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생각은 그리움에서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앞에 있으면 만지려 하고 느끼려 하지,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없이 계십니다. 그 분은 분명히 계신데, 없이 계십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더러 생각하라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계실 수 밖에 없는 그 분을 생각하라고.
사람도 이 땅에서 없어지면 자꾸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를 그립니다. 그리워합니다. 생각합니다. 그 속에 무언가 있습니다.
1.
신해철씨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손에 잡을 수 없는 그를 그리워하며 저의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을 생각합니다. 저는 어려서 사물놀이를 했었는데, 공연을 마치고 같이 호흡을 맞추던 친구들과 함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래방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노래책을 뒤져봐야 아는 노래라고는 동요나 만화 주제가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불러봐야 그런 노래들 뿐이었고, 이런 상황은 저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중에는 꽹과리를 치던 P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어른노래' 한 곡을 불렀고 저는 그 날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노랫말은 병아리의 죽음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어린 아이가 생각을 얼마나 깊게 했겠냐만은, 제 속에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를 건드리는게 있었습니다. <날아라 병아리>라는 노래였는데, 노래방을 갔다온 뒤 P에게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못알아들을 단어를 말해주었습니다. '넥'뭐라고 그랬는데, 저는 그 당시 그 말을 못 알아들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넥스트'라 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의 집에 찾아갔는데, 그 친구는 위로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P는 형을 통해서 대중문화를 먼저 접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날아라 병아리>에 대해서 재차 묻자 그 친구는 형 방에서 CD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정말 친한 친구였는데, 지금은 연락조차 닿지 않는 P를 통해서, 그렇게 저는 신해철이란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굳바이 얄리
이젠 아픔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굳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는지
굳바이 얄리
이젠 아픔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굳바이 얄리
언젠가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줘
세월이 한참 지나 이 가사를 가지고 생각해봅니다. '이젠 아픔없는 곳'이 정말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곳은 없습니다. 아픔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돈 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먼저 거기 가서 가서 살지 않겠습니까? '이제 아픔없는 곳'이 도시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도시가 아픔없기는 커녕 아픔으로 가득한 곳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 아픔 없는 곳은 없습니다. 아픔 없는 곳은 있어야 하나 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으니까 그리워하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상'은 있겠습니까? 신해철이 병아리의 없음을 통해서 그리워했던 '다음 세상' 말입니다. 나는 '다음 세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다음 세상 없는 이 세상은 끝은 죽음이요, 절망밖에 없습니다. 의미를 찾는다해도 죽음을 이길 수 없는 한에서 즐길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다음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대상없고 실체없는 그리움이 아니라, 이루어지는 그리움이라 말합니다. '다음 세상'을 '영생'이라 씁니다. 곧 '오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오는 시대'는 우리가 죽어야만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오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있었노라 말해줍니다. 아픔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아픔을 서로 싸매주며 기쁨으로 바꿔버리는 공동체가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신해철이 그리워했던 그 '다음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보고 있습니다. 서로 아픔을 씻어나가며, 적이 아니라 친구로 다시 태어나, 다음 세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그러한 공동체 말입니다. 곧 언약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다음 세상을 미리 살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손에 붙잡을 수 없어 그리워하는 삶을 정말로 살아보기 위함입니다. 곧 없이 계신 이를 드러내기 위함이요, 드러내면 영광입니다. 이렇게 살면 주의 영광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친구로 태어남'은 있겠습니까? 없을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없어진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그리워 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없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날이 왜 없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시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날이 올 것이고,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기독인입니다. 즉 죽음 아래서 무언가를 즐기고자함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희망을 삽니다. 그러니 그의 죽음 앞에서 절망 할 수 없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는 날이 옵니다. 죽고 사신 '그이'와 함께 말입니다.
2.
노래 하나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민물장어의 꿈>을 들은 것은 <날아라 병아리>를 들은 후 한참 시간이 흘러서 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인 아이는 자라서, 20대가 저물어가던 시기에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2010년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제가 다니던 학교는 여러 문제가 있어 시끄러운 상황이었고, 저는 수업도 잘 들어가지 않은채 학교 앞에서 사람들을 계속 만나 설득하면서 데모를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사람들을 많이 모을 수 없었고, 준비를 하면 할수록 속이 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잘 하고 있는걸까?' 이런 질문을 속으로 계속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나를 내세우고 싶어서 나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이 학교가 올바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두 마음이 뒤섞여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마음 풀어낼 길이 없어 안팎으로 괴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컴퓨터에 앉아 있다가, 신해철이 생각이 나서 베스트 앨범을 찾아 들었는데, 마지막 곡이 이 곡이었습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첫소절을 듣자 마자 눈물이 왈칵났습니다.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이라는 그의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닙니까? 낙타가 바늘문이라는 성문 옆 쪽문으로 들어가려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몸을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들어가는건, 낙타가 바늘문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말씀하신 것이 딱 이 말입니다. 하나님 다스림의 좁은 길로 걷고자 하는 모든 기독인들은, 자신을 깍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곧 십자가를 지고 나를 굽히는 일입니다.
