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4~21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여!

이 일을 여러분에게 알게 할테니, 제 말을 들어보세요.

때가 오전 아홉시니, 술 취한 것이라 넘겨짚지 마세요.

이것은 예언자 요엘을 통해 말씀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 끝날들(ἐν ταῖ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에, 

내 숨으로부터 모든 살몸에 이르도록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미리 말할 것이요.

너희의 청년들은 볼 것을 보며,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심지어 나의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그 날에

내 숨으로부터 부어주리니, 그들도 미리 말하리라.

또한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경이로운 일과

아래로 땅에서는 표적을 베푸리니, 곧 피와 불과 짙은 연기니라.

그 크고 확연히 드러날,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보존될 것이다.



0. 지난 이야기


  지금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정리해봅시다. 출애굽 이야기입니다. 그냥 그 옛날 이야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롭게 쓰는 출애굽입니다. 그 이야기는 유월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다고 나와있습니다. 즉 피로 다시 문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 피로 그린 문을 지나서 광야로 나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내가 사는 집의 문에 그의 피를 발라, 나는 집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정착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모험과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시작입니다. 다시는 피 바르고 나온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즉 완전히 새로운 시절로 돌입합니다. 곧 오는시대. 영생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문을 그려 그 문을 지나 광야로 나온 후,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고서 3일 뒤, 그 어린양을 장사지냈던 무덤이 빈무덤으로 드러났습니다. 죽음을 끊으신 어린양은 살아서 무려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자신처럼 끊어, 숨쉬고, 말하고, 먹고, 먹히는 삶 살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숨 받기를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차원으로 몸을 감추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7일간 제자들은 열심히 마음을 쏟아, 같은 열정으로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숨 받기를. 주신다고 하신 그것을 갈망하며, 그렇게 7일이 지났습니다. 십자가 그 날로부터 일곱날이 일곱번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날 기도하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숨을 받았습니다.


  그 숨을 받자마자 바벨의 꼬인 역사가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달라져 흩어진 사람들을 숨으로 다시 하나되게하는 일입니다. 마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각기 다른 언어들이 숨으로 꿰뚫려 그 숨과 말을 따라 의미가 전달되는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이 일을 보던 몇몇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ㄹ'과 'ㅁ'의 차이는 큽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꿰뚫어 하나되게 한 것은 술이 아니라 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가 나서서 이 일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풀어주기 시작합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앞으로 3주간에 걸쳐 그의 말 속에서 숨의 흔적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늘이 끝날이야!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여!

이 일을 여러분에게 알게 할테니, 제 말을 들어보세요.

때가 오전 아홉시니, 술 취한 것이라 넘겨짚지 마세요.

이것은 예언자 요엘을 통해 말씀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한 문장씩 살펴보며 의미를 곱씹어 봅니다. 베드로는 누구에게 선언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일단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입니다. 평생 유대교 안에서 유대인으로서 살았던 베드로가 유대인을 넘어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해 할 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바로 '숨에 대한 말'입니다. 숨에 대한 말은 모든 사람을 향한 말입니다.


  이 '숨 사건'이 벌어진 시각이 오전 아홉시입니다. 베드로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술' 취해서 벌어졌다 넘겨짚지 말라고 합니다. 오전 아홉시, 그 싱그러운 아침에 벌어진 이 일은 '술'이 아니라 '숨'입니다. 오전 아홉시하면 우리에게 불연듯 떠오르는 사건이 또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오전 아홉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시각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49일이 지난 같은 시각에 제자들이 숨을 받았습니다. 이 숨받은 사건을 베드로는 "요엘을 통해 말씀하신 바로 그것"이라 했습니다. 이 숨받은 사건의 의미를 요엘의 예언으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 끝날들에, 내 숨으로부터 

모든 살몸에 이르도록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미리 말할 것이요.

너희의 청년들은 볼 것을 보며,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심지어 나의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그 날에

내 숨으로부터 부어주리니, 그들도 미리 말하리라.

또한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경이로운 일과

아래로 땅에서는 표적을 베푸리니, 

곧 피와 불과 짙은 연기니라.

