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작용하는 방식, 이해와 지성의 과정을 의미하는 '디아노이아'. 사고와 실천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타락. 타락 역시 나선형. 그러나 하향.
-"그의 살몸의 유기체" : 로마서 7:4, 8:3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속죄제물로서..." 1) 그리스도도 육적 실존을 공유하시고, 죽임 당하심 2) 예수는 또한 하나님과도 동일시 3) 십자가 위의 예수 안에서 만나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 3) 하나님의 대가족 중 맏아들이신 예수의 부활을 통해 죄는 그 가족 안에서 제거
[2]
그 죽음을 통해서 여러분을 그분 앞에
씻어난, 한 점 부끄럼 없는, 깨끗한 자로 곁에 세우기 위함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실함으로 기초를 놓은 터 위에 머물고,
주저 앉아서, 복음의 소망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우다", "그 앞에", "흠 없이"는 희생제사를 연상시킨다.
-깨끗한 자로 곁에 서기 위한 단서조항.
-"터 위에", "주저 앉아서(에피메네인)", "복음의 소망"은 골로새 교회를 지칭한다.
[3]
(여러분이 들었던 이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창조물 안에 선언된 것이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머슴이 되었습니다.)
-유대의 메시아 + 이방선교 = 모든 창조물 안에 선언된 복음. 로마서 10:18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는 바울의 이방선교를 지칭. 게다가 선언은 과거시제. 인간만이 대상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선언된 복음
[1]
바울은 메시아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메시아 안에서 모든 만물이 화해하는 충격적 장면을 그린 그는,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멀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각에서부터 하나님과 멀리 떠나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질리 만무합니다. 저는 요새 이 '지각'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로만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가 죽고나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상을 저는 저러한 지각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오늘 점심에는 뭐 먹지?', '아, 저번에 본 영화는 이랬네', '아 저 친구는 별로 느낌이 안좋아'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저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가 죽어도 있을 '참'일테니까요. 그리고 그 '참'을 통해 제가 올바르게 지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한동안 제 '지각'이 병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고치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기대어 제 지각을 수정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지각을 버리는 것은 말도 안되고요) 마치 눈 앞의 빈 공간에 공기가 있음을 알듯, 그리고 그 공기를 코로 들이마셔야, 냄새도 잘 맞고, 눈도 시원하고, 숨도 쉴 수 있듯, 모든 사람이 그 보이지 않는 공기를 마시고 있음알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놓치지 않는, 그러한 지각을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멀리 떠났다'는 말이 그렇게 읽혀집니다. 멀리 떠난 사람은 자기 지각만 믿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과도 멀고, 느껴지는 사람과도 멉니다. 혼자 입니다.
누군가 어제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삶은 하드코어다" 정말 맞는 말 같습니다. 삶은 하드코어하여 온통 굽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생각대로 되는 일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지각만 믿으면, 삶이 하드코어한 탓을 온통 외부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게는 남탓이요, 보이지 않게는 하나님 탓입니다. 그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억하심정이 쌓이고 자신의 지각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외부에 대해서 온통 대적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자신의 지각을 정말 만족시킬 수 있느냐? 그런 날이 오느냐? 인간의 지각은 깨진 독과 같아서 만족을 모릅니다. 내가 보고싶은 것을 실컷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을 실컷 듣고,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어도, 이 '실컷'이 줄곧 이어지기를 바라지, 이 실컷은 도대체가 끊어질 줄을 모릅니다. 이러니 어디 세상 살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메시아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 우리네 삶에 참말로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 '이제'라는 말은 참말로 중요합니다. 시간을 반으로 뚝 자르는 말입니다. '이제'를 기준으로 이미 흘러간 시간은 새로 태어납니다. 시간과 함께 나도 새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이제, 이제" 해야 합니다. 자꾸 "이제는!", "이제는!" 해서 앞에 있는 '이제'와 뒤에 있는 '이제'를 연결만 할 수 있으면, 모든 순간을 끝까지 '이제'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우리에게 시간을 잘라 새롭게 잇는 '이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현시대와 오는시대를 가르는 그 날선 검이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이제'입니다. 이제 믿는 것입니다. 이제 날마다 믿어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시간을 갈라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이의 살몸의 유기체 속에서". 이 말은 예수의 살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몸은 '사륵스'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면'입니다. '굴곡'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을 이 땅에 드러내는 매개체입니다. 예수는 살몸을 그렇게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의 살몸은 죽음을 이겼고 '영몸' 곧 '부활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살몸이 복잡한 메카니즘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듯, 그 분의 부활몸도 유기체입니다. 그 유기체는 주위와 호흡하며, 참여할 수 있는 거대한 몸입니다. 곧, "그이의 살몸의 유기체"라 함은 그의 죽음과 부활로 세운 그 분의 몸, 예수 공동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예수 공동체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 다음 말을 강조하고 싶은데,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서로 나누어 살게 하셨습니다"입니다. 이 말은 개역성경에는 "화목케하다"라 되어 있습니다. 원어로는 '아포카탈라쏘'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참 재밌습니다. '아포'는 '~으로부터'란 의미입니다. '출생', '기원'이라는 말입니다. '카타알라쏘'하면 '서로서로 교환한다는 뜻이 됩니다' ('알로'는 '타인'이란 뜻도 있는데, 이 '알로'가 어디에도 나오냐하면, 위의 "멀리 떠났다"는 뜻의 단어에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짐은, 곧 타인에게서도 멀리 떨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화목은 다른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나서 타인과 물건을 함께 쓸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공동체 안에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이는, 멀리 떠났던 자, 대적자들이라도 다들 불러다가, 자신의 몸 삼으시고, 한 몸 공동체 안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아 서로 물질을 교환하고 사는 지체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2]
그런데 그 공동체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 모두가 "씻어난, 한 점 부끄럼 없는, 깨끗한 자"로 세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오늘 번역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앞에도 섭니다"면 "곁에도 섭니다". 참으로 인격적이십니다. 그 분과 우리의 관계는 위계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친구같은 관계이기도 합니다. 아, 생각해보니 그 분이 우리를 먼저 친구라 하셨습니다!
