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5~22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다 참석하였다.

그들은 보냄받은 이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너희들은 대체 뭔 힘으로, 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느냐?"


  그 때에 베드로가 거룩한 숨이 가득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씨알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만일 오늘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행한 '잘'한 일에 대해서, 

무슨 수로 이 사람이 구원얻었는지를 질문 받는다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의 씨알들이 분명히 알게 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나사렛에서 난 그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자들로부터 살리신 그이로,

바로 그이 안에서 이 (병든)사람이 우리 곁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성한 몸으로 말입니다.


이 예수는 돌입니다.

그 돌은 건축자인 여러분으로부터 버림 받았으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틀림없이 구원할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 말고는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막힘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본래 문법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고 붙잡았기에,

일단 놀랐고 또한 그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허나 그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는 서있는 것을 보고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명하기를 그 두 사람에게 공회에서 나가라하고, 서로 이렇게 의논하였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을 통해 유명한 표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다 알려져 버렸으니,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그 이름으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합시다." 


  그런 다음 그들을 불러 선언하기를,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여러분이 판단하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더욱 위협하고서 그들을 놓아주었고,

사람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징벌할지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이 일로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표적으로 병나은 이는 이미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었다.


1. 이야기를 손에 틀어 쥔 자

-당시 집권층들은 누구인가?


  지난 이야기를 잠깐 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만났고, 하나님의 숨받아 그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일어났고, 걷기도 했고, 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일으켜준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사건으로 뚜렷이 드러났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 사람 살린 사건이 영 고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전에서 종사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 계급을 '사두개인'이라 부릅니다. 이 사람들을 주축으로 이스라엘의 장로들,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다가 이 일의 자초지종을 묻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사람 살린 이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심문까지 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불만인걸까요? 자꾸 하는 이야기이지만, 또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 안에서 삽니다. 이야기가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럼 지배계층이라 부를만한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이 이야기를 손에 틀어쥔 자들이 바로 지배계층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일하던 사두개인들은 이야기를 손에 쥐고 사람들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바로 이스라엘 이야기 말입니다. 


  이스라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셨고, 이것을 인간에게 맡기셨으나 인간이 삐뚤어짐으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엉망진창을 바로 잡을 한 씨알이 등장합니다. 이 씨알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이스라엘은 이 말씀으로 살아 모든 민족의 빛이 됩니다. 바로 이 이야기로 이스라엘은 삽니다. 그리고 중요한건, 사두개인들은 이 이야기의 주인 행세했습니다. 이야기를 틀어 쥐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합니다. 사두개인을 비롯한 성전 지도자들은 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자신들을 섬기도록 만들고, 사람들을 로마와 목숨걸고 싸우도록 내몰았습니다. 


  지배계층이 이야기의 주인행세하는 것은 모든 민족 공통인가 봅니다. 이야기는 언론과 상관이 있습니다. 국민들은 언론이 전하는 이야기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 이야기 안에서 삽니다. 그럼 이 나라의 지배계층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언론을 손에 쥔 자들입니다. 언론을 쥐락펴락 하는건,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권력과 붙어 있는 언론은 참된 언론이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미 언론의 사는 방식이, 광고주 없이는 살 수 없고, 정치적 조류에 편승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언론의 구실을 다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 <뉴스타파>를 통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신문사가 원전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낼 때마다 기사당 천만원씩 받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영방송인 KBS에서도 퀴즈나 드라마에 원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막대한 금액을 원전 홍보비로 사용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물론 그 돈은 국민들의 전기세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 제목은 '언론도 핵마피아'였습니다. 원전이 제대로 컨트롤되지 못할 때, 얼마나 끔찍한 참사가 일어나는지를,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에서 똑똑히 지켜보면서도, 이 원전을 우리나라에 세우기 위한 누군가들이 있고, 그들이 손에 틀어 쥔 것은 이야기입니다. 언론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의 여론을 움직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엘티이뉴스라는 코디미 코너는 시사 풍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이번주 SBS에서 올려놓은 이번 주 방영분이 모조리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서버를 두는 데일리모션에 가야만 볼 수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 왜 그렇게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언론를 틀어쥐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베드로와 요한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마주하고 있습니다.



