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저는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수원을 벗어난 적도 손에 꼽을 정도이고, 비행기는 더더욱 타본 일 없는 수원 촌놈인데, 제가 살아서 비행기를 타는 일이 벌어질 줄은 불과 지난 달에도 몰랐습니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제 친구 녀석에게, 담임 목사님이 저에게 해주었던 조언을 똑같이 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저한테 '책 그만보고 여행을 다녀오라'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너 우선은 다 내려놓고 여행을 가는게 어떠냐'하고 말해본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그 친구가 일본을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가게 되었고, 그 여행 속에서 부던히 생각했습니다. 소위 '인생의 의미'라는 것.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타국 땅에 발을 딛고서니, 인생의 근본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도 절도 없이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날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3박 4일간 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한 것들을 적고 하다가, 다녀온 여행을 정리할 수 있는 단 한 곡의 곡을 한 친구로부터 추천받았습니다. 오늘 저에게는 15분의 시간이 주어져있는데, 이 짧은 시간동안 이 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다가 시간이 넘어가면 중간에 그만 두도록 하겠습니다.
유영석의 '눈물나는 날'에는 이라는 곡입니다. 저보다 연배가 많으신 분들은 유영석을 아시겠지요. '7년의 사랑'이나 '네모의 꿈'이란 곡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화이트, 푸른하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라디오를 통해 우연히 들었던 유영석의 곡들이 너무 좋아서 다음 날 곧장 베스트 앨범 테이프를 구매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사는 이러합니다.
우리들 마음 아픔에 어둔 밤 지새우지만
찾아든 아픔 느끼면 다시 세상 속에 있고
눈물이 나는 날에는 창 밖을 바라보지만
잃어간 나의 날들에 어쩔 줄 모르네
사람에게는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밝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러한 어두운 시절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시절들이 어둔 밤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어두운 밤이 있습니까? 저는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시절이 분명 어둔 밤입니다. 그리고 요즘도 종종 누군가 밉고, 탓하고 싶은 맘으로 가득해져서, 웃을 수 없는 날들이 있습니다. 이런 날들 또한 어둔 밤입니다. 이런 아픔에 너무 자주 벌어지니까, 저도 살아보고자 이러한 아픔에 적응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때, 또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을 얼른 묻어버리고는 이러한 아픔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마냥 무감각한 체 합니다. 이런게 어른이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만, 이런 어른은 제가 되고 싶은 어른은 아닙니다.
기도할 적에 이러한 아픔들은 다시금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이 땅에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은 이러한 아픔이 있습니다. 헤어진 옛연인에 대한 그리움, 친구와 싸우고 절교했던 시절들에 대한 후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순간에 대한 아쉬움, 또한 사람과 사람이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는 것에 대한 괴로움. 모두가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느끼는 아픔들입니다. 그래서 괜시리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영화를 만났을 때, 혹은 음악을 듣고 옛추억에 잠길 때, 또는 누군가가 이러한 내 얘기를 들어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한 분이 내 마음 알아주시면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뿐, 나는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 한 분은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되돌아본 과거에 대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찌할 수 없으니 더더욱 슬픈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두 개의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시대'라는 시간입니다. 이 시대는 아픔의 시대입니다. 못된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악이 창궐하여 모든 사람이 여기에 팔려가는 그러한 시대가 바로 현시대입니다. 이 시간 속에서는 돈이 이깁니다. 정직은 짓밟힙니다.우리가 지금껏 말했던 우리의 마음이 공허하고, 아프고 하는 것들은 모두 현시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만의 아픔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던 사람들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기에, 같은 아픔 속에 있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은 '세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합니다. 세상은 공간을 뜻하는 말이나, 사실 이 말은 시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현시대입니다.
마가복음 4:19
가시덤불 사이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지만
현 시대의 걱정과 돈의 유혹과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
말씀이 질식당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가복음 4: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허나 <성서>는 현시대만 말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시간을 말하는데, 그 시간의 이름이 '오는 시대'입니다. THE AGE TO COME입니다. 이 시대는 메시아, 인자가 나타나고, 악이 심판을 받으며 마침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간이 마침내 찾아옵니다. 즉 정의가 다시 일어서고, 아름다움이 드러나며, 신성함이 인정되며, 모두의 죄책감이 씻기는 그러한 시대 말입니다.