그 크고 확연히 드러날,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요엘은 두 가지 날을 말했습니다. 먼저는 '그 끝날들'이요, 다른 하나는 '주의 날'입니다. '그 끝날들'부터 살펴봅시다. 그 날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 날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숨을 모든 살몸에 이르도록 부어주시는 날들입니다. 따라서 숨 부어주시면 그 끝날들입니다. 그럼 베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지금 사람들이 사투리로 말하고 있는 이 현장은 술 취한 현장이 아니라 숨 받은 현장이며, 바로 이 날이 요엘이 예언했던 마지막 날이라는 것입니다. 요엘이 말했던 것이 오늘 이루어지고 있고, 바로 오늘이 그 끝날들 중 하루라는 것입니다.

*2017.7.18 추가했습니다.
  "그 끝날들"이므로, 이것은 유대인이라면 알고 있는 날입니다.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여호와의 전의 산, 곧 하나님께서 계신 산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이 산이 성전산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산이 다시 일어섭니다. 모든 산 위에 뚜렷이 드러납니다. 즉 무너질 것이 선언된 예루살렘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이 일어서는 날이 되었고, 그날이 바로 그 끝날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일어서는 새로운 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하는 인간 성전들이 일어나니, 더 이상 건물 성전은 기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왔고, 아래로는 건물성전이 분쟁에 휘말려 있습니다. 옛 우주(또 그것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 해,달,별)가 기능을 다하고, 이제 새로운 우주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우주에는 (실체가 나타났으므로) 해, 달, 별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끝날들입니까? 무엇이 끝장나기에 끝이란 말입니까? 오순절날 시내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에 하나님의 '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이 글자를 고치지 못하도록, 친히 돌판에 하나님의 말을 새겨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변치않을 그 하나님의 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후는 어떠합니까? 그 말대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살지 않았습니다. 그럼 살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살 수 없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할수없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숨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지도 못하면서, 자신들만 그렇게 사는 양 위선을 부렸고, 하나님의 말 마저도 오염시켜 놓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흔히 '말한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작심삼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까? 마음을 먹고, 자신이 말한대로, 옳다고 말된대로 살고자 하는데 왜 우리는 살지 못합니까? 이거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사랑이 옳다는 걸 다 아는 세상에서 사랑하기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니 말입니다. 다른 이유 아닙니다. 숨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살아낼 수 있는 능력도 없이 우리가 그간 많은 말들을 늘어놓았다는 말입니다. 이 숨 없는 말 때문에 온통 인류가 싸우고, 편 가르고, 서로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끝날입니다. 무엇이 끝장나기에 끝이란 말입니까? 숨 없는 말로 서로 지킬 수도 없는 짐을 서로 지게 하는 이 어두운 역사가 끝장 나는 것입니다. 곧 죄의 역사의 끝 날입니다. 옳은 뜻대로 살 수 없었던 지난 날은 이제 현실과 무관한 과거가 됩니다. 끝날을 시작으로, 이제 숨을 받아 말을 삶으로 녹여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날이 오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숨을 모든 살몸마다 부어주시는 그 날이 오늘입니다. 오늘 말고 다른 날은 없습니다. 언제나 오늘, 이제, 지금. 끝날입니다. 나를 끊을 날입니다. 따라서 끝날은 기쁜 날입니다. 좋은 날입니다. 인류의 모든 문제의 본질. 말한대로 살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을 뒤집어놓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마침내 사람에게 부어져 스스로를 끊어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탯줄로 사는 끝날입니다. 


  그럼 이제 끊어야지요. 그래서 끝날은 곧 새 날입니다. 탯줄로 사는 마지막 날이자, 숨으로 사는 첫날입니다. 곧 내가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거듭나는 날입니다. 말한대로 사는 시작이요, 내 나약함이 강함으로 바뀌는 시작이요, 사랑하며 사는 시작입니다. 끝날이 말입니다.


