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20~3:4
[1]
만일 여러분이 세상 질서에 대한 스토아의 학설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어찌 그러한 세상 질서 속에서 사는 것 마냥 (그들의) 글자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까?
"붙어있지 말라, 맛보지 말라, 손대지 말라"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끝을 정하고 가르친 것을 따르는데,
하면 할수록 죄다 망가짐에 이르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지혜있다 하는 말들을 따르지만,
그 지혜라는 것은 제멋대로의 숭배나, 눌린 생각이나,
몸을 괴롭게 하는 경험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몸을 채우기 위해 주목할 만한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2]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으킴 받았다면,
위엣 것들을 찾으십시오.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엣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땅 위의 것들을 생각지 마십시오.
[3]
왜냐하면 (땅의 것을 추구하는) 여러분(의 삶)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진짜)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즉 여러분의 삶이 드러날 때에,
그 때 여러분도 그이와 함께 뚜렷이 드러날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철학 공부를 좀 해야 합니다. 스토아의 학설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가뜩이나 읽히기 어려운 글인데, 철학이라는 말에 '뒤로'버튼을 누르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1]
-스토아 : 존재의 불안을 극복하기
스토아 학파는 헬레니즘 시절에 대대적으로 유행했습니다. 스토아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제논의 역설"로 유명한 '제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시조격입니다. 그리고 고결한 자살을 택한 세네카,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스토아의 학설에 심취했던 사람들입니다. 스토아는 헬레니즘 시절, 지식인들이 믿고 살아가는 가장 대표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폴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라는 그의 책에서 스토아와 기독교를 경쟁관계로 놓았습니다. 그만큼 스토아는 기독교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 쓰는 '로고스'라는 말도 원래 스토아에서 정초한 것을 기독교에서 차용한 것이니까 말 다했지요. 물론 나중에 양쪽이 말하는 로고스의 그 의미는 충격적으로 달라졌습니다만.
차이는 어디에 있느냐하면, '불안에 대한 자기 긍정 방식'에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불안이 있습니다. 이 불안은 '자기 존재가 부정되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흔히 친구 사이에서도 종종 '거절감'을 느낄 때가 있지 않아요? 내가 타인에게 용납되지 않을 때, 사람은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가 부정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긍정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숙제라 하겠습니다. 종교만 그렇겠습니까? 사람은 이것 때문에 살아갑니다. "남들은 저렇게 하잖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심리는, 남들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면, 그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생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겠지요. 집단사회에서 타인에게 용납되지 못하는 나는, 먹고 살기 힘든 나일테니까요. 그런데 스토아는 이것을 정면으로 돌파합니다. 그들이 내세운 방법은 '덕'입니다. 즉 '덕을 추구하는 고결한 나'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대 지식인들이 이 '덕'을 추구하며, 모든 불안에서부터 벗어난 존재이기를 갈망했습니다. 세네카가 독배를 든 사건은 유명하지요. 네로 황제를 암살하고자 했다는 혐의로 그에게 자살이 언도되었습니다. 유언이 이러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지상의 부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 덕이 높은 삶의 본보기를 남긴다."
간지가 납니다. 스토아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덕은 최종 목적이었습니다. '덕을 추구하는 나'가 곧 존재의 불안을 해결하는 그들의 방식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각자 이성을 통해서 덕을 발견하고, 그 덕에 위배되는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열심히 지켰습니다.
-스토아가 말하는 덕과 세계질서
그럼 그들이 말하는 '덕'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들의 덕은 세계의 이치와 질서에 합한 삶입니다. 이 말은 참 좋은 말로 들리지만, 그 보다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가 중요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을 결정할테니 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세계는 제논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합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거북이를 아킬레우스보다 1km 앞에서 출발시킨다. 아킬레우스가 1k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0.1km를 가고,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0.1km를 가면 그동안 거북이는 0.01km를 나아간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린다 하여도 그 시간동안 거북이는 움직이므로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왜 따라잡을 수 없을까요? 왜 이러한 역설이 생겼을까요? 베르그송은 제논이 시간을 공간화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요근래 이 내용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게 됩니다. 시간은 시작된 이래로 단 한 번도 끊어진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적 사고는 잘린 적 없는 시간을 잘라놓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을 나누어, '속성'이라 이름 붙이지요. 제논의 역설에서도, '시간'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지만, 이 시간이 균등하게 잘려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시간은 더 잘게 더 잘게 잘려나가면서 거북이와 아킬레우스 사이의 공간의 틈을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의 지성이란게 이렇습니다. 시간을 잘라놓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서, 온통 현실을 왜곡해 놓습니다.
