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5~3:11
[1]
그러니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는데 있어서,
땅에 붙어 있는 여러분의 사지를 죽이세요.
곧 포르노에 나올 법한 씻기지 않은 행위와
악한 욕망과 더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더 가지려는 마음은 곧 그림자 예배입니다)
이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설득되지 않는 아들들에게 떨어집니다.
여러분도 전에 이런 것에 빠져서 행동했고, 이런 것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2]
그러나 이제 여러분도 이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지세요!
분노와 욕망과 악의와 조롱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들 말입니다.
서로를 속이지 마세요!
옛 사람을 그 하던 짓들과 함께 벗어버리고,
위로부터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어,
자신을 창조하셨던 이의 형상을 따라 깨침에 이르도록!
[3]
이에는 희랍 사람과 유대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고,
할례 받음이나 받지 않음이나, 이방사람인 스퀴데스 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그리스도.
우리 속에는 여러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이러한 성향이 강해. 이러한 마음이 커." 그러나 베르그송은 우리 속에 있는 감정들이 이렇게 양적으로 수치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속에서 강력한 욕구를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기억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환원될 수 없는 각각의 사건들로 기억됩니다. 여기서 뇌는 여러 기억들 속에서 공통적인 것들을 취사선택하는 기능을 하는 기관이지, 기억 전부를 관장하는 기관이 아닙니다.(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은 뇌를 넘어서 의식 차원에 영향을 끼칩니다. 사건 그 자체에 대한 기억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만약 연인을 향한 열망이 '더욱 커진다'면, 이것은 그 속에 있는 감정의 양이 커진게 아닙니다. 표현으로야 '더욱 커진다'라는 양적 표현을 쓰지만, 이 표현은 그 연인과 관련된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이 잦은 것'입니다. 왜 오늘 이 이야기로 시작했는지는, 뒤에 가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오늘 본문을 바울은 "땅에 붙어 있는 여러분의 사지를 죽이세요."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지를 죽이라는 말은 끔찍하게 들리지만, 추상적인 단어들로 범벅이 되어 있는 우리와는 달리, 고대인들은 신체를 매개로 한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어떠한 일에 일들에 대해서, 우리의 팔다리가 협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즉 "하지 말라"는 말의 구체적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합니까? "포르노에 나올 법한 씻기지 않은 행위와 악한 욕망과 더 가지려는 마음".
"포르노에 나올 법한 씻기지 않은 행위" 라는 번역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음란과 부정'이라 되어 있으나, 원어를 읽으면 '포르네안 아카타르시안'입니다. 이 포르네안에서 오늘날 포르노가 나왔습니다. 음란한 것입니다. 오늘날 '음란'에 대해서 '포르노'보다 더 효과적인 매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음란'은 추상적인 단어이지만, '포르노'는 구체적입니다. 구체적이란 말은 다른 거 아닙니다. 저 개인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포르노'라는 단어가 찔리는 사람입니다. 수치스럽지만 저는 소싯적에 이런 포르노 영상물에 중독된 바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남자 애들이라면 그러기 마련'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이것이 끔찍한 이유는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기억' 때문입니다. 자극적인 이미지가 시간 속에서 지속되고, 기억되며, 이 사건의 기억들은 의식에 직접적으로 던져집니다. 흔히 욕망이 커진다고 말하나, 그런 욕망 자체가 있어서 커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과거 경험들이 현실 의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그 기억들을 습관적으로 되뇌이는 것입니다. 결국 평소의 생각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격의 블랙홀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한동안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습니다. 제가 음란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의 압박으로 제 의지를 눌러놓은 것이었고, 기억과 의식의 차원에서는 마치 빵에 들어간 누룩마냥 여전히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삶의 한 쪽에서 이 부분은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어젯밤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기억과 의식의 측면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단언컨데, 바꿀 수 있는 생활의 습관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도 이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적 규제로 행동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은 의식과 기억이 새로워진 새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난번 언급한 '스토아'의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덕을 이루기 위한 목록들을 적어두고 지키려고 금욕하나, 의식과 기억의 차원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러한 행동들은 고쳐진게 아니라, 눌러놓은 것입니다. 눌러놓았으니 자유가 아니요, 눌러놓은 것을 치우면 다시 튀어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스토아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왜곡된 모습으로 드러난 것같습니다. 기억과 의식의 차원에서 생활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생활을 정말로 바꿀 수 없을 뿐더러, 바꾼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그 모습을 보는 타인을 속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 답다고 말할 수 없는 이 모습은, 저의 모습입니다.