2. 세상의 중심이 드러난 진실 앞에서

-그들은 왜 부활을 싫어했는가?


  그 지배계층에 속한 자들이 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왔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물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대체 뭔 힘으로, 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는 할 말이 있었습니다. 


"씨알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만일 오늘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행한 '잘'한 일에 대해서, 

무슨 수로 이 사람이 구원 얻었는지를 질문 받는다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의 씨알들이 분명히 알게 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나사렛에서 난 그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자들로부터 살리신 그이로,

바로 그이 안에서 이 (병든)사람이 우리 곁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성한 몸으로 말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처음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그 병든 사람을 고치고서, 말한 바 있습니다. 베드로가 병든 사람을 고치고서 했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가 했다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로 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수'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는 어떠한 예수입니까?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신 예수입니다. 바로 그 예수로 이 병든 사람이 마치 부활의 예수처럼 오늘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왜 지배계층의 심기를 건드렸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부활은 진짜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손에 쥐고, 자신들의 정당성 삼으려고 해도, 부활은 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 그들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이야기에서 말하는, 세상을 바로 잡는 하나님의 씨알은 죽고 다시 산 사람입니다. 곧 예수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의 주제는 죽고 다시 살아남입니다. 안 그런 것이 없습니다. 책을 보아도 부활이 있고, 영화를 보아도 부활이 있습니다. 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잠든채 죽음을 맞이하지 않습니까? 왜 아이언맨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아나 더 강력한 몸을 입습니까? 왜 씨알도 안먹히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옳은 소리를 끝까지 내다가 죽어가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까? 진실이, 정의가, 사랑이 끝내 드러나서 풍성해질 것을 믿기 때문 아닙니까? 이것은 곧 부활 아닙니까? 그래서 부활은 옴팔로스입니다. 대지 위의 배꼽입니다. 이 땅의 중심입니다.


곧 일어나리라!


  그런데 이 부활 사건 앞에서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은 어찌 했습니까? 시체를 누가 훔쳐갔다고 여론 조작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야기를 붙잡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일에 몸이 익어서, 그 세상의 중심을 드러낸 역사적 사건 앞에서도 그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또 어찌 합니까?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을 통해 유명한 표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다 알려져 버렸으니,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그 이름으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합시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이야기를 손에 쥐고서, 이것으로 자신들의 지위나 누리려는 사람들입니다. 이야기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결국 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을 짜먹자는 일입니다. 이들은 이 악한 버릇 못고쳤습니다. 진실을 마주할 줄 모릅니다. 지배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까? 진실은 끝내 드러납니다. 아, 이런 말로는 모자릅니다. 예수의 부활 자체가 시작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시작으로, 이제 천지만물이 새롭게 되는 그 결말까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을 마지막 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새로움에 우리 몸의 부활도 있습니다.


  문제는 나와 당신입니다.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요즘은 부활을 믿는다하면 머리가 모자른 바보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부터 폭발적으로 자라나 로마를 뒤덮고, 온 유럽으로, 그리고 청교도들을 통해 미국으로, 그리고 지구 반대편 한반도로,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미지역으로 뻗어나감을 무엇이라 설명할 것입니까?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할 뿐인데, 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매 시대마다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까?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의 빈무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나와 당신입니다. 이 진실 앞에 어찌 반응하겠습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기준일 수 없습니다. 거긴 옴팔로스가 아닙니다. 당신은 죽고 다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이 세상의 기준이요, 생각의 바른 잣대이며, 인생의 나아갈 표적입니까? 부활입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그러니 이 부활에 서야 합니다. 여기가 역사라는 기나긴 시간과, 공간이라는 드넓은 차원이 만나 점을 찍는 가온입니다. 여기서부터 당신도 새로이 태어나야 합니다. 


