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1~4:4


[1]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엄마 뱃속에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도록,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데려다 주었다.

그 못 걷는 이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 하였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를 보시오!"


그는 무엇을 얻을까하여 두 사람을 기대하며 쳐다보았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리고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즉시 그가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2]

사람들 모두가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서,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서 빠른걸음으로 함께 걷는데,

모든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모여들어 경악하였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가 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왜 이 일을 놀랍게 여깁니까? 

또 왜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수(秀)나 경외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아래 위로 열심히 쳐다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이, 예수를 뚜렷이 드러내셨습니다.

그러한 그를 여러분이 (로마에)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러분은 빌라도의 면전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씻어나고 의로운 사람을 거절하고, 

오히려 살인자를 놓아달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생명의 지도자를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를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다 목격자들입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알고 있는 이 자를 그 이름이 튼튼하게 하였고,

또한 예수를 통한 그 믿음이, 이 사람에게 여러분  눈 앞에서 이토록 온전히 건강한 상태를 주었습니다.


[3]

그런데 동족 여러분, 나는 이제 압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가 겪어야 한다고 미리 알리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을 바꾸고, 돌이켜, 여러분의 삐뚤어짐으로부터 벗어나 기름칠을 받으십시오.

이같이 하면, 주의 얼굴로부터 다시 시원하게 숨쉬는 순간들이 올 것이며, 

또한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세우실 때까지는, 하늘이 그를 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씻어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예전부터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망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서 예언한 모든 예언자들도 이러한 날들을 알렸습니다. 


[4]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이며 언약의 자손입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조상들에게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씨로 말미암아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이를 일으키셔서 여러분에게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 아이는 여러분에게 복주는 아이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여러분들의 타락으로부터 등돌리게 함으로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언하는 것에 격분해서,

사도들을 붙잡아 다음 날까지 가두어 두었다. 이미 저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만 약 오천 명이 되었다.


1. 없는 예수, 있는 그리스도


  결국 그 날 벌어진 사건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가 다시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걷지 못한다는 건 무슨 의미겠습니까? '운명이다', '업보다', '팔자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유전자가 그렇게 태어난걸 어쩌겠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이것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운명이라 말하던, 업보라 말하든, 팔자라 말하든, 유전이라 말하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는데, 이 일을 어찌할 '수' 없었는데,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베드로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 그의 손을 통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수(秀)나 경외심으로 한 일이 아니라 말합니다. '수'는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 '수'입니다. '하는 수가 있어'라고 말할 때 그 '수'입니다. 능력과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유전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이를 일으켰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수'는 어떠한 '수'란 말입니까? 


  '수'를 들여다봅시다. 그 자리에는 분명히 능력이 있었습니다. 방법이 있었습니다. 운명을, 업보를, 팔자를, 유전을 뒤집어,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을 현실에 벌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누구의 힘입니까? 불과 몇달 전 이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해당했고, 다시 살아났으며,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몸을 감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했던 그 일이 베드로를 통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는 누구의 수란 말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힘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밉니다. 그 손을 엄마 뱃속에서부터 못 걷는 이가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잡고 일어나니, 발목에 힘이 들어가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손은 예수님의 손이 아닙니다. 분명히 베드로의 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듯이, 베드로의 손을 잡은 그 병자가 힘을 얻어 딛고 일어섭니다. 마치 베드로의 손을 잡은 그는, 예수의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 자리에 안계시지만,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없는 예수, 그러나 있는 그리스도. 그것도 얼마 전까지 배신자였던 자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통해서 여전히 예수의 힘과 사역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충격적인 진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가 어디있어?', '하나님이 어디있어?' 하지만 그 분은 세상을 거꾸로 뒤집는 그리스도들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현전하십니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들의 힘은 곧 예수의 힘입니다. 이것을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요? 마치 예수라는 발전소에서 그리스도라는 각각 집에 전기를 보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와 땅에 있는 그리스도는 전깃줄이 아니라 숨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숨을 들이마시고 내쉼으로 사람은 그 힘을 이어받아 세상에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바꾸어 사람을 건져냅니다.



  이 힘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힘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이어져 내려온 바로 그 힘입니다. '이어져 내려온 힘'이라 '이어 수', '예수'입니다. '구원하시는 역사 속에서 이어내려온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삐뚤어짐에 잠겨버린 세상 속에서, 바로 그 힘으로 사람들은 건지고 또 건지고 건져내셨습니다. 그 힘은 역사를 통해서 끊기지 않고 주욱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예수 이전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감동시켰던 그 힘이 예수를 통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뚜렷이 드러난 그 힘을 받아 사도들이 예수의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예수의 몸은 볼 수 없지만,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것입니다. 풀려날 수 없는 속박 속에서, 그 이어져 내려온 하나의 수로 사람들을 살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힘은 그럼 어디서부터 내려온 힘일까요? 역사를 관통하여, 사람을 관통하여, 예수에게서 뚜렷이 드러나고, 다시 시대를 따라 흘러가는 그 숨결은 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그 힘은 숨줄로 연결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분에게 닿아 있습니다. 분명히 닿아 있습니다. 바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한 분에게 말입니다. 따라서 그 힘을 받아 오늘 사람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된 그리스도입니다. 기름 부어진 사람입니다. 숨줄로 연결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오늘날도 무수한 그리스도들을 통해 이 땅에 없이 계십니다. 없는 듯 하지만, 분명히 계십니다. 그 분의 몸이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자리에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2. 믿지 않으니 죽였지, 그러나 다시 일어난 거인


