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2~36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이 말들을 들어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 하나님이 그 사람을 큰 힘들과 경이로운 사건들과 표적들로

여러분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이를 통해서 여러분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된 그이를,

법 없는 자들의 손을 통해 못 박아 들어 올렸습니다.

바로 그이를 하나님께서 죽음의 산고에서 풀어다가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죽음이 그이를 억누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해 내 얼굴 앞에 계신 주를 보리라.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시네.

이 때문에 내 가온이 기뻤고, 내 혀도 즐거워하며,

심지어 내 살몸은 소망안에 장막을 짓노라.


당신은 내 호흡(ψυχη)을 하데스로 버리지 않으시리,

당신에게 속한 곧은 이가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삶의 길을 보이시며,        

주의 얼굴 앞에서 좋은 생각으로 나를 흘러넘치게 하시네. 

          

동족 여러분! 제가 조상 다윗에 관하여 확실히 말할 수 있음은,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이 날까지 우리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언자로 시작하였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허리에서 나온 자 중에서

그의 보좌에 앉히겠다고 맹세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미래를 내다보아 메시아의 부활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곧 그이가 하데스로 버려지지 않고,

그이의 살몸이 썩지도 않을 것이란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 들어 올리셨고,

예수는 약속하신 거룩한 숨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직접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았으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판으로 둘 때까지'.        


그러니 이스라엘 온 집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메시아가 되게 하셨습니다."


1. 역사는 맛없지만 뜻이 있다.


  베드로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여러 지역의 사투리로,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들에 대해서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으나, 베드로는 바로 잡았습니다. 술이 아닙니다. 숨입니다. 


  어떤 숨입니까? 이미 오래 전에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바로 그 숨입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 그리고 남종 여종들이 미래를 말하게 하는 그 숨. 우리의 청년들이 볼 것을 보게 만드는 그 숨. 우리의 노인들이 죽음을 넘어 꿈을 꾸게 하는 그 숨. 하나님께서 옛 글에 약속하신 그 숨을 사람들이 마침내 받았고, 받았으니 마지막날이 시작되었노라고 베드로가 선언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이 말들을 들어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 하나님이 그 사람을 큰 힘들과 경이로운 사건들과 표적들로

여러분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이를 통해서 여러분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된 그이를,

무질서한 자들의 손을 통해 못 박아 들어 올렸습니다.

바로 그이를 하나님께서 죽음의 산고에서 풀어다가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죽음이 그이를 억누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한 사람. 그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예수라 하면, 이 이야기를 하는 베드로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나 정말 익숙한 이름입니다. 이 예수가 죽은지 100일도 채 안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어딜가나 화제거리였습니다. 사람으로부터 귀신 즉 왜곡된 인격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 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로 세우며, 사람을 짜먹는 성전 종사자들을 실랄하게 비판하는 그는, 어딜가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그 사람에게 환호하던 이들이 돌변하여,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예수를 로마라는 짐승의 먹이로 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로마라는 짐승은 이마에 평화라고 써놓고선 그 죄없는 사람을 사정없이 먹어치우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 그 이마에 쓰인 '평화'라는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온통 드러났고, 그 짐승에게 죄없는 이를 먹이로 내어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이든 로마든 온통 거짓말쟁이들뿐. 그러나 진실을 말하던 유일한 한 사람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무덤이 빈무덤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전주곡이었습니다. 부활한 그는 무려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뜻따라 살았던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는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아버지는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을 새로이 살려냈습니다. 진리는 죽음 앞에 침묵할 수 없음을 아버지아 아들이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이 사실을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이들이 몰랐을리 있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다만, 이 벌어진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베드로가 앞서 말한 숨사건과 무슨 상관입니까? 정리해봅시다. 지금은 오순절입니다. 이 날 벌어진 숨사건을 베드로는 요엘의 사건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런데 요엘의 사건은 다시 예수의 사건으로 넘어왔고, 베드로는 이제 다윗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요엘, 다윗, 예수, 그리고 오늘 오순절날 숨받은 사건. 이 모든 사건들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역사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벌어진 사건에 뜻 있겠습니까? 그냥 아무 뜻없이, 의미없이 벌어지는 일상이요,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역사에는 무슨 뜻이 있겠으나,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그렇게 대단한 뜻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연으로 난 것은 하나도 없고, 다 그 속에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싱겁게 마주치는 일 속에도 뜻이 있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을 내다보고서 그 뜻에 발맞추어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뜻을 찾지 않고, 맛을 찾습니다. 맛이 무엇입니까? 내 지각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게 맛입니다. 내 눈이 보고 싶은 것, 내 혀가 갖다 대고 싶은 것, 내 귀에 듣고 싶은 것에 사람은 반응하고 움직입니다. 내 살몸의 만족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맛입니다. 얼마전에 버거킹에 갔는데, 직원이 입은 티셔츠에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Taste is King."



