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5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데오'는 신(神), '빌로'는 '사랑함'이란 뜻입니다. 즉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누가는 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름 가진 남자에게 편지를 쓰는데요(우리말로 하면 '김신애(神愛)'씨 정도 될까?). 아마 데오빌로는 당시의 지배층, 지식인 계층이었을 것이고, 누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 잘 짜여진 글을 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데오빌로에게는 1탄이 전해졌지요.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것에서부터,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신 내용, 그리고 하늘로 올리우심까지"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2탄을 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행전>은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두번째 글입니다. 내용은 이제 "승천부터 그 이후의 일들"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이것을 살피기 전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글을 사도들의 이야기로만 보는 것은 누가의 의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 2탄임을 기억합시다. 즉 예수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 예수는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여 하늘의 차원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보이지 않는 예수께서 이제 사도들을 통해서 눈 앞에 드러나십니다. 이제 사도들의 삶이 변하고 그들을 통해 벌어지는 모든 놀라운 일들 속에서 예수가 드러나십시다. 즉 '다른 사람을 통해 나타난 예수를 발견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고로 <사도행전>보다 <예수행전>이라 부르는 것이 더 맞는 말일듯 싶습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해 받으심'은 십자가 입니다. 부당한 처벌. 동족과 이방 사람들의 모든 배신을 한꺼번에 받으신 사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그의 죽음을 외면하셨기에,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것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였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모든 제자들은 다 떠나고 그 아래는 사람 대접도 못받는 여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에게 끊어져 철저히 홀로되신 그이가 죽음을 뚫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연결하는 참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시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시고,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십니다. 그는 끊어져 봤기 때문에, 그 아픔을 아시는 분입니다. 끊어져 본 일이 있으니, 더욱 끊어진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리곤 참으로 연결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가 '확실히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여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이셨고, 무려 5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만졌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 무려 40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죽기 전에 하셨던 그대로의 말씀을 살아나셔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셨던 말씀이 사도들에 의해서 현실로 구현 될 것입니다. 즉 그가 말씀하신 글자들이 사람이 되어 이 땅을 걷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 사도요, 또한 우리입니다. 예수의 말씀과 맞아 떨어지는 그들의 삶이 예수의 친히 사심의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오늘은 이것만 알면 됩니다. '말씀-사람-현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아직 이 일이 시작될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말고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자체가 고역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시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요, 사람들의 예수를 향한 분노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지금 바로 그 '예루살렘'에 모여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일주일을 머무셨다가 살해당하신 바로 그 사건 현장입니다. 아마도 이 곳 사람들은 대장이 죽었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뻔뻔스럽게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얼마전 어머니가 보시는 드라마를 잠깐 봤는데, 빚쟁이들에게 쫓긴 어느 남자가 자기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장례까지 지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시름에 잠기며 개고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언제나 걸릴까 전전긍긍하여 부활하지 못합니다. 그 자식들도 빚쟁이들이 독촉에 괴로워합니다. 그 자식들 처지가 참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처지는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이들은, 마치 훌리건처럼 예수를 죽이는데 열광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목숨으로 빚을 받아내려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바글바글합니다. 그럼 숨어 있던지, 다 흩어져 있던지, 멀리 가 있던지 해야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동네에서 예수는 자신을 보이셨으며,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예루살렘에 모여있습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보이지 않으셨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대장을 죽인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이어주시는 '숨줄'입니다. 마치 스쿠버다이빙 하는 사람이 입에 산소 호스를 물듯, 하나님으로 숨쉬게 하는 그 숨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 숨쉬면 목숨을 뛰어 넘습니다. 목숨이 끝나도 하나님 숨이 있어, 죽어도 다시 삽니다. 성령은 정신은 분명하게 하고, 하나님의 소망으로 꿈꾸게 하시며, 몸을 하나님 뜻에 따라 맞추도록 실천력을 주십니다.


  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 하십니다. 침례는 우리 교단에서는 세례로 바뀌었는데, 세례나 침례나 의미는 같습니다.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로 나는 죽고, 나는 예수와 함께 부활합니다. 새사람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류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숨님이신데, 그 분으로 호흡하는 사람은 죽음을 이깁니다. 죽음을 이기면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학벌, 돈, 명예, 욕심, 폭력, 질병 같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모두 죽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 인생 끝자락에나 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있습니다. 이 죽음을 극복하지 않은 한, 인간은 온전히 살 수도 없고 언제나 죽음으로 비롯된 것들에 끌려다니는 노예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만나는 것은 복수심입니다. 누군가 나를 험담했을 때, 누군가 나에게 해끼쳤을 때, 나도 그를 욕하고 험담하고픈 마음은 누구나 경험합니다. 그에게 복수해야만 살 것 같습니다. 이 역시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험담을 듣고도 그를 축복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에게 해끼쳤음에도 그것을 해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게만 들리는 이 일이, 죽음을 극복함으로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되어야지 노력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곧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그렇게 됩니다. 제자들이 훗날 죽음을 극복하여 예수의 뜻을 이룸은 바로 이 성령 때문입니다. 아까 <사도행전>을 <예수행전>이라 불러야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을 받아 예수 드러내는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불러도 좋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행전>이자 <성령행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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