  그런데 그 힘으로 사람이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사람들은 대경실색합니다. 어안이 벙벙해지고, 경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사람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 믿었다면, 그가 정말 일어난 그 일에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경악하고 놀랐다는 말은,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다들 생각조차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기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당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이 마침내 드러날 것이라 믿지 않으니 진실이 마침내 드러나는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정의가 마침내 이길 것이라 믿지 않으니, 정의가 드러나는 일에 깜짝 놀라, 세상에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이러한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왕을 죽인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실과 정의, 사람이 온전한 삶을 회복할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이어져 내려온 그 힘도 모르고, 그 힘이 하고자 하는 일도 모릅니다. 그들이 숨 주시는 예수를 죽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나 하나 살고자 죽였습니다. 진실보다, 정의보다, 올바른 한 사람보다, 당장 나 하나 사는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를 죽였다 이 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믿지 않음입니다. 믿지 않으니 살 수도 없고, 살지 않으면서 그렇게 사는 이를 고깝게 여깁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까발리는 그를 없애서라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무수한 민중들이 이러한 지도자들의 선동에 동조했습니다. 로마는 어떠했습니까? 식민지에 폭동이 일어나서, 자신에게 곤란한 일이 벌어질까봐 빌라도는 그 무고한 자를 죽이는 일에 눈감아 주고 그 일을 집행했습니다.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죄수중에 한 사람을 풀어주자는 빌라도의 말에, 이스라엘 민중은 혁명가 바라바를 풀어달라했지, 예수를 살릴 생각을 안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내 자리를 지키는 문제, 복수의 문제, 이러한 문제들이 진실보다 정의보다 사랑보다 중요해진채, 예수는 그 사랑없는 거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말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결국 진실은 드러났고, 정의는 다시 일어섰으며, 옳은 것이 옳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현실에는 그것이 불가능해보일지라도 그 불가능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정의롭게, 누구보다 정직하게, 누구보다 진실을 위해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옳음이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뚜렷이 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를 부활시킨 그 하나님의 힘. 그 힘이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그 힘이 흘러나오고 있어, 오늘 내가 그 힘을 받아 살고 살립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위임받아 내가 역사를 이어 나갑니다. 날마다 그 예수를 부활시킨 그 힘으로 불가능을 깨고 깨고 그렇게 나아갑니다. 바울의 말대로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그 죽음을 이겨냅니다. 하나님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 힘을 지금 내가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곧 숨입니다. 숨쉬는 나를 통해 그 힘이 이 땅에 드러납니다. 영광입니다. 그 예수와 내가 숨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숨줄로 무한의 힘이 공급되고, 그 힘은 예수를 죽음 가운데서 살렸던 바로 그 힘입니다. 그 힘으로 살리고 또 살리고, 죽음을 이기고 또 이깁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그 분의 뜻대로 사니 그 분은 우리의 머리요, 하늘에 둔 머리입니다. 온 땅에 그 분의 하신 일을 이어서 하는 육체들이 그 분의 몸을 이루니, 그 분의 몸이 온 땅을 덮습니다. 그 몸이 이 땅을 걷고 사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거인입니다. 머리는 하늘에 닿고, 발은 온세계를 덮는 거인입니다. 오늘날 누가 그리스도가 없다 합니까?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의 능력이 그 분을 드러냅니다. '나무가 성한지는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습니다. 숨 받아서 사는지 아는지는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힘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그 공동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3. 기름칠을 받으십시오.


  베드로의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이 거인의 몸에 참여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누구에게 합니까? 그 거인의 머리를 땅에 떨어뜨렸던 살인자들에게 합니다. 자신의 문제 때문에 정작 진실에 관심 없었던, 정의를 말라 죽이려 했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몰라서 그랬던 것 아니냐" 몰랐지요. 마음 속에 옳은 줄은 어렴풋이 알아도, 정말 옳은게 옳다고 현실에 드러날줄은 몰랐지요. 이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라는 거인은 자신의 몸을 열어줍니다. 그 몸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거룩한 동력으로 사람을 살리며 살 수 있는 새 삶을 살도록 합니다. 그러니 용서요, 사랑입니다. 누구나, 얼마나 자신이 흉악하든지간에, 다시 제 삶을 땅에 묻고, 다시 일어나 진실과 정의의 길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난 주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합니다. 거인으로서 사는 삶은 먼저 생각을 바꾸는 일부터 입니다. 그리고 생각만 바꾸지 않습니다. 삶을 돌이킵니다. 삐뚤어짐, 곧 죄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기름칠을 받으라 합니다. 이 '기름칠을 받으라'는 말은 '얼룩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올바름과 상관없이 굽어 있어서, 온갖 더러움에 내어주었던 나를 기름으로 닦아 씻어내는 것입니다. 기름은 숨님입니다. 거룩한 숨을 숨쉬며 사는 일은 나를 깨끗게 합니다.