  맛이 왕입니까? 아닙니다. 왕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자기 입맛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지각을 만족시키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돌던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셔야 했고,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자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40일간 곡기를 끊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예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임당했던 것입니다. 그럼 예수는 맛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셨습니까? 뜻입니다. 뜻은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무색무취입니다. 그럼에도 그 뜻을 붙잡으셨습니다. 왜 입니까? 맛은 사라지지만, 뜻은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뜻이 있습니다. 역사가 이룰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요엘이 등장하고, 다윗이 등장하고, 예수가 등장하는 건 이 모든 각기 역사 속에 뜻이 있고, 그것이 하나를 이루기 위한 역사였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개개인의 삶에도 그 한 뜻이 있어, 우리도 이루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룰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가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려면 맛을 내려놓고, 뜻부터 잡아야 합니다. 맛을 끊고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2. 옛 글과 오늘이 가리키는 사람, 부활의 사람


   베드로가 인용한 다윗의 시를 들여다 봅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첫번째 구슬을 이미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요엘의 구슬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구슬도 주었습니다. 예수의 구슬입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이 다윗의 구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구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요엘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맛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뜻입니다. 한 뜻입니다. 그 한 뜻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뜻이라서, 오늘 내가 붙잡고 살아야 할 그 뜻을, 이 옛 글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뜻을 발견하면, 여러분도 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취향, 내 생각, 내 습관, 내 느낌 우선 뒤로하고, 뜻을 알겠다는 일념으로 본문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끊고 숨쉬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내가 꿰뚫려, 그 분의 보배가 됩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다윗의 시는 시편 16편 8~11절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해 내 얼굴 앞에 계신 주를 보리라.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시네.

이 때문에 내 가온이 기뻤고, 내 혀도 즐거워하며,

심지어 내 살몸은 소망안에 거처를 짓노라.


  그 옛날 사람 다윗은 자신의 얼굴 앞에 계신 '주'를 본다 하였습니다. 그 분은 다윗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를 오른쪽에서 붙잡으시는 분이십니다. 성서에서 오른쪽은 옳은쪽입니다. 재판의 그림입니다. 옳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오른쪽에, 그르다고 판결받는 사람들은 왼편에 섭니다. 다윗의 오른쪽에 계신 그는 옳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다윗은 옳으신 그 분을 따릅니다. 옳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 옳으신 분을 따라 옳게 사니,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의 혀는 즐거이 노래부릅니다. 참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뜻없는 맛이 아니라, 뜻있는 맛입니다. 인생이 참맛입니다. 다윗은 마음이 기쁘고, 혀로는 노래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의 몸뚱이가 소망안에서 새 집을 짓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반드시 죽어서 썩게 되는 사람의 몸뚱이가 가질 수 있는 소망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부활입니다. 옳으신 분을 따라 옳게 살면, 나도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주님은 다시 살아나시는 주님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읽으면 다윗 시의 다음 내용도 순하게 이해됩니다. 


