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經)은 날마다 들여다 볼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경(經)'이란 말이 글자를 모아놓은 다발을 뜻하니, 하나님과 함께 숨쉬던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둔 책이라 하겠습니다. 그 책을 읽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 속에 새로운 의미가 반가울 때면, 저도 숨을 쉬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숨쉬니 기쁘고, 기쁘니까 다시 의미를 찾아 글자 숲을 뒤지게 됩니다. 오늘도 뒤지다가 찾은 것들을 함께 나눕니다.
[1]
율법에서 빗나간 사람들은 유대 사람입니다. 살몸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이방 사람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줄에서 바울이 하자는 말은 결국 '모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에서 빗나간 사람도 죽었고, 살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죽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려운 말 아닙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거 죽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알지도 못하고, 행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는 앎과 행함이 만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상태가 산 사람인 우리에게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러니 지행합일 할 수 없는 우리는 죽은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앎과 행함이 살아서도 만나지 못하니, 그 사람은 죽은 삶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당신 원죄 때문에 죽었소" 라고 말하면, 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신 아는대로 살지 못하지요?" 하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지행합일할 수 없어서 개인과 사회가 오늘도 이 모양 이꼴입니다. 그럼 세상을 바꾸는 시작은 어디에 있느냐? 나의 지행합일에 있습니다. 이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이룬다한들 다시 앎과 상관없는 행함으로 고꾸라지지 않겠습니까? 젊어서는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더니, 나이들어서는 안그런 사람들보다 더 재리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을 보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지행합일 할 수 없으면, 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류는 참으로 망했습니다. 참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딱 맞았습니다. 그렇다고 아는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먼 발치에서 팔짱끼고 구경만 하시는 하나님 아닙니다. 그 분은 계획이 있으시고, 그 계획대로 이루십니다. 그 목적은 지행합일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출생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 이루십니까? 일단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부터 입니다. 이 사건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그 사건에서 발견합니다. 지행합일할 수 없는 절망스러운 인생이, 다시 일어나 올바르게 살 수 있음을 이 땅에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지행합일 할 수 없는 분이셨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의 일생은 줄곧 앎과 행함이 일치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살아내지도 못할, 사람들을 짓누르는, 온갖 '글자들'을 짊어진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그 손으로 법조항들을 써놓은 증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증서가 곧 율법입니다. 손으로 썼다는 말은 한 자 한 자 정성을 드릴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갈 때 중요한 그 법조항들을, 예수께서 기름발라 깨끗이 지워버리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을 박아, 모든 인류가 알 수 있도록, A.D.와 B.C.로 나뉘는 역사의 한 가운데서 말입니다.
글자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지금 글자를 쓰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지성은 시간을 공간화해서 사물을 분석합니다. '시간을 공간화'한다는 말은 쪼갠다는 말입니다. 자꾸 쪼개보려고 하는게 지성작용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쪼갤 수 있나요? 저도 방금 A.D. B.C. 이야기를 위에 했지만,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쪼개져본 일이 없이 시작된 이래로 주욱 이어져오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기 위해선 그 시간 마저도 쪼개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쪼개놓고 자신에게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을 분류합니다. 그리고 이 분류는 필연적으로 생물학적 몸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생각입니다. 결국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진리를 왜곡하기 좋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살아보려고 지성을 사용하는데, 그 지성의 사용은 모든 것을 그 자체로 경험하지 못하고 쪼개놓습니다. 그래서 왜곡된 세계상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글자는 어디쯤 있습니까? 세상을 쪼개는 지성의 칼이 곧 글자입니다. 그러니 불립문자(不立文字)입니다. 진리는 글자로 세울 수 없습니다.