녹슨 나를 닦아내는 콜라같은 


  이것은 매번 입으로 더러운 공기만 마셔서 콧속 점막이 약해진 이가, 철마다 비염으로 고생했던 과거를 씻고, 코로 숨쉬려고 애쓰고 애써서 점막을 강하고 청결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염이 이렇게 낫습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 그 숨은 몸을 깨끗게 합니다. 강하게 합니다. 숨의 산화작용이 모든 것을 녹입니다. 그러니 기름칠을 받으란 말은 숨칠을 받으란 말이요, 숨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깨끗해지는 사람이요, 올이 바르게 될 사람입니다. 진실에 침묵하지 않고, 정의에 자신의 몸 아끼지 않으며, 사랑하는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머리로 둔, 공동체라는 그 거대한 몸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이같이 하면, 주의 얼굴로부터 다시 시원하게 숨쉬는 순간들이 올 것이며" 이 날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우리 삶이 때때로 얼마나 답답하고 무미건조합니까?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다들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한 줄 숨을 시원하게 쉬는 몸을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아직 우리의 생각과 몸은 이 숨쉬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호흡을 제대로 못하니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면 우리네 정신이 시원하고, 그  정신에 따라 살 수 있는 몸생활이 되면 우리네 삶이 시원해집니다. 


  이번 주에 마태복음 25장을 보다가, 이러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25:1~6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 구절의 '슬기'는 '말'입니다. 진리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은 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름'입니다. 기름은 '숨'입니다. 참으로 진리를 알고 있는 자는 몸과 숨을 같이 가져옵니다. 그래서 숨과 몸과 진리는 같이 갑니다. 따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신랑이 왔을 때 기쁘게 맞을 수 있는 신부는, 진리를 알고, 그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숨도 있어,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는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아닙니다. 그러니 기름칠을 받으십시오. 진리를 아는 자, 이 숨을 구하고, 이 숨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모르는 자는 몸만 가졌을 뿐, 숨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 힘이 있음을 믿으면, 그 힘을 달라고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힘으로 여러분이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일에 뛰어드십시오. 그럼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늘의 뜻을 알고자 생각하고, 하늘의 힘 받아 살고자 애쓰면, 여러분은 신랑이신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셨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선 안되겠습니다. <입대후 여자친구>



4. 진정한 복, 이어 내려온 힘


  베드로는 이제 역사 속에서 그 이어 내려온 힘에 관해 말했던 사람들을 인용합니다. 모세를 말하고, 사무엘을 비롯한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까지 언급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타락을 뒤집기 위해 하나님이 부른 첫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씨로 말미암아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숱한 말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물질적인 복으로 말해왔습니다. 요새는 무슨 '신앙의 명문 가문'을 이루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분명히 써놓았습니다. '복'이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타락으로부터 등돌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서 사는 일입니다. 이게 복입니다. 다른게 복이 아닙니다. 돈 많은게 복입니까? 내 편 많은게 복입니까? 아닙니다. 숨길 따라 하나님을 호흡하며 사는 삶보다 더 귀한 건 없습니다. 돈이나 가문이나 세력에 비할게 아닙니다. 역사를 관통하여 이어 내려온 그 힘으로 살면, 죽음을 이깁니다. 정말 복 아닙니까? 이 복이 씨앗 예수를 통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부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힘으로 살 수 있음을 드러낸 새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시던 복이 바로 이 복이었습니다. 예수를 일으킨 그 힘으로, 오늘 내가 죽음을 이기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힘으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못걷던 자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일으킨 그 힘이, 이 자를 일으켰습니다. 운명이든, 팔자이든, 업보든, 유전이든, 그리고 죽음이든, 모조리 그 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힘으로 사는 그리스도. 우리가 그렇게 삽시다. 함께 죽음의 세상으로 부터 일어나 하늘로 머리를 둡시다. 우리의 손과 발로 사람들을 일으킵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말을 듣고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못하게 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돈'과 '가문'과 '세력'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던, 깨닫지 못한 지도자들이 이들을 잡으러 옵니다. 이 사람들은 부활을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이 사람들이 쌓아놓은 피라미드를 죄다 무너뜨리는게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꼭대기에 들어앉은 피라미드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이용해서, 돈 벌어 먹고, 자기 편을 늘리고, 자기 이름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진실과 정의를 깔고 앉아서 커진 피라미드 아닙니까?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피라미드라, 생명과 관련없는, 오히려 생존만을 추구하고서 사람들을 짜먹는 피라미드입니다. 사두개인은 사상적으로도 부활을 믿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왜 싫어하겠습니까? 부활은 세상을 뒤집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 받아서 올바르게 살 수 있다는 말은, 죽음에 벌벌 떨게 만들어서 쌓아놓았던 이 피라미드를 온통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두려워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갔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믿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부활시킨 그 힘을 받아 살기로 결심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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