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2:5에 해당하는 본문은 본론(2:6~4:6)에 들어가기 앞서, 얼굴을 보지 못했던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상세히 소개하고, 골로새서의 저작 동기를 밝히는 문단. 첫 부분(1:24~29) :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역의 본질
두 번째 부분(2:1~2:5) : 이 사역과 골로새 교회의 연관성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
-인사말(1;1,2)를 제외한 1:3~2:5에 해당하는 내용은 모두 "II. 바울 소개와 주제 도입"에 해당한다.
I. 인사말(1:1,2)
II. 바울 소개와 주제 도입(1:3~2:5)
1. 감사(1:3~8)
2. 기도와 묵상(1:9~23)
3. 바울의 사역과 저작 동기(1:24~2:5)
III.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한 호소(2:6~4:6)
골로새서 1:24~29
[1]
이제,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겪는 어려움들을 기뻐하며,
그리스도 고난의 남은 것들을 내 살몸에 (대신) 채워나갑니다.
그이의 몸, 곧 공동체를 위하여 말입니다.
내가 공동체의 머슴된 것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집안일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인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흘러넘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고난은 교회를 위한 고난
고린도후서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에베소서 3:13
나의 환란 = 너희의 영광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이후에도 고난이 남아있는가"의 문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겪음은 곧 교회의 겪음이 되다.(로마서 8:18~25) 현시대(갈라디아서 1:4)에서 오는시대로의 분리는 고난을 수반한다는 "메시아 탄식"의 랍비 개념. "해산의 수고(로마서 8:22)" 메시아 탄식의 시기로서 "승천~재림". 메시아께서 사랑의 자발적 고난으로 알려지셨듯, 교회도 이렇게 알려져야 한다. 두 시대 이론.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흘러넘치다"의 의미
[2]
이 비밀은 시대와 세대로부터 감추어진 것인데,
이제는 그의 씻어난 이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깨닫길 원하십니다,
왜 이 비밀이 민족들 가운데 가득한지를.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마침내) 드러난 소망이십니다.
-"비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고린도전서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씻어난 이들에게 드러나 이방인들이 확인할 수 있는 비밀. 마침내 공유된 영광(로마서 5:2),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로마서 8:10.
로마서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다
[3]
바로 그이를 우리가 전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품게 하며,
모든 사람을 지혜로 가르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고자 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나는 힘을 다해 일합니다.
내 속에서 힘내시는 그의 힘을 따라
그 힘으로 힘껏 싸우며 말입니다.
-"모든(희랍어 '파스')"은 "각각"
-바울의 일은 "전하고, 마음에 품게 하며(혼란을 바로잡고), 지혜로 가르침"과 "완전한(텔레이온) 사람으로 세우는 일"
-그들의 삶과 그이의 삶이 자타불이가 되도록.
-"성령"과 "힘껏" : 칼빈과 알미니안의 문제?
본문이 왠지모르게 익숙하다 싶었더니, 지난 8월에 한 번 다뤘던 본문이었습니다. 번역을 다 해놓고 전체를 보고나서야, 그런 줄 알았습니다. 8월에 쓴 것과 얼마나 다른가 비교해보았더니, 그 때와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렇듯 생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같은 글자에 대해서도 3개월만에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는데, 다른 생각은 오죽할까요? 그런데 이건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움직이고 변해야 합니다. 위험한 쪽을 따지자면, 생각이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진실 앞에 반응할 수가 없게 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의 생각을 멈추게 하는 짓은 사람들을 제 맛대로 움직이려는 지배권력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이야기(언론)를 손에 쥐고, 사람들의 생각을 굳게 만듭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케케묵은 수법입니다. 지금 이 말을 왜 하느냐, 이번 주 설교에 대한 홍보입니다. <뭔 힘, 뉘 이름?> 이란 제목의 설교원고가 메인화면에 떠있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이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시간을 가르는 칼과 같습니다. 자기 속에서 '오는 시대'가 시작된 사람만이 '이제'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할 수 없었던 과거가 이제 앞에서 잘려나갑니다. 내게 쏟아지는 오는 시대를 살겠다고 하는 사람의 지금이 곧 이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설명을 드릴만큼 드린 줄 압니다.
바울은 '이제' 여러분들을 위해 겪는 어려움을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되겠습니까? 남 때문에 겪는 고생을 기뻐하는게 사람으로서 될 말입니까? 잘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자꾸 '이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타인을 위한 고난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그의 삶 속에서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말을 이상히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서야,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것을 제 속에 채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이제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입니다. 기름은 곧 성령이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그래서 그 숨결 받으면 곧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로 호흡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어찌 살아갑니까? 예수와 같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들이 모여 거대한 몸을 이루고, 예수는 그리스도들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만약 여러분들이 숨 받았다면 여러분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숨결을 따라 이제 예수가신 길을 따라가야 할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르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마치 숨 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코 입니다. 숨은 코로 마시지만, 몸 전체에 공급되듯 예수께서 호흡하던 그 숨결이 그의 몸 구석구석, 모든 지체마다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의 지체입니다. 그의 기름 부어진 몸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입니다. 마땅히 숨결따라 살며, 머리의 뜻따라 움직여야 할 그의 수족(手足)들입니다.
