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싸운다 했습니다. 이 싸움은 다른 사람들을 '온전한 사람(텔레이온)'으로 세우기 위한 섬김과 애씀입니다. 끝까지 자신을 "이제!" 하고 아버지께 내어놓아, 참 아들로 살아내고자 하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알아달라 합니다. 이 말인 즉, 내가 이토록 당신들이 온전한 사람되기를 열망한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목적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적이라니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 인생의 목적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감히? 모든 사람에게 '목적'을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 위에 계신 분만이 사람에게 '목적(텔로스)'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참된 목적을 정하기 위해 모여서 논의도 하고 머리를 맞대지만, 대개 둘로 찢겨 싸우는 결과를 낳기가 십상입니다. 한 쪽은 살고, 한 쪽은 죽이겠다고 결정하기 마련입니다. 정치판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살이에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해서 결정하는 그 자리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은 그 자리에 없고, 온통 둘로 나뉘어 싸우는 꼴을 우리는 지겹도록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만이 인간의 목적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목적이 어렵고 복잡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 보내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결국 우리는 사랑이 옳다는 사실을 점점 몸으로 깨닫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질풍노도의 시기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에덴으로 다시 들어가도 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사람 되는 것이 옳다는 거 다 알지만, 이 옳음을 향해 달려가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온통 다른 것에 눈이 팔리고, 이것저것 맛보는데 애씁니다. 사랑하는 일에 왜 전심전력하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밥 먹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공부하는 것인데, 목적은 사라지고 방법만 남았습니다. 사랑을 치워버리고, 거기에 '나'만 남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를 믿는다'는건 무슨 뜻입니까? 죽었다 산다는 말입니다. 왜 죽고 살아야 합니까? '나' 밖에 모르던 사람이, 나는 사랑이 죽어도 안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 예수와 함께 죽고 살 필요를 느낍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죽고 살겠다고 합니다. 왜 입니까? 죽었다 살아서라도 기필코 사랑을 해보겠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이러한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믿어 죽고 다시 살겠다는 사람에게, 정말 신기하게도 자신의 숨결을 부어주십니다.
자꾸 숨, 숨 했는데, 그 숨은 무엇일까요? 숨은 하나님이 아들에게 부어주시는 생각과 힘입니다. 본문에 "확실한 생각이 흘러넘치도록 가득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숨이 부어지면, 생각으로 흘러넘칩니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하나님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 이어진 숨줄로 바르게 생각하고, 힘있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산 사람은 목숨으로 살지 않고, 얼숨으로 삽니다. 생존을 위해 살지 않고, 생명을 위해 삽니다. 나의 생(生)이 명(命) 받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 곧 숨입니다. 그래서 숨은 생명입니다.
숨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합니다. 어제부터 계속 이 '그리스도'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결국 바울의 싸움의 최종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감추어져 있다가 마침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보물입니다. 그럼 그 보물을 열면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저는 오늘 아침 이 본문을 읽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과 한참 들여다봤던 단어들이 죄다 나왔거든요. 바로 소피아와 그노시스입니다.
저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은 소피아를 '경험지'라고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몸으로 겪어 아는 앎입니다. 그노시스는 깨달음입니다. 칸트가 말한 선험지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노시스는 수직적 앎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앎, 갑자기 어느날 깨닫게 되는 앎입니다. 소피아는 그 그노시스를 살아내고자 날마다 싸워나갈 때, 몸으로 체득하게 되는 그러한 앎입니다. 수평적 앎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바로 그 자리 말입니다. 마치 수평선과 태양이 만날 때, 이전에 없던 색깔이 바다를 덮는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깨달은 것이 몸으로 살아지는 그 순간입니다. 곧 지행합일의 일상입니다. 바른 것을 알아 바른 것을 살아내는 '나'입니다. 곧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이것을 깨닫고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의 정체는, 숨결받아 그노시스와 소피아를 살아내려는 자기자신의 싸움이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지행합일의 온전한 사람 되라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가온이 격려를 받는다"고 써놨는데, 이 말은 '인격의 중심'이란 뜻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무어라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의 사람됨의 코어(core)라 하겠습니다. 이것을 주로 '심장'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heart하면 심장이 되기도 하고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격려를 받은 이가,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함께 모여, 그 확실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서로서로 그리스도로서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소피아와 그노시스를 넘치도록 얻게 됩니다. 이러한 삶이 새로이 태어나 사는 삶입니다.
