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난 주 설교를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몫 내놓는 공동체가 숨그릇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몫'은 무엇입니까? 내 몫이요, 결국 내 몫으로 주어진 것은 '목숨'입니다. 자기 '몫' 내어놓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의 뜻 이뤄내기 위함입니다. "뜻 드러내는데 제 몸 아끼지 않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통해 드러납니다. 즉, 자기 몫과 목숨 내어놓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렇게 사람 세우기 위해 자기 몫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요, 교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임은 마치 그릇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담아내고자 모인 사람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그릇을 만듭니다. 이상하게도, 자신들을 내놓고 내놓고 내놓는데 그 속이 결코 비지 않는 그릇입니다. 오히려 그 속이 꽉 채워져 있습니다. 무엇으로? 숨님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숨그릇'입니다. 그 속이 차 있으니 거죽이 아닙니다. 참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보리떡과 같은 자신의 몸을 계속 찢으심에도 그 분은 없어지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숨그릇은 부활그릇 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 상황을 살펴봅시다. 맛디아가 뽑혀서 이제 새로운 열 둘이 이루어졌지요? 숨그릇이 다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제 숨 채울 일 만이 남았습니다. 이제 오늘 보려는 본문에서 바로 그 사건이 등장합니다.

 

1. 49일째에 말숨받음

 

사도행전 2:1~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하게 불어오는 숨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거룩한 숨으로 흘러넘쳐, 

 

  이 숨 받는 날은 유대인의 절기 중에서 '오순절'에 이뤄졌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그 날 밤 이후 49일이 지난 날입니다. 그래서 7x7이라 '칠칠절'이라 부르기도 하고, 49일이 지난 50일째 되는 날에 공동체가 모여서 이 날을 기념하므로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맥추절'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은 밀을 첫 추수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즉 49일동안 밀을 추수하는데, 그 추수가 잘 끝나서 감사하고, 먹거리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에서부터 생각을 이어가봅시다. 유월절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 날 이집트의 첫번째 난 생명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각 집안들의 맏아들이 모두 죽어나가고, 파라오의 맏아들도 그렇게 명을 달리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셨네', '파라오가 고집하더니 그 꼴을 당했네'라 생각하기 쉽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맏아들이 죄다 죽어나가는 그 심판 속에는 하나님의 맏아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월절은 십자가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 날 죽은 어린양이 곧 예수요, 어린양 예수가 십자가에서 달리신 날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처음 난 것들이 모두 죽는데, 그 죽음 속에 하나님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그 심판을 먼발치에서 나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심판 속에 자기 자신과 같은 아들을 두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들이 죽어서 서럽게 우는 파라오의 비통함을 하나님도 아시겠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왜 자기 아들도 심판 아래 두셨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집의 문들마다 그 어린양의 '피'가 발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이 피바른 문을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에 안들어갑니다. 이제 이 피바른 문지방을 넘어서 출애굽하면 다시는 이 이집트를 뒤돌아볼 일없이, 이 노예 생활하던 집에 돌아올 일없이, '완전히 떠남'입니다. 

 

  악이 지배하던 현시대속에서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현시대가 죄없는 자의 피를 요구하는 악한 세대임을 자신의 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 예수 피묻은 현시대의 문지방을 넘어서 새시대로 탈출한다는 말입니다. 현시대에서 그의 핏자국을 보고 새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 날이 유월절입니다. 곧 내 인생에 벌어진 출애굽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 즉시부터 망할 현시대에 속하지 않고, 오는 새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생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현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돌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내는 현시대의 잔혹함에 내가 참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죄 없으신 그 분의 피는 현시대에서 새시대로 넘어가는 호그와트로 가는 마법문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나, 전혀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월되어 유월절입니다.