문제는 현시대에서 오는 시대로 넘어가는 그 중간입니다. 유대인들은 현시대에서 오는 시대로 넘어갈 때, 딱 떨어지게 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악인들은 모두 멸망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되는 그 날이 바로 현시대에서 오는 시대로 넘어가는 그 날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팔레스타인 땅을 얻지 못해 안달인 것도, 현시대에서 오는 시대에 넘어가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땅을 차지하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 안하셨습니다. 그 분은 이상한 시절을 말씀하셨습니다. 현시대 속에 오는 시대가 돌입하는 시절입니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다스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다스리신다는 말이고, 이 말은 현시대 속에서 오는시대를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 분의 외침은, 현시대 속에서 오는 시대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현시대와 오는 시대는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두 시기가 겹쳐집니다. 누군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서, 왜 이 세상이 이 모양 이꼴이냐?" 제가 되물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엉망진창인 세상 속에서도, 올바른 뜻에 따라 새로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게 더 신기하지 않느냐? 이것은 왜 그런 것이냐? 누구의 의지냐? 똑같은 세상을 살아도, 각자 사는 시간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죽음에 종노릇하는 현시대를 살고 있다면, 누군가는 하늘로부터 생각하고 숨쉬는 오는 시대를 삽니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이 말입니다. 오는 시대를 사셔야 합니다.
얼마전 청소년 친구가 <빌립보서>에서 '마지막 날'이라 하는 날이 어떤 날인지 물었습니다. 마지막 날은 오는 시대가 시작된 날입니다. 언제부터 오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새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오심으로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마지막 날을 살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들은 현시대 속 오는 시대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현시대가 끝장나고, 오는 시대가 확연히 드러나는 날이 옵니다. 그 날이 주의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마지막 날과 그 분의 다시 나타나시는 날인 주의 날 사이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저에게, 다음의 가사가 어찌 들리겠습니까?
나에게 올 많은 시간들을
이제는 후회없이 보내리
어두웠던 지난 날을 소리쳐 부르네
아름다운 나의 날을 위하여
유영석이 앞에서 말했던 시간은 과거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고, 후회의 시간이며, 아픔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서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봅니다. 그랬더니 다른 시간이 보입니다. 올 시간. 곧 오는 시대입니다. 악이 패배하고, 아픔이 씻겨지며, 서로를 탓하는 것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용서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가 여러분에게 찾아왔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에게 임했습니까? 여러분은 현시대 속에서 오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 '오는 시대'를 이 조선 땅에서 먼저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영생'. 삶이 끝도 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시대를 뚫고 시작되는 새로운 삶. 과거가 용서되고, 이제 미래를 바라볼 자격을 얻은 삶입니다. 용서 받았으니, 과거에 대해 후회가 없습니다. 힘을 얻었으니 어두웠던 지난 날에 소리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 후회가 아닌 떳떳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어찌 가능한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 내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 현 시대 속에 오는 시대를 가져오는 그 분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나의 날을 위하여. 아름다운 우리네 날을 위하여. 이 날은 현 시대 속 오는 시대의 삶입니다. 악의 심장부에서 예수를 붙잡고 그 악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한 걸음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양의 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출애굽할 적에, 어린양을 잡아 피로 문을 그리라 했습니다. 이 문을 지나는 이집트의 마지막 날 밤이 유월절입니다. 그 밤에, 이 문을 지나면 이스라엘은 다시는 이집트로 못돌아옵니다. 더이상 파라오의 노예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묶인 참 자유인이 됩니다. 그렇게 광야를 걷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오는 시대를 맞이하러 나가는 세례요한의 발걸음과 같습니다.
어두웠던 지난 날을 향해 소리칠 수 있는 담력이, 그리고 다시는 그 어두웠던 지난 날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내가 두려워했던 광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그 힘이, 오는 시대를 가져오시는 예수로 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이는 내게 실천력을 주시는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내가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는 힘의 근원이십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없고,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내가, 오는 시대 속으로 들어옴은, 죽은 예수를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 때문입니다. 돈을 따라 움직이며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보이지 않는 시장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부활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를 일으켜, 그를 무덤 밖으로 인도했던 그 손만이 나를 이끕니다. 마치 구름기둥, 불기둥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손. 그 분의 숨. 보이지 않는 성령. 양심, 도덕, 우리에게 빛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 나는 오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다도 삼키지 못했던 이스라엘, 이 현시대의 파도는 나를 덮을 수 없습니다.