[2]
초대교회 당시 이런 저런 이단 사설로 씻어난 이들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경계하는 유명한 책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그 책에는 씻어났으면 유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 열어 사랑하겠다는 사람들을 이용해먹으려는 사기꾼들이 예나 지금이나 도처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씻어난 이들이 그럴듯한 말로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콜로사이 지역의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글자는 그저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글자로 세울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인격입니다. 바울은 지행합일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통해, 그들이 그리스도를 보길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다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숨결에 주목해야 할 것이요, 그 숨결에 주목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숨을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께 얼굴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신뢰를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글자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살몸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숨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어,"
몸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바울과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지구를 가득 흘러넘치도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숨은 연결고리입니다. 몸이 붙었든, 떨어졌든 사람을 연결합니다. 이 숨으로 호흡하는 법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함께 호흡하고 있으면 분명한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숨으로 호흡하니, 흐트러지지 않은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이 날로 굳건해집니다. 바울도 같은 숨을 쉬고 있기에,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소피아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경험으로 체득했던 바이기에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확실하지요.
[3]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모셨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는 어떠한 분이십니까? 본래 이 '주'라는 말을 로마에서는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온 세계의 중심', '통치자' 이러한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황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숨 쉴 수 없었을 때, 예수는 내려와 숨 쉬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굳건히 신실하여, 목숨이 끝나도 얼숨 주시는 하나님을 십자가 위에서 뚜렷이 드러내셨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하늘로 가셔서 우리에게 그 동일한 숨결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목적을 제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숨결로부터 얻은 그노시스를, 살이 찢기고 나무에 매달려 몸의 모든 체액이 쏟아질 때까지 온 몸으로 겪으신 분이십니다. 소피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계의 중심, 모든 민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 모든 통치권을 이양받은 '인자'.
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뿌리를 박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 땅에 현현하신 그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는 말입니다. 굳게 믿으면 숨 부어주십니다. 마치 뿌리로부터 양분을 흡수되는 것과 같습니다. 숨을 들이마시어 자신의 삶을 튼튼히합니다. 올곧게 사랑하는 삶으로 일상을 견고히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숨 받아서 깨침이 있고, 그 깨침을 다시 호흡하며 겪어나갑니다. 그노시스와 소피아가 순환하며 살려고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죽으려고만 하는 삶도 아닌, 진정한 제3의 사람을 창조해나갑니다. 그는 살아도 죽어도 주의 것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뿌리 박고 줄기를 튼튼히 했으니,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숨결받아 살아간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그 열매가 '감사'입니다. 그래서 믿고 살면 감사합니다. 믿음은 뿌리 박음이요, 삶은 숨으로 살아감이요, 감사는 그러한 삶의 열매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에우.카리스티아'인데, 오늘 이 말을 한참 들여다 보았습니다. '에우'는 '잘'입니다. '잘', '좋음'이란 말들은 '하나님'과 상관있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잘' 한 일이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는 거저주심입니다. 은혜라 번역됩니다. 그래서 '에우.카리스티아'라 하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을 좋아하고, 그 거저 주신대로 잘 하고, 기뻐한다는 의미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들은 무엇을 거저 받았습니까? 자신의 가온에서부터 시작해서, 삶의 모든 국면에 이르기까지 거저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몸뚱이 하나 내 것 인줄 알았는데, 숨 받아 다시 태어났으니 이 몸뚱이 마저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뚱이를 사랑하기 위해 내어놓으면, 죽을 수 없도록 강력한 새 몸을 주시겠다 하셨으니, 지금 내 몸 역시 내 주께 팔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종입니다. 감사가 흘러넘친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이 구절을 오늘 마지막에 꼭 인용하고 싶습니다.
로마서 14:8~9
우리가 산다면 언제나 주를 위하여 살고,
우리가 죽는다면 언제나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언제나 우리는 주께 속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는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을 다스리고자 하심입니다.
11534日(만31년 6개월 26일)
<예전 번역> 따라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모셨듯, 그이 안에서 행하세요.
그이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워지며, 여러분이 배운바대로 신실함에 튼튼해져서,
거저 주심에 대한 감사가 흘러넘치게 하세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