 

  그렇게 이집트를 떠나서 황량한 광야길을 걷습니다. 유월절 이후 광야길을 걸어서 시내산에 당도했습니다. 몇일만에 당도했을까요? 49일입니다. 이제 오순절입니다. 바로 이 날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 오순절 역시, 가만 들여다보면 새로운 의미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잘 살펴봅시다. 이 사람들은 유월절 날 십자가 사건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로부터 3일 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40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승천 하셨습니다. 그럼 43일이죠? 그러부터 일주일정도 지난 49일째 되는 날, 즉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오순절입니까? 왜 하필 십자가 이후 49일을 기다리셨습니까? 하나님은 무언가 보여주고픈 역사의 그림이 있으십니다!

 

  어린양의 피로 탈출한 그 유월절, 그리고 49일 지난 오순절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을 돌판에 새겨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돌판에 새겨진 말을 지키지 못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 짓고 부패하지 않았습니까? 똑같이 예수의 피로 현시대를 벗어난 그 유월절, 그리고 49일 지난 오순절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숨결을 받았습니다. "거룩한 숨으로 흘러넘쳐". 그럼 이제 된 것이죠. 예수님 말씀처럼 "다 되었다" 하는 것이죠. 믿음의 선조들은 말을 받아 그것을 이어주었고, 오늘의 사람들은 숨을 받아 그 말을 지켜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수평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이 사람과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이어졌습니다. '전수'입니다. 그럼 그 말을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대로 살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수직적 차원. 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을 숨으로 지키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와 연결되고, 숨을 통해 하늘과 연결됩니다. 오늘 나의 삶이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교차점, 내 마음은 하나님 모시는 '가온'이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역사로부터 흘러내려왔던, 우리 선조들이 지켜왔던 그 말을 받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간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숨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았던 그 말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그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들을 새롭게 지으시어,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비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의 힘으로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대화하시고 느끼셨던 하나님을, 숨을 따라 말을 지키는 우리네 삶을 통해서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만납니다.

 

2. 숨님을 따라 온 세상 사투리로

 

숨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온 세상의 사투리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렇게 제자들에게 숨이 차오르니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배웠던 것을 기억해봅시다. "끊고 숨쉬어 말하고 먹고 먹히고 살아난다" 했습니다. 숨을 받았으니 이제 제자들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말숨'입니다. "숨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라고 되어 있음을 주목하세요. 하나님께서 말하도록 하신 것을 말합니다. 아무 소리나, 허튼 소리나, 거짓된 소리나, 내 고집 피우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숨에 말 붙였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각각 다른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사투리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우리 각자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 날 숨받은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숨은 온통 다른 나라의 말들이었습니다. 왜 였을까요?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대로, 제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몫을 내어놓은, 곧 온세계를 상속받은 그 분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이 온세계를 상속받아 온세계를 섬길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이제 꼬인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가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이들이 숨님을 따라 각각 다른 나라의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바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적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말이 온통 달라진 사건이었습니다. 말이 달라졌기 때문에 서로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말보다는 속이 먼저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속이 삐뚤어졌으니 그들이 내는 말은 한 목소리라 할지라도 삐뚤어진 말입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말에 온세계가 찬성한다고 그게 바른 말이겠습니까? 못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의 제자들에게 숨님을 주셔서 그 속의 '올'이 곧아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소통하는 말을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바벨에서 서로 꼬인 말들을 풀어도 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숨을 받아 속이 곧아져서, 참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 내 호흡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으로 참말을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즉 바벨에서 갈라졌던 언어들을 다시 하나의 숨으로 불러모을 때입니다. 사람들이 각자가 전세계 각국의 사투리로 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큰 일들'입니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입니다. 이제 이 분을 믿어 우리도 숨 받고, 하나님과 하나되고, 사람과 하나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걸 온세계에 전하는 그 말숨부터 그 섬김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이런 저런 말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이 정말 안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일까요? 언어 사용의 습관이 달라서일까요? 아닙니다. 숨이 다르면 아무리 말로 해도 해결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말을 연습하기 이전에 한 숨 쉬어야 합니다. 함께 하나의 숨을 쉬고 있어야, 그 다음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바르게 생각해야 바르게 말할 수 있지요. 바르게 생각하지 않는데 말로 아무리 맞춰봐야 소용이 있겠습니까? 숨님은 우리에게 바른 생각을 주십니다. 올바른 것을 믿고, 올바른 것을 바라며, 올바른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바르게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보다 숨이 먼저입니다. 같은 숨으로 숨쉬면, 그래서 생각과 삶이 맞아들어가면, 말은 자연히 맞춰집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제 말을 알아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숨소리가 들리십니까? 제가 성령으로 숨쉬며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면, 여러분은 숨소리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여러분도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바른 생각만이, 이 성경의 말들을 잘 전하게 하고 잘 듣게 합니다. 성령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이 성경의 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숨입니다. 숨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귀함을 알아서 그 분의 살점을 먹게 하십니다. 즉 "말씀을 알아먹게" 하십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숨님 없이 말만 가지고 맞춰보려고 했습니다. 말이 꼬여 소통할 수 없는 바벨의 문제를 말로 고쳐보려고 했습니다. 이 일에 가장 열심을 냈던 민족은 유대 민족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만들고, 이 율법에 대한 다양한 참고서들을 만들었습니다. 말을 어떻게든 맞추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말이 권력이 되고, 사람들을 옭아매게 되었습니다. '내 말을 받아들이고, 니 말은 집어치워'가 되었습니다. 강요가 되었고, 억압이 되었습니다. 