'카타르시안'은 정결의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앞에 부정접두어 '아'가 붙었으므로, 신 앞에서 정결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씻기지 않은 행위"로 풀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는 어쩌면 한 가지입니다 '포르노에 나올 법한 씻기지 않은 행위', '악한 욕망', '더 가지려는 마음'. 바울은 이러한 것들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그림자 예배"입니다. '그림자'는 '에이돌라'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림자의 기능은 실체를 지시하는 기능입니다. 대지를 가득 덮은 그림자가 있다면, 구름이 태양을 가리진 않았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됩니다. 그림자 자체가 힘이 있어서 땅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은 태양과 구름에게 있습니다.(빛은 아버지요, 아들은 빛과 어둠을 가르는 아이콘입니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키는 것일뿐 힘을 가진게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 혹시 그것이 에이돌라는 아닌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대상이 없는 기도는 응답이 없고, 예배를 드려도 대상이 없는 예배는 '드린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일이 딱 그러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육체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에이돌라는 무엇일까요? 나는 무엇을 얻고자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빛이 나타나면 그림자가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버스가 나타났는데, 버스도착알림판을 보고 있는 사람은 돌봄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분명한 것은, 삐뚤어짐이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꾸 삐뚤어진 행위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에이돌라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행위인지 어찌 압니까? 우리 안에 희미한 빛이 그것을 알게 합니다. 곧 양심입니다. 우리가 잘못했는지를 아는데에는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삐뚤어졌음을 내가 알도록, 하나님은 삶의 경험과 상반되어 있는 그 진리의 빛을 우리 속에 죄다 넣어주셨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그 행동은 우리의 양심이 들어맞는 그 나라 이 땅에 이뤄질 때, 모두 소멸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소멸된 삐뚤어짐을 고집하는게 그림자 예배입니다. 빛이 이 땅에 드러날 때, 그림자는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소멸될 것을 위해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그림자 예배'를 개역성경은 이렇게 풀었습니다.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그토록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은, 우리가 삐뚤어지지 말라 하신 말씀이요, 또한 사람이 진짜 따라야할 '인간다움의 아이콘'을 알아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럼에도 철저하게 삐뚤어짐을 선택했고, 최초 선택은 기억과 경험을 통해 더욱 커져서, 그 삐뚤어짐을 인간 스스로 어찌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간의 삐뚤어짐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 인간다움의 아이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진노는 다른 것 아닙니다. '사람답게 살 수 없음'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답게 살고 있지 않음을 똑바로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하니, 더 하고 싶어서, 율법이 죄를 더하게 만듭니다. 인간다움이 점점 그 궤도를 이탈합니다.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있습니까? 내 인격에 못을 박는 고통입니다. 인내천이라, 하늘은 내 속에 계신데, 그 하늘에 대못을 박고서, 나는 내 사지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끌려다닙니다.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고 멋대로 살아가는 탕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 인격이 삐뚤어졌으니 내 하늘 아버지는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바울은 "여러분도 전에 이런 것에 빠져서 행동했고, 이런 것들 속에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삐뚤어져, 결국 그림자를 추구하고, 인간다움에서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의식과 기억의 차원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으니, 의식은 언제나 그 자리입니다. 의식이 언제나 그 자리니까, 과거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작심삼일", "뭐 눈에만 뭐만 보인다고", "사람은 안바뀌는거야", "제 버릇 개주나" 이런 말들이 다 이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과거 경험의 기억과 이미지들에 갇힌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외부의 강제로 행위를 규제하는 율법은 한계가 뚜렷하니, 율법이 필요치 않고,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의식과 기억의 차원에서부터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손에 안닿는 영역으로부터 어찌 구원이 있을 수 있을까요? 구원이 있다면 그 구원은 무엇일까요?
[2]
저는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윤회를 믿는데에는 그 속에서 무언가 인간다움에 대해서 생각할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윤회는 곧 순환하는 과거 경험입니다. 그런데 이 순환하는 과거 경험이 얼마나 강력한지, 사람의 의식의 차원에 남아서 사슬처럼 사람을 붙들어 놓습니다. 붓다는 이 윤회의 사슬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생의 기억'이라 말하는 과거 사건에 대한 경험들이 의식적 차원에 주어지고, 이것을 '업'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 업은 숙명적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몸을 떠나지 않고는, 죽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기억과 의식의 사슬은 강력함을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이 이에 갇혀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의식과 기억의 강력함은 전생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삶 때문입니다.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 당신의 기억입니다. 뇌가 순간순간 선택하고 판단하는 사건의 기억들은 오롯이 내가 내 몸을 가지고 지각으로 받아들인 경험들이지, 내가 다른 몸으로 겪은 경험들이 아닙니다. 또한 의식과 기억의 문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기억한다는 사실마저도 잊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해결된게 아니며, 죽긴 죽어야 하나 몸을 벗는 죽음이 끝인 것도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억'입니다. 기억은 지워서 극복하는게 아닙니다. 잊을 수 있기에 죽는다면, 이것은 극복이 아니라 회피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미지들은 지우는게 아니라,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각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기억을 의식에 던져, 그 의식으로 살아가는 시간 위에서의 삶이 필요할 뿐입니다. 다만 이 일은 죽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은 내가 정말 죽어서 몸적 삶을 살 수 없는 끝이 아니라, 내 이전의 의식과 기억을 뒤엎는 죽음입니다. 그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납니다. 그 새로남은 내 의식과 기억으로부터 내 사지를 컨트롤할 수 있는 새 삶입니다. 그 삶이 또다시 기억을 만들고,그렇게 의식과 기억은 순환하며, 새로운 사람을 창조해나갑니다. 곧 출애굽입니다. 구원입니다. 내 속에 없었던 새로운 인격과 함께 만들어가는 나의 새로운 경험과 기억입니다.
