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11


1. 이스라엘 안에서 말씀하신 그 나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의 그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성령을 기다리는 자들이 부활한 예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그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가 이 때인가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기서 이 나라는, 지금 유대인들이 오해하듯, 유대인만의 나라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가 아닙니다


  '시오니즘'도 아니고, '끼리끼리'도 아닙니다. '우리만'도 아니도, '니편내편'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그 나라'는 '하나님의 우주 가족'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새 가족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예수가 맏아들인 이 가족은, 온통 입양아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죄다 입양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가족은 예수의 살점을 함께 먹고, 성령으로 함께 숨 쉬는 새로운 가족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생존 아닌 생명을, 범죄 아닌 용서를, 편나눔 아닌 하나됨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이 이스라엘 나라가 유대인 가족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분명히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새 가족에는,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간 예루살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고, 온 이스라엘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같다고 부르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땅끝에 살고 있는 한 사람조차 이 가족에서 배제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의 가족으로 초대 받아야 합니다. 지리적인 수평적 차원으로는 땅 끝이요, 시간적인 수직적 차원으로는 가심부터 오심까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은 '시오니즘'일 수도 없고, 그 옛날에만 있던 것일 수도 없습니다. 복음이 땅 끝에 이르고,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그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다 완성될 것입니다.


2. 증인 : 가족을 모으는 사람들


  이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가리켜 '증인'이라 합니다. 증인은 무언가를 본 사람들이죠. 이들은 무엇을 봤습니까? '부활'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완전히 이기셨음을 보았습니다. 죽음은 다른 것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담벼락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를 보니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담벼락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 집에 삽니다. 예수와 하나님이 완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무려 40일간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확인했던 제자들입니다. 이 증인들이 가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벼락을 무너뜨리신 분! '악과 죽음을 이긴 한 분'에 대해 전할 것입니다. 그 분을 따라 우리도 하나님의 가족되어 악과 죽음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소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사람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되었다! 그를 믿으라! 그를 믿어 너도 입양되어라! 사람과 사람의 입과 귀로 이 한 길이 전파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과 사람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집니다. 



  또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집니다. '전수'입니다. '전도와 전수'. 이 전도와 전수로 닦인 길을 따라 성령이 불어오십니다. 우리의 말을 따라 숨이 따라오신다는 말입니다.이럴 수가 있습니까? '왕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이 기억납니다. 예수의 신발끈도 풀기 버겁다는 세례요한에게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와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내가 전한 말에 따라 임하시는 성령, 나는 왕의 길을 예비하고, 왕의 숨결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물에 빠져 숨이 다해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새로운 숨줄이 연결됩니다. 나의 말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말은 길을 내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성령 오시도록 길을 내는 것이 곧 나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우주 가족이 완성되어, 죽음 없는 세상을 상속 받습니다. 그런데 언제요? 예수께서는 그 때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못 박아 두십니다. 하지만 때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절망시킬 수 없습니다. 마치 언제 통일될지 알 순 없지만, 더욱 더 통일을 위해 애써야 함과 같습니다. 그 곳에 가족을 두고 온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그리움이 커져가듯, 우리는 이 가족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들로서 최선을 다해야 겠습니다. 모두가 죽음을 발아래 밟고서 살아갈 그 날을 갈망하고서 말입니다.


2. 가시고 오실 그 사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리고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께서 하늘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승천이 어떠한 의미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멀리 떠나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차원이요, 땅의 차원과 중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차원으로 가셨으나 가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 계십니다. 여기서 구름의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계심'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있던 구름기둥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함을 나타냈듯, 구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구름기둥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그쳤지만, 예수는 그 구름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그 분과 함께 교제하며,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그 분은, 구름 한가운데 계신 예수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를 보고만 있는데, 흰 옷입은 두 사람이 제자들 곁에서 말합니다. 왜 '곁'입니까? 우리가 '재림'이라 부르는 단어는 '곁에 있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멀리 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곁에 계십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입니다. 당신의 맘을 보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가 재림하신다는 것은 멀리 갔다 돌아오신다는게 아니라, 그 분이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셨음이 마침내 모두에게 드러나는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곁에'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는 예수가, 눈에 보이는 차원에는 흰 옷입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제자들을 정신 차리게 해줍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신 것과 같이 그대로 하늘로부터 오시리라."


  그가 하늘의 차원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땅의 차원에 있는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이렇듯, 그는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생선구이를 드시면서도, 갑자기 사라지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유령같지 않으시고, 몸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 분이 땅의 차원에서 하늘의 차원으로 가셨듯, 하늘의 차워에서 땅의 차원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이제 몇 장 지나지 않아,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만납니까? 미리 말씀드립니다. 성령으로 만납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그가,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시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 받은 사람은 하늘과 땅을 잇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도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예는 이러합니다.




  모두에게 버림 받은 이가 다시 삶을 찾았습니다. 그럼 이 친구에게 예수께서 뚜벅뚜벅 걸어가서, "너 성악하려무나"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통해서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어느 대학생이 이 친구를 만났고, 이후 이 아이는 모든 절망의 순간에도 일어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령입니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이 전달되고,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예수가, 예수과 하나님이 연결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에 분명히 존재하는 역전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친히 사심을 나타내는 확실한 많은 증거들'입니다. 


  그러니까 달려야지요. 가시고 오시니까, 그 사이에 가족들을 모으기 위해 달려야 할 증인이 우리라는 말입니다.


3.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성령행전>은 시작도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도 아직 안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본문은 100미터 전력질주를 하기 전 출발선에서 출발 자세를 취하고 숨을 고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달려갈 길 준비하는 중에,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중요한 일을 합니다. 준비를 위한 준비, 창조적 준비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볼 것입니다. 힌트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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