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 : 메시아 안에서 행하라(2:6,7) 2. 아무도 너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배제하지 못하게 하라(2:8~32)
1) 메시아 안에서 이미 온전해짐(2:8~15)
2) 그러므로 유대교 규정에 복종하지 말라(2:16~23)
3. 새 시대에 합당하게 살아(3:1~4:6)
IV. 마지막 인사(4:7~18)
-2:8~32는 하나의 의미 단위
골로새서 2:8~12, 개인번역
[1]
누가 지혜사랑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붙잡아 놓지 못하도록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 건내 받은 사상을 따르는 것이고,
세상 질서에 대한 나라들의 신을 따르는 것이지,
메시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르침"
이사야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스토이케이아 : 지역과 인종들을 관장하는 신들(Caird <Principalities and Power>, p. 190)
이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고전 8:4~6
왜냐하면 그이 안에는 하나님다움이 가득 흘러넘쳐 몸적 차원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이 안에서 하나님다움이 이미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모든 세력과 권위의 머리이십니다.
[2]
그이 안에서 여러분도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할례는 그 살로 된 몸을 벗음, 곧 그리스도의 할례 입니다.
여러분은 그이와 함께 물 속에서 죽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이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힘을 믿어
일으켜졌습니다.
-골로새서 3:8,9 영육의 개념을 교정할 수 있는 본문들
갈라디아서 3:26~29, 개역한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한 사람의 새로움 뿐 아니라, 누구와 연대하느냐의 문제 -"...일으켜졌습니다"와 로마서 6:2~11 -"그들은 옛 세상의 통치자들이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골1:13) -고린도전서 4:8로 오해하지 않기
[3]
또한 율법에서 빗나가고, 살몸에 할례받지 않아 죽어있던 여러분을,
그이와 함께 살리시고, 모든 빗나난 걸음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따랐던, 그 손으로 법조항들을 써놓은 증서를
기름발라 깨끗이 지워버리셨습니다.
우리와 맞서는 그것을 한가운데서 들어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아서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십자가라고 답하는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가에 대한 대답 : 십자가 -13절과 에베소서 2:12 "하나님은 이미 죽어있던 너희들을 살리셨다" *첫째 부활(함께 죽고 함께 살기) : 로마서 8:17, 고린도후서 7:3, 에베소서 2:6, 골로새서 3:1, 디모데후서 2:11 "유대인들이 종말에 일어날 것이라 기대한 부활의 사건이 역사 안에서 벌어짐"
-"통치자들과 권력자들(나라들의 신)"과 "법조항들을 써놓은 증거" 전자는 무력화, 후자는 지우심. -14절의 질문들 i) 증서는 무엇?
ii) 법조문은 이 구절의 나머지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iii) 우리를 불리하게 한다는 말에 우리에게 반대한다라는 말을 첨가한 이유?
iv) 하나님은 어떻게 이 장벽을 지우시고, 제거하셨는가?
i) ii) 케이로그라폰, 토이스 도그마신
-모세의 율법이 기록된 문서
-죄의 빚에 대한 은유
-1세기 유대교 묵시문학에 사용된 용례로 '모든 사람의 죄가 기록된 책'
iii) "지워버리셨다", "들어올리셨다"
-갈라디아서 3:13, 고린도후서 5:21
-메시아는 자신의 백성을 "대신/대표"하고(들어올려짐), 그 들어올려진 율법의 저주는 죄없는 이의 죽음으로 폐기되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남(고후 5:21) iv) 대표하고 폐기함으로
[4]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벗겨진 그이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시고,
오히려 그이 안에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15절의 질문들
a)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벌어진 일은 무엇?
b) 그 일은 누가 행했는가?(하나님/메시아)
c) 그 일이 어디에서 행해졌는가?(메시아 안에서/십자가 위)
[1]
"붙잡아 놓다"라는 말은 발음은 '쉴라고곤'입니다. 마치 유대의 회당인 '시나고그'와 비슷하게 들립니다. 아마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했던 것을 염두해두고 있는듯 합니다. 갈라디아 공동체를 분열시키려는 몇몇 유대인들은, 씻어난 이라도 모세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래선 안된다고 다급하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들의 잘 닦아놓은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 사상 뿐만 아닙니다. 당시 희랍에 유행하고 있었던 스토아 학파의 사상 역시, 그저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는 이론에 지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살면서 따라야 할 지침이 될 수 없습니다. <햇님달님>으로 치면 썩은 동아줄입니다. 유대 사상이든, 스토아든 붙잡아봐야 그 속은 비어있습니다. 생명 없습니다.