당신은 내 호흡을 하데스에 남겨두지 않으시리,

당신에게 속한 곧은 이가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생명 길을 보이시며,        

주의 얼굴 앞에서 좋은 생각으로 나를 흘러넘치게 하시네. 


  호흡이 저승에 남겨지지 않습니다. 당시는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던 헬레니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희랍어로 번역된 <셉투아진트>라는 성경을 사용했는데, 이 성경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저승을 '하데스'라 표현했습니다. 하데스든, 저승이든, 상관없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호흡이 하데스에 남겨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호흡이 하데스에 남겨지지 않는다는 말은, 다시 지상에서 호흡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곧 부활입니다. 다윗은 그 옛날, 예수가 부활하기 천년전부터 부활의 주님을 노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없고, 만져지는 것 없어도, 그 한 뜻을 따라 진리를 노래했습니다. 


  뒷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 속한 곧은 사람은 썩지도 않습니다." 주께 속한 사람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그는 무덤 속에서 썩을 이유가 없습니다. 옳게 살아간 그 사람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니, 죽음을 돌파하는 생명길이 여기 있습니다. 그 부활로부터 죽음을 이기어 살 수 있음을 믿고 사니, 날마다 좋은 생각들이 흘러넘칩니다. 죽음에 저당잡히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발견한 것은, 다윗이 보았던 그 부활의 주님이, 일주일 전 베드로를 두고 하늘로 가셨던 바로 그 분이요, 그 날로부터 49일 전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만에, 정말 다윗의 글처럼 다시 살아나신 그 분이라는 말입니다. 옛글이 가리키던 사람이 곧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역사를 관통하며 전달된 한 사람입니다. 

   "예수가 어디있어? 눈으로 보여줘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분은 맛이 아니라 뜻입니다. 귀 있는 자가 들을 것이요, 찾는 자가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맛이 없다고 없는게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혀가 잘못되어서 진짜 느껴야 할 것을 못느끼는지도 모릅니다. 금식을 하면, 밥이 맛있습니다. 하나하나 맛이 잘 느껴집니다. 느끼하고 조미료 들어간 맛에 길들여진 혀가, 금식을 통해서 진짜 맛을 알게 됩니다. 뜻은 맛을 끊음으로 비로소 느껴집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새 글이었던 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는 옛글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이 옛글을 읽고 있습니까? 이 옛글에서 발견하는 한 사람이, 오늘 우리와 숨으로 만나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그 중심은 베드로만 경험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가온은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그 분이 오늘 그 분이십니다. 옛 글 속에서 뜻을 만나고, 그 뜻을 현실 속에서 만나면, 우리 자신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교차로가 됩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가 오늘과 만나, 역사를 새롭게 지어갑니다. 내 멋대로 사는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그 중심을 찍고 찍고 찍어서 올바른 길을 만들어 갑니다. 뜻있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방금 보았던, 시편 16편에 대한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동족 여러분! 제가 조상 다윗에 관하여 확실히 말할 수 있음은,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이 날까지 우리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언자로 시작하였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허리에서 나온 자 중에서

그의 보좌에 앉히겠다고 맹세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미래를 내다보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곧 그이가 하데스에 남겨지지 않고,

그이의 살몸이 썩지도 않을 것이란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들입니다.



  다윗은 허구의 인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존경받는 왕이자, 그 무덤까지도 이스라엘 안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살아서 호흡하며 팔레스타엔 땅을 걷던 그 다윗의 증언입니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다." 다윗은 왕이기 이전에 예언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자손중에서 메시아가, 곧 부활의 주님이 오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편을 남긴 것입니다. 이전에는 희미했던 글자들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사람들은 다윗이 가리키고 있던 바로 그 주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이십니다.


3. 예수, 숨 부으시는 하늘의 주, 

   우리, 숨으로 사탄을 이김


  베드로의 이야기를 연결해봅시다. 


