌아오는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참으로 고상합니다. 물론 할 말 다하고 온 베드로와 요한입니다만, 하루 종일 지배자들의 찌뿌린 눈살을 받고 왔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게다가 앞으로 그 힘있는 자들이 어찌 해꼬지할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동료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시를 읊습니다. 참으로 뜬금없지 않습니까? 하루종일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온 사람이 가족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가족들이 모두 함께 시를 읊는 격입니다. 물론 기도로서 시를 인용한 것이긴 합니다만, 저는 이러한 장면이 낯설기만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시'와 거리가 멉니다. 아이들한테 시를 쓰라하면 못쓰겠다 하고, 쓴 시를 읽어보라하면 부끄럽다 합니다. 왠지 모르게 시를 읽는 것은 무게 잡는 것같고, 일상과 떨어진 것 같고 좀 그런 기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를 가지고 생각을 나누는 일은 우리나라도 익숙했던 일입니다. 언제부터 이 시가 낯간지러운 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시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시구절을 통해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멋드러진 일이요, 양반이라 자처하던 사람들에게는 늘 하던 일이었습니다. 정몽주와 이방원이 '단심가'와 '하여가'를 통해 서로의 심경을 교환한 것은 유명한 일화 입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푸흡, 우리가 시를 쓰네ㅋㅋㅋ" 이런 생각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나라보다 더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야기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선지자들을 통해서 구약성경을 주셨고,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시이며, 이 시를 읊고 노래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구약성경의 시들을 인용해서 풀어내고, 그 내용에 의지해서 삶의 방향을 조정해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이 구약성경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문초를 받고 돌아온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다들 머리 속에 하나의 시가 번뜩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 시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날뛰며, 씨알들은 텅 빈 일을 돌보는가?

    이 땅의 다스리는 이들은 맞서 일어나고,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였다.'


  시편('시 모음'이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2편입니다. 지도자들이 잔뜩 몰려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서, 진리를 덮으려 한다는 말을 들으니, 이 시편 2편이 번뜩 떠올랐단 말입니다. 그럼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놓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몰랐느냐, 모를리가 없지요, 구약성경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 구절을 닳도록 보았고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베드로와 요한은 이전까지 해온 해석과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해석 속에서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그 지도자들"은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문책한 바로 그 사람들으로 읽힙니다. 물론 그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그럼 누구 말이 맞는 것입니까?


  언제나 해석은 앞 뒤를 봐야 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싯구절을 인용하기 전에, 사람들이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대주재여!

당신은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바다와 모든 만물을 그 속에 지으셨습니다.

당신은 거룩한 숨결로 당신의 종인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길,


  대주재입니다. 곧 아까 말씀드린 '전체'입니다. 곧 하나님입니다. 하늘과 땅, 즉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을 다스리시는 그 전체께서, 자신의 생각을 다윗 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의 해석은 전체이신 하나님과 맞닿아 있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점은 이스라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라 주장할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들먹이며 "우리처럼 읽어야 해!" 라고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해석을 강요하며, 그들에게 속아 씨알들은 헛된 것들만 돌봅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도처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은 만국공통, 심지어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에서 <성경>의 역할을 하던 책들은 <사서삼경>입니다. 즉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주역》을 묶어 그렇게 불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성경으로 말하는데 익숙하듯이, 이 <사서삼경>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살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책들의 해석을 움켜쥐고서,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유학을 어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파벌이 갈라지고, 이것 때문에 해석이 틀리다는 이유로, 문초를 받고 귀양살이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나 같은 절망입니다.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전체에 닿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가 사람답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답지 못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입받아야 하는 씨알의 절망이 시대마다 계속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서삼경>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이 시대의 <성경>일까요? 단연 미디어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란 사람들에 의해 검열되고, 통제받은 미디어가 사람들의 생각과 말생활을 규정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더욱더 심해질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국 전체에 이르지 못하고, 몇몇 사람들의 이익에만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시작은 다 하나님을 말합니다. 신적 권위를 말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지도자들의 해석이나, 씻어난 이들의 해석이나 그 시작이 같다고 칩시다. 그러나 시작만 같아선 안됩니다. 문제는 끝에 있습니다. '전체'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의 해석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참을 따라, 당신이 기름 부으신 씻어난 아이, 당신의 예수를 향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민족들과 이스라엘 씨알과 함께 이 성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손과 당신의 뜻이 미리 경계지은 그것이 이뤄지도록 행했습니다.