이 목적이 어떠십니까? 이 목적은 달리 말하면, '인격완성'이라 하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 예수께서 죽으신 목적입니다. '인간 본성의 회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복'이라 말하기엔 약하고, 인간 본성의 '초월적 도약'입니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격의 출현입니다. '인격이 지각을 넘어 하나님께 닿음'입니다. 아, 이 말이 좋겠습니다. 인격이 지각을 넘어 하나님께 이르는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일이 예수 공동체 안에서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닿은 예수의 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새 '성격'에 대해서 고민해본 바가 있습니다. 성격이 태어나면서 결정되는게 아니라, 혹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주고 받으며 발전하는, 미완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제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어디 조용한 사람들 속에 있으면 저는 분위기를 띄어보려고 자꾸 오바하는 타입입니다만,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그냥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거든요.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제가 다르게 드러납니다.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는 미완의 성격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을 하면 정말 큰일났다 싶습니다. 요즘에는 서로 관계하기를 꺼려하고, 혹은 진실한 친구를 두지 못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관계로부터 무언가를 공급받아야 하니까, 그 역할을 미디어가 대신하고, 미디어의 친밀함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고 구매합니다. 선거가 대표적인 예 아니겠습니까? 인격적 친밀함이 아닌, 지각의 친밀함, 이미지의 친밀함 속에서 선택하는 것은 대가 옳지 못한 판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 하나님께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하는, 하나님과 타인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여러분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들과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게 아니라, 날마다 삶을 공유하며 공동생활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의 인격은 얼마나 많이 달라질까요? 아마 깨달음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며, 날마다 그 깨달음을 몸으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예수 공동체다운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를 통해서 누구든지 (심지어 배신자, 원수라 할찌라도) 함께 공유하는 가족이 되어, 모두가 씻어나도록 사는 것이 이 시대의 숙제라 하겠습니다. 곧 빛과 소금입니다. 도시의 휘양찬란한 빛이 감출 수 없는 진정한 빛입니다.
그럼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다른 거 없습니다.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지각을 넘어서 계시는, 그 보이지 않는 한 분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초입니다. 이 기초 위에서 주저 앉아버리십시오. 복음이 앞으로 미래에 이뤄나갈 것을 기대하며, 날마다 '이제'를 찍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도 이렇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정말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씻어난, 한 점 부끄럼 없는, 깨끗한 자로 하나님 곁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옳은쪽입니다.
[3]
바울은 '복음'이란 글자만 나오면 견딜 수 없는 감격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복음'이란 말 뒤에는 이렇게 부연을 달아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복음이 사람에게만 선언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창조물 안에서".
복음은 사람에게만이 아닙니다. 하늘 아래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복음입니다. 하늘 아래 창조된 모든 것이 먹고 먹이가 되는 관계입니다. 오늘 제가 먹은 쌀도, 무언가를 먹고 저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먹고 나니 힘이 생겼습니다. 남을 위해 먹히고서,그에게 힘을 주니,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습니까? 이 생각을 하니 먹을 때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제가 먹은 것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적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먹이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죄다 그리스도요, 죄다 대속관계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날 위해 희생한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또한 그러한 것을 만드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속관계를 망치는 것이 돈입니다. 돈이 그 사이에 끼면, 대속관계는 공로와 대가의 관계가 됩니다. 내가 번 것을 내가 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냐, 돈이냐"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자는 이 돈을 빌미로 약자에게 대속관계를 강요합니다. 강자는 먹이가 되지 않으려고 물질로 휘장과 갑옷을 만들어 자기 자신을 두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자연만물이 억지로 희생을 당하여 핍절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복음입니다. 예수로 선명히 드러난 복음은 이 대속관계의 완성입니다. 이 대속관계의 원천이 드러나, 대속관계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사람만 살아납니까? 창조 세계 전체가 살아납니다. 대속관계와 창조세계의 회복을 생각하며, 다음 본문을 읽어보세요.
이사야 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결국 강자나 약자가 없어진단 말 아닙니까? 사실, 사랑은 대속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이 어려운 것은, 사랑하면 내가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면, 죽지 않고 대속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영원한 대속의 원천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지각을 넘어 분명히 계심을 붙잡으면, 우리는 시대를 관통하여 대속할 수 있습니다. 씻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은 영원한 대속의 순환, 사랑의 풍성함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품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오늘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도, 사람과 사람도, 사람과 창조세계도. '이제'와 '그제'가 만날 때까지, 우리 함께 '이제'를 찍어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