이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서 바울이 머슴되었다 말합니다. '집안일'이라 써놓은 것은 '경륜'이라고 어렵게 된 말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집안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둔 우주가족'의 집안일을 따라, 바울은 머슴입니다. 그 머슴은 당연히 입양된 아들들을 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머슴은 특별한 머슴입니다.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도, 주인집 아들 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흘러넘치게 하는 머슴입니다. 아, 그게 아니지요. 아빠를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하는 것이, 말씀을 가득 흘러넘치게 하는 일이지요! 이것이 바울이 어려움을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어려움을 겪으면 겪을수록 기뻐할만한 일이 생깁니다. 그 기뻐하는 일이 바로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닦아드릴 그리스도들.
[2]
'사람이 누구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이 충격적인 소식은 시대와 세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누군가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누군가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는 매정한 분이시라고나 했지,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보여주셨습니까? 하나님과 자신이 '부자유친(父子有親)'의 관계라서, 아빠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아빠를 사랑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인생을 걸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인생을 요약하자면 한 글자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로 효(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효도의 극치입니다. 아빠의 뜻 위해서 자신의 몸 내어놓는 십자가는, 아빠를 완전히 믿음입니다. 이삭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아빠에게 완전히 내어맡김입니다. 아빠는 아들을 믿고, 아들은 아빠를 믿습니다. 그 믿음 속에서 친합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친함'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 부활입니다. 아들이 부당하게 죽임당했습니다. 부패한 이스라엘, 썩은 로마, 그리고 이에 선동당한 민중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아들은 이것을 사명으로 짊어졌습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음에도, 그 해골언덕에 여섯시간동안 매달려 있다가 말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믿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죽어도, 아빠가 나에게 다시 생명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아빠도 믿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자신의 뜻을 온천하에 보여줄 아들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그 아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이 위대한 역사의 장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소망을 봅니다. 소망은 다른거 아닙니다. '아, 정말 하나님이 정말 계시구나' 아는게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폭군같은 왕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이시구나! 아들을 통해서 아빠가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렌즈입니다. 바울은 그 렌즈를 통해 하나님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예수를 이렇게 부릅니다. "곧 마침내 드러난 소망이십니다"
그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럼 '누가 아들이냐'는 것입니다. 아빠가 아들을 정말로 사랑하심을 부활을 통해서 목격한 사람들이 500여명입니다. 그럼 그 500여명만 아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점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왜 이 비밀의 드러남이 민족들 가운데 가득한지를". 모든 사람이 아들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입양 대상입니다. 곧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감당이 되십니까? 예수께서 이 길을 보이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열어 재끼셨습니다. 천하 만민이 하나님의 아들로 돌아오는 길 말입니다. 그래서 탕자들의 대규모 귀환이 부활 이후 시작됩니다.
[3]
바로 그이를 우리가 전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품게 하며,
모든 사람을 지혜로 가르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이로 세우고자 함입니다.
여기 그 대상이 쓰여있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 어떠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자격과 힘을 주십니다. 그 분이 우리 아빠이십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완전한 사람'라는 말 때문입니다. 바울이 열심히 일하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완전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있습니다. 정녕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너무 높은 목적 아닙니까? 저는 안될 것 같은데, 바울은 될 수 있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있는건 아닐까요? 저와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완전한 사람'이 서로 다르던지, 아니면 제가 애씀이 부족하던지. 아마 둘 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완전한 사람은 '목적에 다다른 사람'입니다. 원어로는 '텔레이온'이라는 말을 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딱 맞는 사람'입니다. 딱 한 사람 생각납니다. 예수입니다. 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예수만이 아닙니다. 바울입니다. 베드로입니다. 스데반입니다. 요한입니다. 예수를 시작으로 '텔레이온'한 사람들이 생겨났음이 분명합니다! 그럼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자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거렁뱅이같은 저를 완전한 사람으로 이끄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니까, 믿고 따라가는 겁니다. 믿고 따라갈 때 외롭지 않습니다. 나 걷는 길 앞에 숨기둥이 있습니다. 숨받아 생각 하고, 숨받아 힘 얻어 기꺼이 걸어갑니다. 오늘 본문 끝에 바울이 한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나는 힘을 다해 일합니다.
내 속에서 힘내시는 그의 힘을 따라 그 힘으로 힘껏 싸우며 말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함께 싸우십시다. '우리 속에서 힘내시는 그의 힘을 따라, 그 힘으로, 힘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