블링블링한 장신구 때문에 나의 삶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내 연봉 때문에, 혹은 내 차 때문에, 내 자랑스러운 카드 한도 때문에, 내 이쁜 여자친구 때문에 나의 삶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삶이 아름답다면, 빛이 있기 때문이요, 그 빛은 가시광선보다 먼저 있던 빛입니다. 태양이 있기 전,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던, 바로 그 빛입니다. 그 빛이 나를 비추니, 내 삶이 아름답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밝음이 있습니다. 참 빛입니다.
사랑이란 사랑이라는 마음만으로
영원토록 기쁨 느끼고 싶어
슬픔 많은 슬픔 많은 날 잠이 들고파
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그러한 삶이 '사랑'입니다. 현시대는 사랑에 정반대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현시대에서의 삶은 노력과 댓가의 삶입니다. 내가 노력한 것만큼 댓가를 얻는다는 것이 현시대에서는 하나도 이상하게 들릴 것이 없습니다. 허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이 얻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남이 노력보다 많은 것을 얻으면 그것을 손가락질 하면서도 부러워합니다. 새벽 다섯시에 공사판에 나온 노가다꾼과 오후 4시에 나온 노가다꾼이 같은 일당을 받아서 돌아간다면, 이것은 누구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오는 시대의 삶은 그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 오는 시대, 영생은 내 노력에 따라 댓가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내 노력에 상관없이 위에서 부어지는 삶입니다. 마치 광야에서의 만나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받을까에 관심이 없습니다. 남들이 얼마나 받을까도 내 관심사가 될 수 업습니다. 다만 관심은 내가 받은 것을 어찌 줄까에 있습니다. 그럼 사랑입니다. 예전 제가 교제하던 친구의 인터넷 닉네임이 '사랑받고 싶어'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갈망입니다.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거래가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을 줄테니, 너도 나를 이만큼 사랑해줘라고 생각하고 말하면, 사실 그 사람은 사랑과 돈을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거 아닙니다. 밀당과 거래로 하는 거 아닙니다. 위로부터 사랑을 받으니, 댓가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면 참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는 시대의 삶입니다. 현시대를 사는 이가 결코 살 수 없는 삶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통해 느끼는 것이 기쁨입니다. 하늘로부터 얻어 사람에게 주는 기쁨이니 끊어질 수 없는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예수를 부활시키신 이가 주시는 기쁨이니, 죽어도 죽지 않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즐김과 다릅니다. 즐김은 나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기쁨은 위로부터 옵니다. 즐김은 내 몸이 노쇠해질수록 약해지고 심지어는 끊어집니다. 그러나 기쁨은 내가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더욱 희망차게 합니다. 끊어질리 없기 때문입니다. 즐김의 사람은 할 수 없어도, 기쁨의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슬픔을 끌어안는 일입니다. 즐기지 못할까봐 슬픔을 멀리하는 이와 달리,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알기에 마땅히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부어지는 하늘의 사랑으로 이 땅의 슬픔을 녹여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슬픔이 가장 많은 날, 그 날은 내가 잠들듯 죽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보고서, 그가 죽지 않았다. 잠잔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아침이 되면 다시 일어나듯, 주의 날이 되면 우리 역시 다시 죽음의 이불을 걷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죽으면서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내가 꿈꾸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배신이 없는 세상, 포기가 없는 세상, 낙담이 없는 세상, 슬픔이 없는 세상. 곧 올곧은 것이 끝까지 올곧은 세상. 하나님과 사랑에 대한 내 사랑이 변하지 않는 세상. <성서>에서는 이러한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흥망성쇠가 사라진, 진리가 모든 사람의 겉과 속에서 한결같이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새로운 하늘과 땅을 얻는 위대한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현시대의 광야. 구름 기둥의 오는 시대. 가나안 땅, 곧 인간과 세계의 완성을 얻고자 우리는 뒤돌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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