3. 새 이야기, 새 공동체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그 이야기의 주인이라 주장했으나, 온갖 소외되는 사람들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중심은 마치 열쇠처럼,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줄곧 지켜온 그 이야기에 꼭 들어맞습니다. 그 새 이야기를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예수는 돌입니다.

그 돌은 건축자인 여러분으로부터 버림 받았으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우리야 '돌'소리를 들어도 별 생각 안나지만, 이스라엘의 이야기 안에서 '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에도 돌이 나오고, 다니엘서 2장에도 돌이 나옵니다. 그 돌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돌은 먼저 버림받습니다. 그 돌을 버리는 사람들은 건축자들입니다. 즉 집짓기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은 돌을 중심으로 다른 돌들이 모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건물을 지어갑니다. 그래서 버림받은 돌은 그 새로운 건물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집짓기를 맡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타락을 뒤집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은 사랑함으로 이룰 수 있는 사명이라, 그들은 온 맘과 정성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명을 버리고, 자신들의 생존에만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에게 찾아온 왕 마저도 생존 때문에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해한 그 예수가 살아나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 예수와 함께 연결된 사람과 사람들이 그 예수의 몸을 이뤄갑니다. 곧 그리스도들입니다. 그래서 거대한 집을 이룹니다. 곧 새로운 성전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수의 부활로 이제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하늘과 땅이 새로워지는 그 날로 역사는 달리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이야기는 새로워집니다. 이제 유대인 중심이 아니라, 예수 중심으로, 생존 중심이 아니라, 생명 중심으로 공동체는 자라고 자라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러한 역사적 현장에 있습니다. 


  사도, 즉 보냄받은 이들은 성경을 다시 고쳐 읽습니다.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잘 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성공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를 중심으로 성경을 고쳐 읽습니다. 글자를 해석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숨 받았기 때문입니다. 숨받아 예수 살아계심을 확실히 아니까, 달리 읽을 수 없습니다. 시편을 읽어도, 다니엘을 읽어도, 그리고 지난번처럼 다윗을 읽어도, 그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보입니다.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모든 이야기 속에 살아계셨던 그 중심을 봅니다. 그래서 이 새 성전 공동체는 새로운 이야기를 갖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배권력이 범접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틀어쥔다고 틀어쥘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부활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인데, 이것을 누가 주인행세 할 수 있겠습니까? 새 이야기라고 기존에 있는 이야기를 다 갈아엎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과거의 이야기들은 맞아떨어지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펜이 아닌 삶으로 써나갑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은 지배계층들이 왜곡해놓은 거짓된 이야기에서, 예수로 인해 새롭게 된 새 이야기 안으로 들어와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4장 뒷부분에서 그렇게 출애굽한 공동체가 어찌 사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4. 이런 이름이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틀림없이 구원할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 말고는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왜곡된 이야기에서 참된 이야기로 살게 하겠습니까? 왜곡된 이야기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왜곡된 이야기에 빠져 사는 줄 모릅니다. 이걸 알려면 숨받아야 합니다. 숨은 눈을 시원하게 하여, 세상을 바로 보게 합니다. 숨이 가르쳐주시는 것은 '세상의 삐뚤어짐'과, '하나님의 언약과 정의' 그리고 '그것으로 판단하는 옳고 그름'입니다. 이것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삐뚤어짐을 온 몸으로 겪으시고, 끝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길을 걸으셨으며,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늘로 가셔서,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을 깨닫도록 하늘 숨을 부어주십니다. 그 하늘 숨 부음받은 우리도 예수와 같이 세상을 살리니 참으로 인간답습니다. 마침내 하늘과 땅이 만나 세상이 새로워집니다. 이것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까? 역사 속에서 흘러내려온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힘. 예수. 이 이름만이 그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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