2. 숨 받으면,


  요엘의 예언을 더 들어봅시다. 숨 받으면 어찌 되는지 요엘은 더 풀어놓았으니 말입니다. 숨 받은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먼저 아들과 딸들은 미리 말하게 됩니다. 숨 없이는 미리 말할 수 없는데, 숨을 받았기에 미리 말합니다. 미리 말하는건 누구의 일입니까? 예언자의 일입니다. 즉 우리네 아들과 딸들이 예언자의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언자의 일이 무엇입니까? 이뤄질 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 예언자 입니다. 이 일은 그냥 말해도 그만, 말 안해도 그만인 말이 아닙니다. 일이 이뤄질 것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생명을 걸어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숨 받은  우리네 아들과 딸들이 말입니다!  


  또 청년들은 볼 것을 보게 됩니다. 볼 것을 본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갑자기 신기한 장면들을 보거나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봐야 할 것을 못보고 있지 않습니까? 억울한 사람들이 올바른 판결을 받아 그 마음이 시원해지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아 다시 일어나며, 서로 싸우던 이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용서하는 장면은 우리가 봐야 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봐야할 것들을 보지 못하는 요즘은 악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그 볼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푸르른 시절들이 정의와 구제와 용서를 위해서 뛰어들기 때문입니다. 숨 받은 우리네 청년들이 말입니다!


  게다가 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충격적입니다. 꿈을 꾸게 됩니다. 이제 죽음이 가까워 무엇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날에는 주인과 종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자 종이든, 여자 종이든 숨을 받는데, 이들 역시 아들과 딸들이 숨 받고 하는 동일한 일을 하게 됩니다. 미리 말하는 예언자의 일 말입니다. 즉, 숨 받고 진실을 말함에 있어서는 정말 귀천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차원에서 무언가 경이로운 일이, 땅에서는 '피와 불과 짙은 연기'라 말하는 표적들이 나타납니다. 피와 불과 짙은 연기라 하여 이것이 전쟁이다, 어떤 사건이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중대한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의 언어 사용 방법이다. 뒤에 나오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럼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탯줄 끊고, 숨으로 살고 있습니까? 숨으로 사는건 다른 것 아닙니다. 이뤄질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 일이 이뤄짐을 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죽음 조차도 막을 수 없는 그 소망을 마음에 품었습니까? 그랬으면 여러분 숨쉬고 있습니다. 끝날에 숨 받아 탯줄 끊어진 사람입니다. 사람 구실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 구해야 합니다. 숨을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거룩한 숨을 주시지 않겠느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그러니 구해야 합니다. 옳은 뜻대로 살수 있도록 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당신의 생명줄입니다.






3. 주의 이름 부르는 자, 숨으로 주를 만나리

*이 부분만 따로 설교하게 되어, 분량이 늘어났습니다.


1) 곧이 곧, 그러니 곧이 곧대로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끝날입니다. 그런데 아직 주의 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주의 날'은 끝날들의 끝날입니다. 여기서 '주'는 심판하시는 예수이십니다. 하나님의 차원으로 몸을 감추이신 그 분이 다시 나타나시어 마지막 날 마저도 끝이 납니다. 숨을 주시던 이가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시는 날입니다. 그 얼굴 뵈었을 때, 당신은 기쁨으로 맞이하겠습니까? 두려움과 공포로 떨겠습니까?