허나, 굽히지만 쓰러지면 안되는 길입니다. 갈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발을 내딛습니다. 그 목적지는 어디 입니까? '다음 세상'입니다. '영생'입니다. '오는 시대'입니다. 이 새 시대를 '오늘', '지금', '이제' 살도록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목적입니다. 십자가를 이 땅 한 복판에 꽃아, 그 십자가에 스스로 매달려 죽고서, 다시 일어나 살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 '다음 세상'의 미래를 현실로 가져오자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언약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언약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의가 지배하는 이 현시대에서 탈출하여, 약속이, 헌신이, 꼭 함께할 운명이, 영원이 그리고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공동체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의 가정이, 학교가, 교회가, 사회가 현시대에 갖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는 시대를 살지 못하도록 단단히 옭아매었습니다. 허나 갖혀있다고 절망만 할 수 없습니다. 현시대 속에서 오는 시대를 사는 사람이 설령 눈에 안보일지라도, 이런 사람들은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되겠다고 하면, 다른 이들이 업신여길 지라도, 이런 사람은 이 땅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말했듯, "언제나 정의가 이기는 세상, 죽지 않고 비굴하지 않은 우리의 영웅이 하늘을 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완전한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이미 우리의 영웅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를 그리워하며, 그로부터 얻은 생각을 가지고, 이 땅에 온전한 세계를 이루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만이 남았습니다. 이 꿈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아, 너의 꿈을 비웃는 자를 애써 상대하지마."
이 언약 공동체 속에서, 오는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아무도 여러분에게 말해주지 않은, 진짜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이것을 없이 계신 하나님이 말씀해주십니다. 여러분 속이 없이 있던 것들을 꽃피워, 이 땅에 이런 사람으로 서라 하십니다. 내 속에 이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그리워할 수록, 그가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없이 있는 하나님을 그리워할 수록,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곧 예수의 몸입니다. 그 몸으로 이룬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내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창조세계가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 하나님의 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스도.
3.
금요일에는 예전 신해철이 출연했던 <승승장구>를 보았습니다. 그 때 신해철이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신경과민에 지독한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오랫동안 받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첫 아이가 태어나자, 그 생명 얻은 기쁨이 그를 낫게 했고, 첫 아이 덕분에 정신과 치료는 전혀 필요가 없어졌고, 자신은 여덟살 아이마냥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도 알았죠. 제가 구원 되었다는 걸"
'구원'이란 말이 정말 그렇습니다. 내가 죽어서 천국가는 것만이 구원이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사람이, 한 아이를 얻었고, 자신의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럼 누가 뭐라하든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자신이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는 걸. 이것이 구원입니다. 저는 저 말을 듣고, 얼마전 우리가 보았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제도, 주여, 저들의 위협함을 보시고,
당신의 종들에게 막힘없이 당신의 말씀을 말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병을 고치시고,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게 하소서.
당신의 씻어난 아이,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의 씻어난 아이, 예수. 이 하나님의 아이는 모든 이들을 구원합니다. 사람답게 살게 합니다. 이 하나님의 씻어난 아이가 모든 이야기 속에서 발견됩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 속에서 바로 '그리스도'를 느낍니다.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한대로 입니다.
故 신해철씨의 삶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날 날을 향해 걷겠습니다. 그 날은 옳음이 뚜렷하고, 정의가 강처럼 흐르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을 향해 산 자의 책임을 어깨에 매고 걷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노래한 다음 세상의 일원으로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불을 들고 여기에 서 있겠습니다.
당신의 유작 이름처럼, 다시 땅으로부터 일어나 Reboot할 때까지
편히 쉬소서. RIP.
'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 나는 날에는 (0) | 2014.12.06 |
---|---|
빌레몬서 1:15~20 : 오는 시대의 문턱 앞에 있는 너, 애끓는 나 (0) | 2014.11.12 |
키케로, <말하는 이에 관하여 I> 1~10 (0) | 2014.10.28 |
옛사람의 읆음, 새 사람의 읊음 (0) | 2014.10.24 |
言正心安(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0) | 2014.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