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이나 등장하는 단어는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여기서의 모든 사람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사람, 같이 밥먹는 일은 꿈꿀 수도 없는 사람 마저도 포함한다.(바울은 그러한 사람을 어찌 대해야할지 다음 구절들에서 얘기해줄 것이다)
두번째 줄 문장을 개역성경에는 "선한 일을 도모하라"라 했는데, 선함과 온전함은 다르다. 선함은 '아가토스'고, 본문에서의 단어는 '칼라'를 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면, 마치 악과 선이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선과 악의 이원론을 말하지 않는다. 결코 악은 선과 대등한 위치에서 싸울 수 없다. 선은 '절대선'이기 떄문이다. 악은 선에게 기생할 뿐이다.(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악은 '온전함'으로 이긴다. 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을 생각함으로 이긴다. 온전한 일은 악을 악으로 갚는데에는 없다.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는데 온전함이 있다. 그러니 한 쪽에서 먼저 복수를 포기해야 한다.
"앞서 생각하세요"는 '프로.노에오'라는 단어가 쓰였다. "도모하다"도 좋은 번역인 것 같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대책과 방법을 세우다."
[2]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들이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사안을 맡기세요. 기록되기를,
"원수 갚음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끝내 악은 심판받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악을 판단하시고 적절한 처벌을 내리시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하나님이시다. 즉,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심판하려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복수를 통해서 정의를 이룰 것같다는 망상은 허튼생각이다. 무협영화를 통해 우리는 보지 않는가?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사안"이라 풀어놓은 단어가 원문에는 "토포스"다. 토포스는 '생각의 범주'다. 우리 머리 속에 복수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없을 수 없다. 불의한 일을 저지른 사람을 보고도 그저 눈감아 줄 수 없는 정의로운 마음이 우리 속에 있으므로. 그 생각의 카테고리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그 사안에 대해서 유능한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믿고 맡기라는 말이다. 그는 그 지혜롭다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재판장이시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신명기 32:35. 32장 전체를 읽어보라. 하나님의 원수는 무엇인가, 그 분은 그 원수에게 어떠한 일을 행하실 것인가. 바울은 신명기 32장을 떠올리며, 저 구절을 인용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원수 갚음'이라 풀어놓은 단어는 '에크디케'다. "디케로부터" 즉, 나중에는 뜻이 '원수 갚음'이 되었지만, 본래 의미는 "공의로부터" 이러한 의미다. 어제 봤던 영화에 계속 등장하기도 했다. 눈을 가리고 검과 천칭을 들어 공정하게 판단하는 여자의 상. 가시광선에 의지하지 않은채 사실을 사실 그대로 판단할 수 있은 공정함. 하나님은 그것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2014. 10. 29. 기록을 추가함
ISIS가 터키의 지하교회를 핍박하며, 예수 믿는지 믿지 않는지에 따라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는 사진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아이가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 속에 '로마서 12:19'가 있다. 이 아이는 참으로 숨 쉬는 아이가 분명하다. 힘이 없어 원수 갚을 수 없는 이 아이는, 하나님께 그 원수 갚음을 맡겼다. 이 아이의 힘 없음은, 곧 하나님의 힘 있음에 대한 신뢰다.
[3]
만약 여러분의 원수가 배고프거든, 언제든지 그를 먹이십시오.
만약 그가 목마르거든, 언제든지 그를 마시게 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여러분이 그 원수의 머리 위에 핀 숯불을 쌓아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선 안에서 악을 이기세요.
원수 갚음은 하나님의 몫이요,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있다. 원수가 배고프고 굶주릴 때 그를 돕는 것이다. 여기서 '원수'라는 말은 '에크드로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미워하다'에서 왔다. 즉 원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배고프고 목마를 때 돕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 한다. 그것도 언제든지(subj. + an).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머리 위에 핀 숯불을 쌓아놓는 일이라 한다. 잠언 25:21,22의 인용이다. 지금이야 불피우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화덕에 불을 피우고, 그것으로 조리와 난방을 했으므로, 불씨를 지키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옆집에 나와 사이가 안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네 집에 불씨가 꺼져버렸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이 집 저 집 불씨를 얻으러 다니다가 허탕만 치고, 가장 오고 싶지 않았던 우리집 문턱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최후의 당신마저 불씨를 거절함으로 그에게 크리티컬 데미지를 입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머리에 이고 온 그릇에 숯불을 쌓아주어라.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어라. 설령 원수일지라도.
이것이 악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선 안에서 악을 이기는 일이다. 앞서 말했듯, 선은 악과 싸우지 않는다. 선 안에서는 악은 질식당한다. 빛이 환한데서 어둠이 있을 자리가 없듯. 따라서 악에 패배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선은 없다. 그러한 선은 가짜 선이다. "하나님을 믿는다(I believe in God)"는 말은 진짜 선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고, 그 선은 악에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선이다. 절대선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반드시 '디케'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니, 원수에게도 기꺼이 숯불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선을 믿기 때문에, 선을 줄기차게 행하며, 선을 이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