글자가 문제냐? 글자도 문제지요. 글자는 2차원입니다. 어떤 법조항을 만들어놓았을 때, 그 법조항을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입니다. 맞냐 틀리냐입니다. 모두를 끌어안고 갈 수 있는 제3의 판단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글자는 2차원입니다. 사람이 글자에 매여서 옳고 그름 판단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실적에 우스운 일입니다. 글자로 복잡한 인간사를 다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벨탑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글자를 쓰는 사람은 더 문제입니다. 이 글자가 2차원이니까, '나'와 '너'로 편을 나누어 사람을 짜먹기 딱 좋은 도구 또한 글자입니다. 그래서 흔히 먹물들이라 하지 않습니까? 지성작용을 통해서 이렇게 저렇게 잘라서 분석해놓은 말로, 쌀과 바꾸어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서기관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대접받길 좋아하고, 사람들 짜먹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원어로 '그람마타'라 부릅니다. 다시 말해 문법 선생님입니다.
이러한 글자놀음하는 사람들이 지성으로 잘 짜여놓은 체계를 가지고 사람들을 짜먹습니다. 심지어 그 글자가 하나님이 주신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둘로 나누어 짜먹는데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법조항은 엄청 중요한 거라고 무게를 엄청 실어놨기 때문에, 씨알의 한 사람으로서는 이 법을 극복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한 사람이 했습니다. 곧 예수입니다. 그 손으로 써놓은 법조항의 모든 증서들을 기름발라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법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줌으로써 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말입니다.
[2]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은 글자를 가지고 사람들을 짜먹습니다. 지금 세월호 특별법 때문에 계속 정부와 갈등중입니다. 글자 놀음 하던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글자를 고치자는 말입니다. 글자에 권위를 잔뜩 실어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법도 몰래몰래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것도, 그 글자의 힘 하나 믿고 그렇게 했던 것인데,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글자를 바꿔달라고 하니 이거 바꿔주겠습니까?
예수는 그들이 부당하고, 그들이 믿고 있는 글자 마저도 부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삐뚤어짐 하나 없이 살아간 그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간 글자에 의해, 죽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누가봐도 부당한 이 사실에 온 국민이 동조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께서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잘 살 수 있겠다고 꼬시지만, 저 '잘'의 의미를 숨기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대로 글자를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저 '잘'에 선동당한 민중 또한 삐뚤어졌습니다. 진리의 사람이 무참히 짓밟히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자신이 '잘'되는 것이 정말 '잘'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잘'은, 그 자리에 희생당하고 있는 한 사람이 보여주는 '잘'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자신을 죽여 부당함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아들. 이것이 '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잘'의 참 의미는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글자를 소용없이 하셨습니다. 그 글자를 가지고 사람들 짜먹는 권세자들은 씨알을 정말 잘 살게 할 수 없음도 드러내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끝입니까? 아닙니다. '숨'입니다. 이제 숨입니다. 글자의 맞고 틀림이 아니라, 숨입니다. 지행합일의 비밀은 바로 이 숨에 있습니다. 이 숨결은 힘입니다. 이 숨결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이 숨결은 힘입니다. 아는 것을 몸 속에서 삭여서 힘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이 숨결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죽음도 이기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 예수를 믿는 자, 숨결을 받는다 했습니다. 예수의 길을 걷는 자, 숨을 안주실리 없다 했습니다. 그럼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합니다. 예수 따르는 이는, 숨 받아 지행합일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것이 분명해집니다. 절기, 초승달 축제, 안식일 문제는 모두 권력을 섬기는 일이 되었고, 글자들로 규정된 것들입니다. 절기와 초승달 축제를 만드는 이는 권력자입니다.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시간을 나누어, 자신들의 쪼개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의 우위에 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제정해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짜먹는 일에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씻어난 이, 즉 예수와 함께 부활한 사람은 이러한 문제에 저촉될 수 없습니다. 글자가, 사람이, 씻어난 이를 억누를 수 없습니다. 다만 씻어난 이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억눌림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절기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이나 모두 축제요, 즐겁고 특별한 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날들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실체가 옵니다. 그 실체는 모든 날이 안식으로 돌입하는 그 날입니다. 그 날에 모든 글자는 진실을 가리키고, 그 진실은 몸적 차원으로 세계에 드러납니다. 곧 그리스도의 몸. 모든 이들이, 내 몸, 니 몸 할 것없는, 생존이 아닌 생명으로 흘러넘치는, 제 3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그 날입니다. 이 날이 오기전까지 모든 절기들은 바로 이 "주의 날"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림자를 보면, 실체가 있음을 알면됩니다. 그 그림자 밖으로 넘어가면 큰일난다고 호들갑떠는 것은, 씻어난 이에 걸맞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하는데, 이건 자기 자신을 너무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씻어 난 이가, 어떤 때를 씻어버렸는지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알게 해주어야합니다. 글자만이 아닌 숨삶으로.