 

  숨없이는 말은 참말이 될 수도 없고, 서로 통할 수 없습니다.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했던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내선일체'하자 했습니다. 조선사람 일본사람 하나되자 했으나, 그들은 조선없애고 일본사람으로 하나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영 조선말이 거슬립니다. 그래서 조선말을 다 없애고 일본말만 하게 했습니다. 그럼 하나될 수 있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너도 말하고, 나도 말하고, 그러면서 누가 높을 것도 없이 하나가 되어야지, 누군가는 위에서 군림하고 누군가는 아래서 굴종하는 것은 하나라 할 수 없습니다. 말을 못하게 하고, 말을 없애버려서 하나되는 건 하나됨이 아닙니다. 거기에 숨이 없습니다. 자기 말만 있습니다.

 

  광복 이후의 역사는 어떠합니까? 너는 공산주의자니, 너는 민주주의자니 싸웠는데, 결국 이데올로기는 다른 게 아니라 말싸움입니다. 숨없이 말가지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더니, 알고보니 내 형제요 동포들이었습니다. 나와 말이 다른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숨 쉬는 사람이란 거 까먹고, 온통 말로만 머리를 채우니까, 이 나라가 허리가 끊어진 둘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가 온통 분열하고 서로 죽도록 싸우고자 할 때,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다 떠나서 우리 같이 숨쉬는 사람들이니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이 온통 그 강대국들이 하는 말에 빠지고, 지도자들도 서로 높은 자리 앉으려고 거짓말하고 선동하다보니 이 민족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숨이 있었겠습니까? 온통 자기 말만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떠합니까? 말이 안통하는 사람 미워하고, 말보다 숨 먼저 있음을 생각지 않는 것은 여전합니다. 하나되지 못한 곳에 숨이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시는 숨님이십니다. 말 가지고 싸울 때가 아닙니다. 숨님으로 하나될 때요, 숨님으로 꽉 찬 참말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숨으로부터 끊어진 사람들은 많은 말들을 했지만, 옳은 말 조차도 사람을 괴롭게 하는 일에 써먹었습니다. 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 때문에 사람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 마저도 죽입니다. 유대민족만의 얘기 아닙니다. 유대민족은 세계의 모든 사람이 그러함을 드러내는 대표 민족입니다. 말 가지고 계급을 만들고, 하나 될 수 없음은 세계 공통이요,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린 숨없는 말 하지 말고, 숨있는 말, 말숨합니다. 말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말이 말숨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자는 말이 말숨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말이므로 곧 진리입니다. 