어제는 잠자는 것도 잊은채 베르그송을 읽었습니다. 베르그송은 '지성'이 우리에게 사물 그 자체를 맞닥뜨릴 수 없게 왜곡시킨다고 말합니다. 역사가 시작된이래 '시간'은 끊어진적이 없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지성은, 그 시간을 잘라서 사물을 분석하기 때문입니다. 분석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범주들을 설정해놓고, 사물의 일부가 그 범주에 맞는지 안맞는지를 따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물은 쪼개지고 나누어져 전체와 점점 멀어집니다. 시간 속에서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채 지속되고 있는 그 사물 자체를 경험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인간 지성의 한계입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장미를 연구하려고 잎도 떼고 꽃잎도 떼고 나니까, 각각 뭔지에 대해 할 말은 생겼는데, 결국 장미 전체의 아름다움은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성이란게 이렇습니다. 어려운 말, 복잡한 말 늘어놓지만, 결국 이 세상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지성적인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이모저모로 따져보아, 일반적인 범주를 발견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나눠놓으며, 이것 저것 많은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그를 만나는 것입니다. 시간의 지평 위에서 '동일시'입니다.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니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예수는 오늘 나를 통해 세상에 계십니다. 나는 십자가 아래서 울고만 있지 않고, 그 분과 함께 매달립니다. 그러면 그 분이 보셨던 것처럼 나도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동일시'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되고, 예수는 내가 되었던 수많은 기억들을 만들어 갑니다. 나의 현재는 그 기억들을 삼켜서 또다른 미래를 창조해나갑니다. 그렇게 시간의 지평 위에서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학문적으로 따져서가 아니라, 그저 누가봐도 분명하도록.
[2]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다움이 가득 흘러넘칩니다. 하나님다움이 무엇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분 다운 무언가가 흘러넘칩니다. 몸적 차원으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다움이 흘러넘치는 이 몸은 누구의 몸입니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몸만이 아닙니다. 내가 그에게 팔렸으므로, 곧 내 몸은 그의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이 그리스도요, 내 몸에서 하나님다움이 흘러넘칩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이에 관해서 부연설명을 합니다. 그이는 "모든 세력과 권위의 머리"입니다. 세력은 '아르케'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아르케라는 단어를 보면 evolve라는 영어 단어가 생각납니다. e는 밖으로고 vol은 회전입니다. 마치 두루마리가 밖으로 펼쳐지듯, 무언가가 밖으로 드러나고,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아르케로부터 모든 것이 나옵니다. 발전과 진화의 시작이 바로 아르케입니다.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부터 모든 만물이 하나님다움을 힘입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진정한 아르케입니다. 세상에 마치 자신이 근원인양 서 있는 아르케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머리를 나타내는 표지판일 뿐입니다.
권위라고 풀어놓은 말은 '엑수시아'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 역시 "밖에(ex) 있게(ousia) 한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서, 그것을 밖에 드러내기 때문에, 권위, 권한이라고 풉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밖으로 드러내는 권위와 권한은 몸에 부여됩니다. 그래서 몸은 매개입니다. 신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은 '권위'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요, 그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숨 받아 살아가는 사람의 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세요. '가장 낮은 자를 섬길 수 있는 몸은,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권위가 진짜 권위이며, 하늘 아빠의 권위입니다. 위에 '하나님다움'이란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이스라엘 남자 아이는 난지 8일째가 되면, 성기의 표피를 잘라내어, 하나님의 백성임을 신체에 표시했습니다. 곧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표피가 잘려나간 성기를 볼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를 통한 그리스도들의 모임은 새로운 할례를 받습니다.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입니다. 곧 손이 아닌 숨으로 하는 할례입니다.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정도의 할례가 아니라, 자신의 몸 전부를 떼어내어, 하나님의 숨결 안에 집어넣는 할례입니다.
성기의 살점을 떼어내어 정체성을 표시하는 것은, 인간의 性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성적존재입니다. 나는 남자를 만나든, 여자를 만나든 남자-남자로 만나고, 남자-여자로 만납니다. 나의 정체성은 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정말 성은 근원적입니다. 이 성적(性的) 차원이 근원적이라는 사실을 프로이드만큼 잘 보여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됨의 근원은 성(性)이 전부일 수 없습니다. 더 깊은 차원이 있습니다. 성보다 깊은 차원이기에, 성이 다스림을 받아야 할 더 근원적 차원입니다. 곧 본성(本性)입니다. 본성은 본래 우리가 성에 묶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성을 넘어서 인간됨과 생명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직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인간'이 아니라, '본성적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성의 뿌리를 찾아, 성을 성답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방종하는 성을 할례라는 의식법을 통해, 외부의 강제력으로 성을 묶어두었다면,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는 자신의 근원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닿게 하여, 안으로부터 새롭게 합니다.
거룩한 숨결이 인격의 뿌리에 닿은 이는, 그 뿌리로부터 다시 일어섭니다. 그 튼튼한 토대에 발을 딛고서, 출렁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도 어찌할 수 없는 바로 그 견고함으로, 땅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섭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부활입니다. 땅을 뚫고 솟은 나입니다. 저는 이것을 직관하게 되었는데, 좀 더 살고 나서야, 저의 몸적 차원으로 더 확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고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하실 수 있음을 믿기에, 오늘도 그 과정중에 있습니다. 이 지속은 제가 출생한 이래로 단 한번도 끊어진적이 없습니다. 지금 제가 직관하는 것들이 저의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순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