  숨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살게 합니다. 다 숨을 들이키며 사는데, 정작 숨은 우리 일상에 아무런 걸림도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살게하는 숨은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숨 덕'에 사는 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있습니다. 내가 숨 덕에 산다는 사실을 알면, 내 호흡 하나 하나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리고 이 숨을 값없이 주시는 분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키다리 아저씨>를 다 아시지요? 이 아저씨는 돈이 없는 한 아이를, 말 없이 뒤에서 후원해주는 아저씨입니다. 이 아저씨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아이를 살게 합니다. '내가 널 먹이고 있지'하며 뻐기지 않습니다. 마치 숨과 같습니다. 이 숨과 같은 아저씨 덕택에 아이는 가난하고 부모가 없어도 학교를 가고 책을 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자신을 후원해주시는 아저씨의 얼굴 보기를 고대할까요? 아니면 두려워할까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숨으로 호흡하며, 이 숨 때문에 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얼굴 보기를 고대하지 않겠습니까? 키다리 아저씨의 얼굴 보기가 두렵고, 꺼려지는 것은, 자신이 키다리 아저씨의 덕으로 산다는 것을 모를 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숨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숨으로 사는 줄도 모르고, 그 숨이 귀한 줄 모르니까, 그 숨 주시는 아버지의 얼굴 보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타나시면 내 삶에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데에 정신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을 다른데 팔아버리면 안됩니다. 우리의 정신은 온통 하늘숨에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자고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 부어주신 것입니다. 먼저 성령을 알고 받아야겠습니다. 그 성령 받으면 성령 주시는 아버지를 알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날마다가 됩니다. 끝날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줄이면 "곧이 곧, 곧이 곧대로"라 하면 좋겠습니다. '곧'은 곧다. 즉 일직선으로 삐뚤어짐 없이 쭉 뻗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날이 금새 온다'는 표현으로, '곧 온다'. '속히 온다'. 이런 말도 씁니다. 그러니 세상이 삐뚤어짐 없이 곧게 되는 그 날이 곧 옵니다. 그래서 "곧이 곧"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곧이 곧대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곧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온통 삐뚤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곧게 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숨결만이 곧습니다. 그 숨 고대로 받아 그 곧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숨이 삐뚤어짐 없이 곧게 내려와 우리 속을 채웁니다. 그 숨을 받아 우리의 속알이 숨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곧이 곧, 곧이 곧대로" 입니다. 곧이 곧되게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 전체가 곧게 되는 날이 곧오기 때문입니다.


2) 주의 이름은, 주의 이룸


  저는 이렇게 말했지만, 요엘과 베드로는 같은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끝날들을 살고 있는 우리가, 주의 날 오기까지 이렇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보존될 것이다.


  이 말은 그냥 이름만 불러재끼면 다 된다는 말 아닙니다. 이름은 '말'입니다. 그런데 말로 끝나면 되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말만 잘한다', '말은 청산유수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이 그저 '말'뿐이라면, 백날 불러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자꾸자꾸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이름만 불러봐야, 말만 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합니다. 이 말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름은 이룸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저 철수야, 영희야 부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일제치하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초들입니다. 제국주의의 군홧발 아래서, 여러분이 대한민국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건 단순히 말만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주권의 선언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 왕의 압제와 폭정 속에서 진짜 왕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말로만 되겠습니까? 그 왕에 대한 신뢰, 그 왕을 믿고 따름, 그 왕이 승리할 것을 소망함 없이는, 짓눌린 상황 속에서 그 왕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이름은 이룸입니다. 현실을 뛰어넘어 그 왕이 이루실 일을 믿고, 바라고 살아갈 때에, 그 왕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말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어디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려우니까 진짜입니다. 어려우니까 돌파하고 극복할 거리가 있습니다. 이 어려움에 부딪칠 때 주의 이름을 정말로 부를 수 있습니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곧게 서고자 해보세요. 그럼 하나님의 숨결만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곧게 서고자 하는 사람을 도우시는 그 숨결이 분명하게 깨달아집니다. 이전에 내가 눈으로 보았던 착각들이 깨지고, 그 깨진 틈 사이로도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오고 나감을 알게 됩니다. 이 숨결 아는 이가 숨결 주신 이를 부르는게 진짜입니다. 이름은 이룸입니다. 왕께서 이루신 그 일에 내가 들어가고자 할 때, 우리는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숨결을 느끼는 자가 부르는 주의 이름은, 주님을 부르는 소환주문입니다. 주님이 그 소리를 외면하실리 없습니다.


  주의 이룸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왕의 이름을 선언하는 것은, 그 분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결코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는 고속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목소리 크기로 하는거 아닙니다.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3) 그 다스림 안에서 사는 자, 보존될 것이다. 죽음을 넘어.