스토아의 세계는 이 제논의 철학에 기초해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해하는 세계는 시간을 공간화한 세계입니다. 아킬레우스를 거북이가 앞서듯, 모든 것은 질서로서 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이 덕이라 말하는 것은, 이 고정된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곧 아낭케의 세계입니다. 그 아낭케는 메로스라는 부분을 만들고, 이 메로스는 다시 모이라라는 전체를 이루며 돌아갑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 질서를 인정하고 순응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덕'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결정론', '숙명론'이라는 말이 이들에게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인간은 그 속에서 자유를 말할 것이 없지요. 이것이 그들의 세계관입니다. 자유라 말한다면, 고정된 세계질서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고결한 자유입니다.
-스토아의 문제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스토아가 유행하던 당대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후에 '니체'에 의해서 신랄하게 폭로되었습니다. 그의 책 <도덕의 계보학>의 세번째 논문에서, 덕에 대한 추구를 이렇게 말합니다.
"금욕적 이상은 우선 가장 정신적인 영역 안에서도 언제나 한 종류의 현실적인 적과 가해자들을 가지고 있다."
즉 스토아의 금욕적 이상은, 이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미개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금욕'이라는 것 자체가 욕망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욕은 진리가 아니라, 그저 '남과 다른 나 자신의 고결함'에 지나지 않다는 말입니다. 니체의 말을 더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인류 위에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그리고 금욕적 이상은 인류에게 하나의 의미를 제공했다! 금욕적 이상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는 전혀 아무 의미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적 이상은 모든 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존재했던 최상의 '어쩔 수 없이'였다...(그러나) 보다 더 삶을 갉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삶을 갉아먹는 말이 딱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스토아가 추구하는 '덕'은 냉담과 냉소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쁜 감정 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을 비난합니다. 현자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버틀란드 러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스토아를 철학자가 인류를 이롭게 하겠다는 바람으로 행동하면 안되는 까닭은...어떤 경우에도 당신 자신의 덕 이외에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는 선을 행하기 위해 덕을 얻으려 하지 않고, 덕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한다."
자기 자신이 덕을 얻어서, 존재의 불안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전부입니다. 그들이 불안에서 벗어남을 표현한 말이 '영혼'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벗어나 '세계 영혼'과 하나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체인 몸은 천시되고, 그저 영혼을 방해하기에, 금욕적 삶으로 억눌러야 할 대상이 됩니다. 더불어 이들에게는 세상의 질서를 바꿀만한 명분도 힘도 없습니다. 잘못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메로스와 모이라로 돌아가는 거대한 질서의 부분일 뿐입니다. 해야 하는 것은 그저 나 하나 질서에 순응하며 덕을 얻으면 그만입니다. 끝을 모르는 덕의 추구는, 몸을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요즘의 스토아
제가 이토록 스토아를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오늘날도 스토아 철학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진화와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고정된 세계를 믿고, 그 고정된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를 추구하며,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상대적 의식으로, '그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는 무언가'가 가지고 있는 허위를 감추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바꿀 수 없다며, 냉담과 냉소로 세계를 바라보며, 제 속에서 세계를 바꿀만한 어떠한 명분과 힘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 말입니다.
인간은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금욕적 삶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워내면 낼수록,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자랑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비워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더욱 채워버린게 됩니다. 극단과 극단은 만난다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다른 것으로 온통 채운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결국 '나'만이 남습니다. 이기주의가 문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인간은 비우나 채우나 자신만을 알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존재의 불안에 허덕이며, 세계의 문제를 직시하고 바꿀 수 있는 명분과 힘도 없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조소할 뿐입니다.