새로운 기억은 곧 나의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얻습니다. 이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억이 의식에 던져지면, 그리고 이 기억이 기억'들'이 되어 의식을 이끌어가면, 이전의 기억들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도 이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지세요!
분노와 욕망과 악의와 조롱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들 말입니다.
서로를 속이지 마세요!"
저는 어제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나는 분노와 욕망과 악의와 조롱과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들을 모두 벗어던진채, 아무도 속이지 않는 삶을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아침에 <골로새서>를 펴고서는 하나님께서 내 주위에 글자들을 둘러놓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상황에 꼭 필요한 의미들을 언제나 내 지척에 두시고, 내가 어디로 갈지를 일러주십니다. 상황이 맞아 떨어지고, 내게 필요한 것을 우연과 우연을 겹쳐 필연으로 만드시는 그 분 계심에, 나는 살아서도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낍니다. 그 분 바라시는 것이, 나의 올곧음이니, 이것이 분명히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내가 나의 의식과 기억을 덮고, 신과 함께 하는 새로운 경험으로 의식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나는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어제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났습니다. "구약은 공간적 출애굽이라면, 신약은 시간적 출애굽이다." 구약이 이집트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의 여정이라면, 이 구약의 출애굽 그림은 신약의 실체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2008년도에 제가 이 말 참 많이 했는데, 오늘에야 다시 기억이 났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구약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는, 신약의 새로운 차원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사건'을 위해 있습니다. 곧 현시대는 이집트요, 오는 시대(영생)는 가나안입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쳐있는 마지막날인 오늘날은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불만을 가지고 사는 1세대 사람들과, 하나님의 원리원칙으로 살고자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새로 난 사람들(2세대)'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이 오늘 나의 현실에 무엇을 드러내는지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는 다시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양이 죽었듯, 오늘 제가 현시대의 악함을 깨닫고 벗어남을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어린양입니다. 어린양 죽음을 통해 광야로 첫발 딛듯, 예수의 죽음을 통해, 나는 그리스도가 되는 첫발을 내딛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간은 가나안이 아닙니다. 광야입니다. 곧 현시대와 오는 시대가 중첩된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 살아가는 시간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현시대 속에 살고 있고, 누군가는 오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오는 시대를 맞이함은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가져옵니다. 새 시간을 부어주시는 그 분의 힘과 사랑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광야같은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며 살아가는 다시 난 사람입니다. 이집트의 고기냄새에 대한 기억이, 이제 저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기억이 필요합니다. 그 기억은 광야 한복판에서도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과의 경험입니다. 죽음을 이기시는 자와 함께 하는 새로남의 경험, 곧 부활의 경험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와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경험입니다. 이 경험이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고, 의식을 이끌어갑니다. 바울이 말한 것에 들어맞는지 확인해봅니다.
옛 사람을 그 실천들과 함께 벗어버리고,
위로부터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어,
자신을 창조하셨던 이의 형상을 따라 깨침에 이르도록!
옛 사람은 자신의 과거 경험과 기억에 의식이 붙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의식은 닫혀있고, 그의 실천은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새로워진 새 시대의 사람은 의식과 기억의 차원에서 새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삐뚤어짐에서 벗어납니다. 곧게 웃님과 닿도록 계속 서 갑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은 곧 자신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형상, 곧 '그이 예수'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현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똑바로 서계십니다. 새시대의 표상이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두신, 하나님의 아이콘입니다. 그이를 따라 나를 깰 수 있게, 나를 깨뜨려 그 분 알 수 있게, 더욱 더 가야 합니다. 가겠습니다. 곧 '염불'입니다. '염(念)'은 '생각함'이요, '불'(佛)은 '깨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염불합니다. 나를 깨기를 생각합니다. 예수를 보니, 내가 틀렸음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 닮기를 계속 생각하니, 나의 의식과 기억으로부터 나의 사지를 죽여야 함을 압니다. 나를 깨야 합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안됩니다. 깨고자 했으면, 실천에서 깨야, 기억이 되고, 기억은 또다시 의식에 던져져 새로운 경험을 낳습니다. 이 새로운 순환에서 윤회는 살아서 극복됩니다. 나는 새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그 분 손에 '빚어짐'은 곧 '빛 되어짐'입니다. 살아서 새 사람을 입으니 곧 부활입니다.
[3]
이 일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마음이 시원한지 모릅니다. 희랍사람이든 유대 사람이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율법에 따라 몸에 상처를 낸 사람이든, 아니든, 심지어 야만적이라고 정평이 난 스퀴데스 사람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이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곧 새로운 의식, 새로운 기억, 새로운 경험.
곧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내가, 그리고 모두가 그리스도가 되는 일 말입니다.
11541日(만31년 7개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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