  말에는 숨이 있고, 숨에는 그 숨을 내쉬는 인격이 있습니다. 그 인격에 닿자고 말하는 것이지, 인격과 상관없는 말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친구 집 밖에서 친구 이름을 한참 불렀는데, 그 친구가 막상 나오니까, "너 왜 나왔어? 난 그냥 이름만 불러본거야." 이런 얼빠진 경우가 어디있습니까?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주를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마지막 때와 주의 날 사이에 우리를 어찌 만나주십니까? 숨으로 만나주십니다. 그 숨을 만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를 따라 살아봐야지요. 


  다시 순서를 역순으로 정리해봅시다. 예수를 따라 살아봅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분명히 옳은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그 일에 부딪쳐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삶은 줄곧 부딪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곧이 곧대로 진리가 진리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옳은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부딪쳐보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를 따른다고 할 때, 이것을 가리켜 '믿음'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믿음은 따름입니다. 성서는 결코 말로만, 머리로만, 느낌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을 따라 옳은 일을 위해 부딪쳐야 합니다. 


  그럼 그 부딪침 속에서 우리의 새로운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그 감각은 바로 하나님의 숨을 느끼게 하는 감각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어도, 생각으로 다 이해할 수도 없어도, 오늘 내 속을 들락날락 하시며 힘 주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숨줄로 우리와 하나님과 연결되어,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가 참말을 하며, 볼 것을 보도록 헌신하며,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숨 받은 자는 더욱 숨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숨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숨 주시는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숨 받기 위해 이름 부르면, 그 이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부어주셔서, 자신이 분명히 살아계심을 증거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숨 받아서 숨으로 말을 이루며 사는 삶을 계속 이어갑니다. 역사를 이어갑니다. 그 때 그 사람의 말은, 숨에 말 붙이니 말숨이요, 미래를 내다보는 말이 되고, 먹음에 너와 내가 없으니, 모든 사람과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되며, 죽음에 먹히는 인생의 끝자락에서도 그 죽음을 이기는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보존될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든지 보존될 것입니다. 여기 '보존'이라는 말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을 넘어 인격에 닿은 사람, 하나님께 곧이 숨줄로 연결된 이 사람은, 끝이 없도록 그 인격이 보존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숨을 따라서 그 인격이 하나님을 닮아 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하고, 원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며, 하나님과 같은 소망으로 달려갑니다. 이러한 인격이 구원된 인격이요, 죽음을 넘어 영원히 보존될 인격입니다. 곧 예수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보존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대적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이 있어 썩습니다. 썩기에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숨줄로 연결되면 보존됩니다. 썩지 않는 몸을 얻습니다. 죽음을 그렇게 이깁니다. 아들 딸도, 청년도, 늙은이도, 종들도, 이 죽음을 극복하게 됩니다. 곧이 곧대로 살고자 하니, 이 곧음이 죽음도 꿰뚫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그 분의 얼굴 보기


  그러니 이 끝날에,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하는거 아니라, 예수를 따라 옳은 일에 부딪침입니다.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자꾸 부딪치고자 하면, 하나님의 숨결이 정말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때 그 숨결 구하면, 하나님이 숨을 주시고, 그 옳은 일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말을 넘어 인격과 인격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를 만날 것입니다. 예수와 같은 싸움 할 때, 예수께서 구하신 같은 숨결을 받아, 예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임을 아는 일입니다.


  그 분은 숨. 그 분의 얼굴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분의 숨소리가 들리고,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 보이지 않는 숨결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바다 위를 걸어봅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곧 바다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진리를 말하는 일, 내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을 따르는 일이 바다입니다. 이 망망대해같은 바다 위에서 보이지 않는 숨줄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그 끝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그 때가 '주의 날'입니다. 그 날까지의 현실은 바다입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하면, 나를 집어 삼킬 것만 같은 바다입니다. 그러나 그 바다 위를 걸으면, 이 바다의 끝. 주의 날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분의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 바다를 걷는 건 숨 따라서 걷지 않으면 걸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라, 숨 받아서, 곧은 한걸음 한걸음 살아갑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르러 그 분의 얼굴을 봅시다. 그 분은 먼 바다에서부터 숨을 끊임없이 보내주시는 키다리 아저씨이십니다. 우리를 죽음에 썩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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