그러니 살몸을 죽이려고만 해도 안되고, 살몸 하나 살려보려고 전전긍긍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살몸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받은 표상이요, 세계질서를 올바르게 되돌려놓을 신이 주신 도구입니다. 세계질서는 그 자체로 선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노자가 틀렸고, 스토아가 틀렸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질서가, 우리의 내면의 도덕과 일치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히틀러와 같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세계질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뒤틀렸기에, 우리가 순응해야 할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중용'이 있다면, 그것은 일체의 감정을 지워버린 냉소와 냉담이 아니라, 이 몸을 제대로 쓰는 데 있습니다. 세계를 구원하시는 분의 뜻을 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뜻이 곧 중용입니다. 절대자가 참된 균형을 주십니다.
정말 주십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살몸을 살몸답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스토아에는 없다고. 그럼 살몸을 정말 살게 할 그것은 무엇입니까? 숨입니다.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입니다. 그 숨결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그의 생각으로, 그의 심정으로, 인간과 세계를 공감하며, 함께 구원해나가는 그 사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곧 나의 고결함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입니다. 제3의 존재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새 힘입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이어져 내려온 힘. 바로 예수이십니다.
[2]
우리는 스토아 학설로부터 죽은 사람들입니다. 상관없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스토아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나를 채우다 못해, 세상으로 흘러넘치게 하는 그 숨이 없습니다. 세계영혼을 말하나, 이 세계영혼은 단어만 똑같지, 그간 말씀드린 '숨'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세계영혼으로 몸을 채워 세상을 바꾸지 않고, 오히려 몸을 버려 세계영혼에 들어가고자 하니, 몸의 의미도 모르고, 오히려 몸을 망칩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설로부터 죽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곧 예수께서 보여주신 생명이고, 우리는 예수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그 생명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순간 죽음은 아낭케일 수 없습니다. 죽음이 세계를 덕지덕지 고정시켜놓은 본드일 수 없습니다. 약동하는 인간과 세계는 결국 죽음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매순간 나아가는 힘이 됩니다. 마치 자동차의 엔진과도 같습니다. 예수의 과거 사건은 나의 연료입니다. 그 연료를 주욱 받아들여, 성령의 점화플러그를 작동시킵니다. 그렇게 연료와 산소가 만나면 폭발적인 힘이 발생합니다. 곧 듀나미스입니다. 이 힘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의 살몸이 전진합니다. 나의 살몸은 죽음이라는 불길 앞에 녹아버릴 이카루스의 밀랍이지만, 그럼에도 믿는 구석 있습니다. 살몸이 살몸이 아니게 되는 그 날, 살몸이 얼몸이 되는 그 날입니다. 그러니 두렴없이 악셀레이터를 밟습니다. 녹아버려도 좋습니다. 만물을 말과 숨으로 있게 하신 그 분이 나를 기억하시기만 하면, 그래서 내 이름을 부르시기만 하면, 나는 다시 있습니다. 영원히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에게 바울은 위엣 것을 찾으라 말합니다. 여기서 '위'는 하늘입니다. 그렇다고 고도가 높은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하늘과 땅의 경계는 참으로 모호하지요.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공간은 하늘인가요, 땅인가요. 하늘이기도 하고 땅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하늘을 닮아 머리가 둥글고, 땅을 닮아 발이 두 개입니다. 유가에서 말하듯, 인간은 하늘과 땅의 중간자적 존재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언제나 땅과 하늘과 함께 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시원합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차원입니다. 땅은 보이는 차원입니다. 따라서 위엣것을 추구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차원을 생각하란 말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차원이라고 해서, 내 멋대로 상상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 보이지 않는 차원에 하나님이 계시고(성경은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라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옳은 쪽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위엣것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오른쪽은 옳은쪽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뜻하는 유대 재판장에서의 표현입니다) 삶의 모습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엣것, 즉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삶을 우리의 몸으로 구현해나갑니다. 땅의 것을 보고, 하늘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세상이 죽음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어찌할 수 없는 닫힌 세계로 생각했다면, 이제 생각을 바꿀 때가 왔습니다(생각바꿈meta.noia은 '회개'로 번역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긴 것을 보고, 세상이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했음을 봐야 합니다. 곧 새로운 시대. 영생입니다. 부활이 새시대를 열어 재꼈습니다. 죽음을 이김에 우리의 삶의 참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류영모 선생은 '하루'를 '할우'라 풀었습니다. '위엣 것을 할 오늘'이란 말입니다. 