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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도행전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행전, 성령행전입니다. 복음서 이야기가 끝났다고 예수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Never Ending Story입니다. 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 행하셨듯, 그의 제자들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 행하므로 예수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지난 주 예수께서는 부활하시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죽기 전 말씀이나, 살아나셔서 하신 말씀이나 한 가지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 그리고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숨결을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일 직후의 이야기가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1. 모두가 가온을 단디, 콧김을 같이


[1]

  제자들이 그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 산은 예루살렘과 가까워서 안식의 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함께 거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자리에는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심당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있었다.

그들 모두가 가온을 단디 붙잡아, 같은 호흡으로 하나님께 이르려고,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제자들이 그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올리브 산이 어떤 산입니까? 예수와의 많은 추억이 있는 산입니다. 예수께서는 수시로 이 산에 올라 기도하셨고, 심지어 잡히시기 전 날 밤 이 산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도 그 예수님의 습관을 따라 자주 이 올리브 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날도 올리브 산에 갔다가 내려올 적의 일이었습니다. 아직 오시기로 한 숨님은 오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리며, 다시 그 가시방석 같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널찍한 2층 방에 앉아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이 때 함께 하던 제자들의 명단을 나열합니다.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아니기에 ‘알패오의 아들’이란 말을 넣었습니다),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마찬가지로 가룟 유다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 뿐만 아닙니다. 여자들도 있고, 예수의 어머니도 있고, 예수의 동생들도 함께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만큼 별 사람 다 모여있는 꼴입니다. 마태는 세리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민족 반역자인 친일파라 하겠습니다. 저기 ‘열심당’이라 풀어놓은 말은 독립운동가들입니다. 단 폭력을 써서 독립을 쟁취하지는 사람들입니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이 안에는 머릿수로 세지도 않는 여자들이 잔뜩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나이에 상관없이 함께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오늘날 생각하기에 정말 이상한 장면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 모두가 가온을 단디 붙잡았습니다. 가온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본래 단어를 보니 ‘심장’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인격의 중심’은 하나님 모시는 자리입니다. 이 가온을 단단히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인격의 중심으로부터 무언가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같은 호흡으로’라 되어 있습니다. 본래 단어는 ‘같은 콧김으로’입니다. 이 ‘콧김’이라는 말에서, ‘거친 호흡’, ‘열정’이라는 뜻이 나왔습니다. 즉 앞의 말과 합치면, “인격의 중심으로부터 같은 열정을 가지고” 라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이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인격의 중심으로부터 같은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닿고자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힘을 내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토록 기도했던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분명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숨결을 주시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넋놓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정말 그 말이 이뤄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제자들도 갈망했기 때문에 그들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음은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의 중심에 하나님이 오실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여러분이 이것을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격의 중심에서부터 간절히 원하여 하나님께 이르도록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어느 날’이 옵니다. 하나님 만나는 그 날입니다. 저에게도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 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날이 있습니다. 기대 없음으로 그 날을 놓치기엔, 하나님은 너무 귀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분을 기대하여, 여러분에게도 그 날이 오길, 새롭게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자들에게도 ‘이 날’이 찾아왔습니다. 그 날에 베드로가 일어나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 온 세계, 섬김의 밭


[2]

  그 날에 그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그들을 향해 일어나 말했다.

같은 이름으로 모인 무리의 수는 120명 가량 되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거룩한 숨님께서 다윗의 입으로 말씀하신 유다에 관한 말씀이 이뤄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를 체포하는 일에 주동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섬김의 밭'을 맡았으나,

불의한 삯으로부터 땅을 얻었기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그 지방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부르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입니다. 시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 안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또 이렇게 기록 되었습니다.


"그의 보는 일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그러니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시던 때, 

즉 이 시간은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인데,

그 시간 동안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 하나를 세워

우리와 함께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으로 삼아야 합니다. "


  불과 두달도 채 못된 40여일 전,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배신했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입으로 나왔던 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시편을 말합니다. 이 시편은 ‘거룩한 숨님’이 쓰신 것이라 말합니다. 제가 ‘거룩한 숨님’이라 풀어놓은 이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은 ‘거룩’이란 뜻이요, ‘영’은 ‘숨, 바람’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거룩한 숨님’입니다. 모든 시간 속에, 모든 공간에 계신 그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 였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만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을 하사하셨습니다. 땅을 하사하셨다고해서, 그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면 그만이란 소리가 아닙니다. 그 땅은 섬김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땅으로 온 세계를 주셨습니다. 이 온 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은, 이 땅이 내 땅입네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땅에서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 땅의 진짜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섬김의 땅’으로서 온 세계를 받습니다. 그들만이 세계의 참 주인들입니다. 만약 가룟 유다도 배신하지 않고 예수를 끝까지 가온으로부터 붙잡았다면, 그 역시 섬김이 땅인 세계를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이 방법 아닌 다른 방법으로 땅을 얻고자 했습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께 인정받아, 섬김의 땅으로서 세계를 얻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추구했는데, 그 방법이란,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리는 방법입니다. 그것도 돈 받고서 말입니다. 진리를 져버리고, 돈으로 자신의 거처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성서는 이 방법이 ‘불의’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따위 방법은 오히려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병들게 만들 뿐입니다. 오늘날은 진리와 상관없이 자기 땅과 생존을 얻고자 혈안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과정중에 하나님은 필요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서 있는 그 땅과, 그 땅에 서 있는 당신 전체의 주인이십니다. 결국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 땅과 생존을 얻고자 했던 가룟유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스승 곧 진리를 돈과 바꾸어 얻은 그의 땅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죽이는 밭, 곧 피밭이었습니다.