  참을 따라. 전체로 시작해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그 과정은 '참'입니다. 그 참을 따라 가니 어디에 이르게 되나요? 주께서 기름 부으신, 그 씻어난 아이, 곧 예수입니다. 전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로 이어집니다. 그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나의 현실은 새로이 이해됩니다. 그저 나 하나 살다 죽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역사입니다. 하나님으로 시작되어 예수에 이르는 역사가 나의 삶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씻어난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어찌 이해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고자, 선동된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모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이, 예수가 죽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자신들에게 똑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붙잡아다가, 그렇게 하자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씻어난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들도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어찌보면 슬픈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큰 일났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이제 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할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이는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향해, 그 위대한 걸음마를 시작합니다. 마치 십자가로 전진하는 예수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이는 죽음을 꿰뚫습니다. 죽음을 꿰뚫었으니 진정한 희망입니다. 마치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으니,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보십시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막힘없이 말숨을 말하게 해달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들도 죽음을 뚫고 앞으로 전진하겠다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아이, 곧 그리스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고쳐 읽은 <성경>과 자신들이 맞닥뜨린 '역사'가 보증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목숨을 위협하며 자신들의 해석을 주입하던 사람들에 맞설 수 있으니, 이들에게 진실이 있습니다. 죽음을 뚫어내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이를 이렇게 키워가십니다. 죽음도 덮을 수 없는 사랑으로 그 아이를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따라 이들은 날마다 죽음과 맞서고, 날마다 죽음을 이기니, 날마다 부활입니다. 이들을 통해 죽음으로 덮어놓은 진실이 드러나고, 지배자들이 두려워하는 정의가 이뤄지며, 그러면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니, 사랑이신 그 전체에 닿습니다.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 이름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은 부활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같은 절망에 휩싸여 있는 전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이름은 희망됩니다. 허나 분명한 건, 그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희망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글자 따위로 격하시켜버리는 건, 그 이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이름을 글자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분의 이름이자, 이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경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로 읽힙니다. 예수가 그리 읽으셨듯 말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앞에는 적이 있고, 뒤에는 강이 있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씻어난 이의 인생은, 앞에는 예수가 먼저 가셨고,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설령 그 예수를 따르는 길에 죽음의 시커먼 강이 가로 막고 있더라도, 이 강은 배수진이 아니라, 딛고 걸어야 할 발등상입니다. 하나님의 아이가 부활의 걸음마를 시작하는 앞마당입니다. 



3. '큼'이 '거저줌'으로 : 언약 공동체



  그렇게 처음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던 사람들은, 성경을 새로이 읽고, 자신들의 하나님 안에서 예수를 따라가는 역사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기도하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룩한 숨결을 부어주셨고, 그 숨결을 따라, 그들이 바라던대로,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막힘없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위협을 거두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죽음을 이기길 바라십니다. 다시 말해, 죽음의 두려움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 큰 사람이 되길 바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육아 방법입니다. 


신실한 삶이 시작된 무리들은 가온과 호흡으로 하나되어,

자신에게 속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고,

오히려 서로서로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보냄 받은 이들은 큰 힘으로 주 예수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니,