[3]
바울이 '숨'이라 말하지 않아도, 이미 이 편지를 받아들고 있는 씻어난 이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마치 초코파이 같은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지요. 이게 참이지요. 글자가 아니라 숨이지요. 바울이 유명한 말도 남디지 않았습니까? "글자는 죽이는 것이요, 숨은 살리는 것이다(고린도후서 3:6)" 그래서 글자가 아니라 숨이란 얘기를 한참하다보니까, 바울이 또 언급해야 할 주의 사항이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신비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미리부터 말하자면, 신비주의는 곧 숨에 대한 오해라 하겠습니다.
누군가 장엄한 무언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엄한 것에 눌려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 그러한 경험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그 사람은 그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아마도 최초 공동체에서 그러한 신비체험을 겪은 이들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한 체험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자신이 장엄한 하나님을 몸소 체험했다면, 그것을 더욱 진리를 살아내는 지행합일의 연료로 써야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기 정당성의 토대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의 의식 따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앙겔로스)'나, '다이몬('귀신, 영'으로 번역됨)'이나 본래는 뚜렷한 구별없이 하늘과 땅의 중간에서 활동하는 비물질적 무엇으로 여겨졌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이지 않는 차원과 연결되는 '특정 의식'을 치뤘다고해서, 씻어난 이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밀교들이 대부분 그러합니다. 이러한 의식을 만들어놓고, 이 특정 의식을 통한, 특정 경험을 해야 자신들의 공동체원으로 인정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은 특정 경험과 특정 의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저러한 것들은 그저 본인이 들어가 본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의식을 헛되이 과장하는데 있습니다. 본인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앞에서 베르그송을 언급하며, "인간 지성은 생물학적 몸을 섬기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결국 특별한 경험이 되었든, 신비로운 의식이 되었든, 혹은 많은 글자들로 만들어놓은 체계가 되었든, 생물학적인 자기 몸, 곧 자기 살몸을 드러내고자 저러는 사람들은 참으로 안된 사람들입니다. 안쓰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살몸 드러내는 무언가를 '숨'이라 착각하니, 그러한 사람은 시원하게 호흡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성도 숨이라 할 수 없고, 특정 경험도 숨이라 할 수 없고, 천사들의 의식도 숨이라 할 수 없습니다.
머리와 연결되어야 숨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 부터 숨이 들어와 모든 몸 구석구석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습니까? 이 '머리'는, 골로새서 1:18에 등장했던 바로 그 머리입니다. 예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그 머리에는 코가 있습니다. 예수로부터 숨 받습니다. 어디에 받습니까? 특정 시간에? 특정 경험에? 특정 생각에? 아닙니다. '온 몸'입니다. 이 '온 몸'을 공동체로 보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으로 보고자 합니다. 그의 숨을 온 몸이 받아, 힘줄과 묶인 인대와 신경 끝까지 숨이 흘러갑니다. 그래서 온 몸입니다. 남의 몸 아니라, 내 몸부터 이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숨 받아, 그 숨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라나는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숨이 아닌게 없습니다. 내 온몸을 자라게 하는 이 공간, 그리고 시간, 그리고 내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 나에게 주시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숨이 아닌게 없습니다. 만물은 대속이요, 나를 위해 죽어주어, 오늘 내가 두 다리를 지탱하여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지구요, 지구는 하나님의 거대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숨 안에 들어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