1) 먼 옛날 요엘이 하나님께서 숨 부어주시는 얘기를 했습니다.

2) 그보다 더 옛날 다윗이 부활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3)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한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마지막 퍼즐을 꺼냅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숨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되겠습니다. 그 숨 사건이 요엘의 예언이라 말했고, 또한 다윗의 입을 빌려 부활의 주님이 곧 예수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활만큼 중요한 것이 승천입니다. 승천이 있어야 숨 사건을 설명하는 베드로의 퍼즐이 맞춰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 들어 올리셨고,

예수는 약속하신 거룩한 숨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직접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 말이 곧 승천입니다. '오른손'의 의미를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가 옳다는 영원하신 재판장의 판결입니다. 


  그리고 그 옳다고 인정받은 이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습니까? 거룩한 숨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숨을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라 옳게 살아갈 사람들에게 부어주십니다. 이제 베드로의 이야기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옵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 과거의 이야기가 지금 현실과 만났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고 있는 이것이, 다윗의 주님이 정말로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셨고, 요엘의 예언대로 숨 부어주시는데, 이것이 그것이다!" 이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이 받았던 바로 그 것. 그들의 말소리는 곧 숨에 말 붙인 숨소리입니다. 그들의 사투리는 곧 말소리이자, 하나님의 숨소리입니다. 곧 말숨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는 어떠합니까? 거룩한 숨결따라 말하는 베드로의 소리는 하나님의 말숨소리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고 있는 이 현장은, 하나님의 숨결이 부어진 현장입니다. 이것이 '숨 사건'의 전모입니다. 


  즉 지금은 요엘의 예언의 성취된 것이요, 이 숨은 메시아가 주시는 숨이요, 그 메시아는 죽고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입니다. 그가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을 이미 사람들이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 날입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1) 먼 옛날 요엘이 하나님께서 숨 부어주시는 얘기를 했습니다.

2) 그보다 더 옛날 다윗이 부활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3)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4) 그 예수가 승천하여, 사람들에게 숨을 부어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또다른 시를 인용하여, 이 결론을 보증합니다. 이 현재가 역사와 과거와 뜻이 맞아들어감을 다시 보여줍니다. 시편 110편 1절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았으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판으로 둘 때까지'.        


  유일신 사상이라 알려진 이스라엘의 구약성서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었겠지만,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았으라'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승천의 첫번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언제까지 우편에 앉아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예수의 원수를 예수의 발의 발판으로 둘 때까지'입니다. 예수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은 원수도 사랑하라 말씀하신 분이시니, 어떤 악인도 예수의 원수일리 없습니다. 그럼 사람이 아니면 누구입니까? 어둠의 악한 권세. 곧 사탄입니다. 사탄이 예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탄을 예수의 발 아래 꿇려놓으실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까? 그럼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사탄을 예수의 발 아래 꿇려놓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숨쉬는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거룩한 숨을 부어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숨을 받아 우리가 예수의 원수를 이기고 또 이깁니다. 사탄이 우리를 위협할 수 최대 무기는 죽음입니다. 곧 우리의 목숨입니다. "너 이러면 죽어!"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숨 받은 이들은, 이 위협앞에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숨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함은 곧 이 세상 어둠의 권세와 맞서 싸움입니다. 예수를 믿음, 성령을 받음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승천은 숨받은 이들이 악과 맞서 싸울 때임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두번째 의미입니다.


 시기로는 언제겠습니까? 즉 예수께서 승천해서 하나님의 차원에 계시는 때는 언제라 말할 수 있습니까? 마지막 때와 주의 날 사이입니다. 이 날은 곧 숨받은 이들이 사탄과 맞설 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이 굴복하는 날, 그 날은 하나님의 차원에 계신 예수께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날입니다. 곧 재림의 날입니다. 역사가 이렇게 맞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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