위엣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이것을 생각합시다. 그 분은 우리와 무척이나 가까운 그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숨줄을 따라갑시다. 나의 덕이나 고결함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에 불과합니다. 내 멋대로 보이지 않는 차원을 추정하고 예배해봐야, 대상없는 예배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위엣 것은 손으로 닿을 순 없으나, 지금 이 손으로 창조할 수는 있습니다. 그 창조의 숨결이 우리의 손을 지나, 이 땅에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위엣 것을 생각합시다. 땅의 것들은 위엣 것들을 따라 바꾸고 변화시킬 것들이지, 고정된 질서가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숨주시니, 그 숨을 '웃숨'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생각을 하니까 괜히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웃숨을 받으니, 참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알겠고, 인간답지 않은 면모들에 대해 냉담과 냉소가 아니라 따뜻한 웃음이 나옵니다. 정말 올바른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3]
땅의 것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러한 나는 생물학적 몸을 위해서만 사는 나입니다. 생존에 저당잡힌 나입니다. 다리를 뿌리삼아 땅에 박아버린 멍게와 같은 나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들이 모여 예수를 죽였고, 그 예수를 살해한 공범이 바로 나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십자가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나도 죽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합시다. 십자가는 '스타우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스타우'라는 어근은 '늘려놓다'라는 뜻입니다. '로스'는 '짓누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형벌은 사지를 늘려놓고, 짓누르는 형벌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내가 십자가에 매달리면, 나는 늘어납니다. 물론 아프겠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온 세계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의 생각이 내 생각되고, 차별없이 섬기시는 그 분의 몸이 곧 나의 몸됩니다. 나는 세계를 덮도록 커집니다. 나는 곧 그리스도가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했습니다. 곧 전체를 위한 나의 아픔과 희생입니다. 이것이 나의 십자가요, 십자가를 지는 것만이 나를 크게 합니다. 스토아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어느 국가에도 귀속되지 않은 세계시민이라 불렀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세계의 이치를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知的)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진정한 세계시민은 전체를 위해서 십자가 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세계시민 정도가 아니라, 모두를 가족처럼 생각하니 우주가족이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시니, '하나님의 우주 가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형제들'이 곧 이러한 하나님의 우주 가족을 뜻합니다. 머리 굴려서 가족이 아니라, 살몸을 올바로 사용하기에 가족입니다. 살몸의 올바른 사용은 전체를 살리는데 쓰는 것입니다. 이러라고 주신 몸입니다.
[3]단락에서, 생명이라는 단어를 '삶'이라 바꾸니 의미의 새로운 차원이 드러납니다. 저는 생명이 무척이나 추상적인 단어라 생각합니다. '생명'보다 '살림'이 좋다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아낼 모습들이 곧 생명인 것입니다. 그 삶에 대해서 바울은 두 가지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함께'요, 다른 하나는 '안에' 입니다. '함께'는 '지금 돕는다'는 말이요, '안에'는 출처를 뜻하는 말이겠습니다. 우리의 참된 삶의 출처는 하나님이요,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서 살 수 있도록, 가장 먼저 그리스도되신 분이 우리를 숨으로 도우시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세계보다 크신 분이라, 그 하나님 안에서 인간과 새로운 변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하면, 곧 예수요, 우리가 따라가야할 살림살이의 모범입니다. 그 모범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날 때, 그때 비로소 나는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다는 반증이므로, 죽음을 이기시는 그 분이 나의 존재 근거가 되어 주십니다. 나의 나됨을 찾기 위해 인류는 먼 길을 돌아갔으나, 참 나의 발견은 고정된 세계질서와 죽음에 있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나'는, 세계보다 더 크신 하나님 안에, 그리고 모두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너무 좋습니다. 신(神)납니다.
"그 때 여러분도 그이와 함께 뚜렷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살몸을 입은 내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공감합니다. 같은 싸움 싸우신 그 분을 알겠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찾은 나는, 죽음에 굴복할 수 없는 나입니다. 하나님을 올곧이 믿는 나입니다. 세계질서를 개혁할 나 입니다. 그렇게 나를 통해 사람과 세상이 인간다움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자랑이 아니요, 나를 이렇게 빚어가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이 됩니다. 그런데 그를 드러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와 함께 나도 뚜렷해집니다. 하나님이 빛내시는 그이의 영광 안에서.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11537日(만31년 6개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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