'거저줌'과 '큼'이 그들 온 무리에게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보냄 받은 이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신실한 삶이 시작된 사람들"이라 해놓았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믿는 사람'이라 되어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은' 사람들입니다. 누구겠습니까? 앞에서 베드로의 풀이를 듣고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 바로 이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애둘러서 그저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한 시작을 가지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가온과 호흡이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온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그 인격안에 들어 있던 죽음이라는 바위를 치워내니 시원스레 호흡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그렇게 씻어난 이들의 가온을 지나 시원히 흘러갑니다. 이후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권을 포기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서로서로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공동으로 사용'이라는 말이, 오늘날 '교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는 가온과 호흡으로 하나되어, 자신에게 속한 것을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서로 공동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이끄는 사도들은 주 예수 부활의 증거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았으니, 부활의 증인들과, 또한 증거들과, 예수께서 살몸으로 함께 계실적에 가르쳐 주신 바에 대한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큰 힘'으로 보여주었다하니, 부활의 증거는 다른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죽음을 정복하며 사는 그 힘이란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이기니 큰 힘입니다. 그러니 이 큰 힘은 부활의 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나, 부활의 힘을 따라, 정말 사람답게 사는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증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니까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땅이든 집이든 팔아서 재분배합니다. 현대 경제학이 포기한 바로 그 문제말입니다. 산업혁명 전후로 일어난 유럽에서의 혁명은, 귀족은 아니지만 돈이 많았던 신흥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지지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러한 사건들 이후, 영주나 국가에 귀속되지 않고서, 오로지 개인이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해졌습니다. 물론 한 사람에게 과도한 영향력을 주었던 이 전 역사에 대한 개혁이었지만, 이 개혁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인간이 소유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를 재산 취급하게 된 것입니다. 


레위기 25:23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신명기 23:19 

여러분은 형제에게 꾸어 주어줄 때, 이자는 받지 마십시오. 

돈이든지 곡식이든지, 이자가 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은 땅을 아주 팔고 사는게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꿈이 임대업입니다. 땅을 가지고,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은채 이윤을 먹고 사는 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 땅의 소유권을 가지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땅 말고 또 돈 받고 사고 팔기 시작한 게 또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에 돈을 매긴다 함은 곧 이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자로 잔뜩 쌓아올린 공든탑이 우리가 말하는 '경제'입니다. 거품처럼 언제 꺼져버릴지 모르는 위태하고 헛된 일에 씨알들이 온통 매달려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극복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2000년전에 벌어진 역사적인 공동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씻어난 사람들에 의해서, 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어찌 극복되는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땅이든 집이든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진 것을, 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고, 자신의 시간을 마땅히 섬김으로만 채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부의 재분배요, 사유재산제도를 넘어선 것입니다. 아무도 제 것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역사의 예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 <성경>은 이미 예고한 바 있습니다.


에스겔 36:23~27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 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숨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숨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이 구절은 이미 주기도문 설교할 적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온통 먹칠을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다시 닦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들을 불러모아 출애굽시키시고, 새 마음과 새 숨을 주셔서, 하나님의 원리원칙대로 살 수 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이 이야기가 흘러내려왔고, 사람들은 이 공동체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가리켜 이스라엘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언약 공동체'. 이 언약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지도층들은, 자신들이 이끄는 이 나라가 언약 공동체이므로, 자신들이 말하는게 하나님의 원리원칙이라 주장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서 그저 그들을 따라왔을 뿐이고요. 그러나 언약 공동체라 주장하던 이스라엘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놓았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 이게 언약 공동체가 아니구나.' 아마도 말씀을 연구하며, 언약 공동체의 수장을 자처하던 제사장들중 많은 이들이 이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뒤에 사도행전 6:7에 보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이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랐다"는 구절이 나오니까요. 그럼 이스라엘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 안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예수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약속하셨던 언약 공동체입니다. 그들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원리원칙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땅을 소유하지 말라는 레위기의 원칙은 그들이 지켜나가는 여러 원칙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럼 그들이 글자에 매여서, "이러한 계명을 지켜야해", "저러한 계명을 지켜야해" 하는 강박증으로 지켜나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든 계명을 지켜나갑니다. 그들의 사랑은 혁명적 사랑입니다.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급진적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언약 공동체, 즉 예수 공동체를 통해 말입니다.