  이렇듯, 진리를 버리고, 돈으로 땅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 안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의 거처는 황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진리를 버리고 돈을 추구해보십시오. 그러한 자가 서 있는 땅은 죽음의 땅이 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이, 돈 때문에 살고 죽다가 결국 모두가 죽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 땅 안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땅은 어떻습니까? 진리를 버리지 않았습니까? 돈만 좋아하지 않습니까? 돈을 생각하면 답이 없음에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만 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해서 사람들이 죽음 가운데 신음하더라도 돈은 한 쪽으로만 쏠립니다. 다들 자기 돈 버는 문제에 바빠, 타인의 죽음을 깊게 고민할 여유가 없습니다. 죽음은 얼른 잊고 일상에 집중하려고 하지, 그 죽음 앞에서 죽음을 이기는 한 길을 걷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는 죽음만을 찾아다니셨던 분입니다. 마음이 죽었던 세리들, 몸이 죽었던 병자들, 사회의 암덩이로 여겨졌던 여자와 어린아이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기계 로마. 예수는 언제나 죽음의 현장 속에 계셨고, 그 죽음을 극복하는 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이 땅은 황폐해집니다. 모두가 죽음에 신음하기에 그 속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 자신이 가룟유다라는 말밖에 안됩니다.


  진리를 돈으로 바꿔, 자신의 삶을 꾸리려 했던 가룟유다는 내장을 드러낸채 죽었습니다. 성서가 이렇게 끔찍한 표현을 쓰는 것은, 이것이 정말 나쁘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입니다. 그리고 가룟유다가 죽어 버린 이 시점에서 베드로는 시편의 이어지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의 보는 일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여기서 ‘보는 일’이라는 단어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보는 일은 풀면, ‘미래 희망’입니다. 진리를 버리고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돈으로 미래에 희망을 품던 사람들은 결국 미래에 아무 희망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습니다. 돈이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서 결국 희망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희망이 이루어짐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은 무엇입니까? 인간과 세계의 새로워짐입니다. 곧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온전한 희망을 전해야 할 자리에 지금 한 명이 모자릅니다. 이 희망을 전하는 자리를 가룟유다가 스스로 박차고 나가 죽어버렸으므로, 베드로는 이 자리를 대체할 새로운 사도, 새로운 증인을 뽑아야 한다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로서의 자격은 어디에서 옵니까?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시던 때, 

즉 이 시간은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인데,

그 시간 동안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예수와 처음부터 함께 다니던 사람만이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첫 사람이 예수요, 세계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도 바로 이 예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사람만이 사도될 자격 있다고 베드로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조건에 바울은 예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에는 그와 함께 다닌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는 아직 성령이 오지 않으셨을 때입니다. 성령을 모시는 것은 곧 예수를 만나는 일입니다. 왕을 모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발언은 성령을 받기 전 발언이므로, 예수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동행한 사람을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3. 몫을 내어놓아, 숨그릇 준비 하기


[3]

  그들이 두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고, 다른 하나는 맛디아입니다.

저희가 기도하며 말했습니다.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섬김과 사도의 밭을 얻을 사람인지 보여주세요. 

유다는 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몫을 내놓았고, 

그 몫은 맛디아에게 떨어졌으며,

그가 열 한 사도의 수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후보로 올랐습니다. 요셉이란 사람과 맛디아라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120명 가량의 사람들이 기도하며 말했습니다.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섬김과 사도의 밭’을 얻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장면은 여호수아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약속의 땅을 얻었을 때, 여호수아는 제비를 뽑아 각 지파에게 어느 땅을 분배할 것인지 결정했습니다. 그 제비를 뽑을 수 있다는 말은, 약속의 땅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열 한 제자가 되어버린 예수 공동체를 다시 열 둘로 온전하게 하고자 합니다. 이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곧 약속의 땅, 섬김의 땅, 온 세계를 섬기며, 결국 새로워질 세계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고 제비에서 떨어진 요셉은 섬김의 땅을 상속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투표에서 떨어진 유스도도 예수의 제자요, 온 세계를 섬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열 둘을 다시 회복해야 했기 때문에 제비를 뽑은 것입니다.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예수 공동체의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약의 열 두 지파와 같이, 이 새로운 열 둘이 세상을 섬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자기 몫을 내어놓았다가, 그 몫이 한 사람에게 떨어지며, 그 한 사람을 새로운 열둘로 받아들이는 이 과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의 몫은 제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말로 '분깃'이란 말을 씁니다. 우리말로는 '몫'이 딱 맞습니다. 자기 몫을 내어놓고, 그 몫이 다른 사람에게 떨어지며, 그래서 그 사람을 세우면서도, 자기 몫이 줄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몫'이란 단어를 잘 봅시다, 이 단어는 무언가 줄여놓은 글자이고, 여기에 무언가 더해지면 글자의 본래 모양이 살아나는 글자입니다. 몫은 씨앗과 같은 글자입니다. 이 씨앗이 '움'트면, 몫은 목숨이 됩니다. 


  이렇듯 자기의 몫, 목숨 내어놓아 하늘숨으로 숨귀는 사람들이 예수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 열 둘로 시작하는 공동체는 마치 그릇과도 같습니다. 그 동안은 이 그릇에 구멍이 나서 아무 것도 그 안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릇에 깨진 곳이 없고, 온전해졌으니 이제 그릇에 담습니다. 온전해졌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자기 몫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온전해진 사람들의 그릇에 이제 무엇을 담습니까? 하나님의 숨결을 담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공동체는 숨그릇이라 하겠습니다. 진흙들이 모여 예수의 숨결을 담을 그릇을 이루고, 이 그릇은 세상을 섬깁니다. 자신들의 삶으로 담은 성령을 세상에 온통 붓습니다. 예수께서 홀로 하셨던 그 일을, 이들이 한 몸을 이루어, 성령으로 호흡하며 함께 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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