 

 

  하여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숨을 받아가지고, 온 세계를 섬기는 사람으로 자격을 얻어, 온 세상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말하길, "이 시골뜨기들이 어떻게 남의 나라 말을 배웠지?" 했습니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 건 예나 지금이나 권력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다 중국어다 열심히 배우고자 합니다. 배우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저 나 하나 먹고 살고자 배우는 거라면 별로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함입니다. 서로 숨 통하기 위해 길내는 것이 말하기 입니다. 그런데 서로 소통하고, 하나되고, 숨 통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만의 목숨만을 위해 배우는 외국어는 그저 자기 자신을 높일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다른 나라 말 좀 한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서기관'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본래 '문법학자'들입니다. 즉 말 가지고 연구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말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서는 사람들은 자신이 높은 줄 착각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갈릴리 촌구석 사람들이 각종 외국말을 쏟아내고 있으니, 사람들이 무척이나 놀란 것입니다. 더불어 말 가지고 만들었던 계급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입니다. 계급이 와장창 깨지니 하나되는 순간입니다. 말로 쌓아올렸던 계급의 바벨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순간입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문제가 있지요. 표준말은 좋은 말이고, 사투리는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건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고, 어떤 사람들이 이 따위 말에 동조하는 것입니까? 숨받고 말하기 시작한 건, 각 지역 사람들이 듣고서 곧장 알 수 있던 사투리였습니다. 숨쉬는데, 표준어든 사투리든 관계 없습니다. 숨쉬면 니가 높고, 내가 낮고 이런 것 없습니다. 

 

3.  'ㄹ' 과 'ㅁ'의 차이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말하길,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나보다" 했습니다. 술은 고대문화 속에서 제사지낼때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은 이 술을 통해서 접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술을 먹고 자신과 현실을 잊고, 알 수 없는 힘에 자신을 맡겨 말하는 사람들이 곧 고대의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시골뜨기들이 갑자기 외국말을 하고 있으니, 어떤 이들은, '저들이 새 술을 마시고 취해서 접신했구나'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말은 반만 맞습니다. 제자들이 취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숨에 취했습니다. 이 'ㄹ'과 'ㅁ'의 차이는 큽니다.

 

  왜냐하면 숨은 기억하게 하고, 술은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숨과 술의 차이입니다. 세상을 돌아보십시오. 정말 중요한 문제, 인생에서 꼭 생각해야할 문제를 자꾸 생각 못하도록 만듭니다. 술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예능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망각하게 만들고, 급기야 잊고 잊다보면 결국 잊음은 사람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또 이것이 술이 가진 매력입니다. 현실을 잊게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괴로운 이들이 현실을 잊고자 술에 취합니다. 그러나 잊어봐야 다시 그 현실 앞에 서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럼 잠시 잊는 것이 참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뚫어낼 수 있는 힘이 참된 것이겠습니까?

 

  'ㄹ'과 'ㅁ'의 차이는 충격적으로 큽니다. 술은 잊게 하나 숨은 기억하게 합니다. 숨은 다른 이들의 아픈 현실을 똑바로 기억하게 만듭니다. 그의 아픔을 공감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프고 추악한 현실을 뒤집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현실 속에서 그 한 분을 따라 바로 당신도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숨님은 기억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생각이 납니까? 여러분의 역사의 졸가리를 술은 끊어놓습니다. 흔히 "필름이 끊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삶, 면밀히 기억하고 올바로 살아가야 할 그 기억의 줄을 자신이 술로 끊어버린다니요. 오히려 이어야지요. 이어야 합니다. 성령은 삶을 잇게 하십니다. 기억으로 잇고 이어서 그 기억이 하나님께 닿게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는 성령으로 이어가시는 힘이 있으십니다. 그 분의 이름조차도 그러합니다. '예'는 풀면 '이어'요, '수'는 '능력'입니다. '예수'는 '잇는 능력'입니다. 무엇으로 이으십니까? 숨으로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이으십니다. 이 숨을 오늘 우리도 쉬어야겠습니다. 모두가 하나되지 못함에 질식당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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