  이 예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예고한 그 공동체가 바로 자신들임을 말입니다. 그들만 알았던 것 아닙니다. 그들을 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아, 우리가 이뤄지길 기대했던 언약 공동체가 바로 저 사람들이구나' 차차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예수 공동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이지만, 그 도우심은 단편적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기적을 베푸신 정도의 도움이 아니라, 이 언약 공동체 프로젝트를 창안 하시고, 알리시고, 또한 알게 하시고, 예수를 통해 이루시는 그러한 도움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그리스도가 이루시는 그 공동체에 내가 속해 있네'.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모두 이런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전체'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시는 이 공동체. 오늘 본문에는 '큰'이라는 말이 자꾸 나옵니다. 아까는 큰 힘으로 부활을 증거했다고 되어 있고, 그 아랫줄에는 그 공동체에 '거저줌'과 '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구절도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절입니다. '큼'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숭고함으로 풀까, 장엄함으로 풀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큰 거라고만 써있으니, 큰 건 큰 것이죠. 이 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그런데 이 눈에 보이지 않는 큼이 그저 눈에 보이지 않게 있다 끝나지 않습니다. 이 큼이 표현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 큰 무언가를 느낀 사람들은, 그 큼을 자신들의 삶으로 표현합니다. 그 표현이 바로 '거저줌'입니다. '은혜'라 번역되는 말입니다. 은혜는 눈에 보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는데 그것이 안 보일리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큼'을 아는 이들이, 그 '큼'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거저 줍니다. 뒤에 보면 집도 팔고, 땅도 팝니다. 보이지 않는 큼이, 이 사람들을 통해 크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큼을 느끼는 만큼, 크게 거저 줄 수 있습니다. 



4. 꿈이 아니야! 



  진실을 덮으려는 지도자들, 그 지도자들을 따라 움직이는 국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죽고 살아난 사람마냥,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과감하게 저지릅니다. 사랑하는데 인생을 겁니다. 이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사람다움의 희망을 봅니다. 정말 꿈과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읽고서 이런 생각은 혹시 안했습니까?  '와 저러면 정말 좋겠는데, 요즘은 그러기가 어렵네' 


  그런데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내용은 우리에게, 이건 꿈이 아니니 생각을 깨라고 내리치는 큰 망치질입니다.


 요셉이라하는, 보냄받은 이들에게는 '바나바'라 불리는,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 레위 사람이요, 키프로스 태생인 자가

자신이 가진 땅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보냄 받은 이들의 발 앞에 놓았다.


  실존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벌어진 일이었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이 일을 하고 있었음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그 사람이 요셉이란 사람입니다. 별명으로 더 유명합니다. '바나바'. 격려와 위로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하나하나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이 사람은 별명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별명이 이렇게 붙을 정도니, 이 사람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큰 무언가를 느꼈으니,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레위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 가문에 속해있었다는 말입니다. 위에서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랐다"고 써있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에 대한 실제적 증거입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 가문이었는데, 자신들이 언약 공동체를 이끄는 이스라엘의 대표라 생각했는데, 이 생각을 버리고 죽고 사신 예수께 엎드린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가문이 아니라, 예수 그 분이 언약 공동체의 중심이자, 온 우주의 중심임을 인정한 실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키프로스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키프로스는 이후 등장할 '바울'이라는 사람의 첫번째 전도 여행지입니다. 아마도 키프로스를 첫번째 지역으로 선정한 것에는 바나바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여간, 역사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어지는 성경의 대부분을 저술하는 바울이 바나바라는 사람을 통해 키프로스로 그 위대한 사역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또한 자기가 가진 땅을 다 팔아다가, 그 돈을 공동체에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인생 전부를 언약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사도냐? 사도도 아닙니다. 그저 일반인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사도행전 4,5장의 구조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A :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 (4:1~4)

 B : 이스라엘 공회에서 심문 받음(4:5~22)

  C :  공동체가 시작됨 (4:23~31)

   D : 그 공동체에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4:23~37)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드러냈고, 그들이 세상의 압박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언약 공동체는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그 언약 공동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사람으로 소개되는 첫번째 일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행전 4,5장의 구조속에서, 정점에 서있는 인물이 됩니다. 베드로도 아닙니다. 바울도 아닙니다. 성경은 바나바의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습니다. 마치 성경에 우리 이름이 나오지 않듯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약 공동체 소속입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 이 사람이 사도행전 구조의 가장 정점에 등장합니까? 저는 이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그저 일반인이지만, 누구보다도 사람답게 살 필요가 있는 실제 사람. 바나바는 가상 인물이 아니듯, 오늘 우리도 가상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와 기록이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와 기록은, 알고보면 전체이신 그 분께서 우리를 언약 공동체로 부르시는 초대장이겠습니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