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 : 전에는 '옛 사람'이라 하면 삶의 의미 없이 허랑방탕하게 살던 나의 못난 과거를 떠올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이 '옛 사람'을 공유하고 있다면, 이것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뒤틀린 인격 총체를 말하는 말이 아닐까? 어느 과학자는 유전자를 가리켜 '불멸의 자기 복제자'라 했다. 이 불멸의 자기 복제자가 자신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다른 복제자와 생존 경쟁이 벌어지고, 이 때 몸은 이 자기 복제자를 태우고 있는 생존 기계로서 기능한다. 인류의 자기 복제 과정의 길고 긴 과정 속에서 축적되었던 유전자 정보들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섬긴다. '나 살아남기'. 바로 생존의 문제다. 우리의 생각과 몸이 이것에 익숙해졌다. 이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 사람을 '옛 사람'이라 부르려는 것이다. 자기 복제를 위해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 생각도 몸도 이것을 섬기는 가련한 인간이 옛 사람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본래부터 옛사람이었다고 말 안한다. 사람에게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은, 죽게 되어버린 그 때다. 그 때 이후로 죽게 되었으니 살고자 애쓴다. 그럼에도 죽는다. 죽게 된 그 때는 사람의 인격이 삐뚤어진 그 때다. 이 삐뚤어진 인격은 궁극적 목적이 없기에 자기 생존만을 추구한다(궁극을 잃어버렸기에 서로 잘못을 미루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보라). 목적을 잃어버린 생각, 헤매는 몸. 과학자의 말에 하나 딴지를 걸자면, 이 삐뚤어진 인격은 불멸도 아닐뿐더러, (지구가 차디차게 식어서 죽은별이 될 것이라는 것이 과학자들의 전망이다) 오히려 서로를 죽게 한다.
우리는 첫 죽음을 가져온 사람의 후손이다. 그리고 이전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맘과 몸에는 '자기 생존'의 유전 정보들이 축적되었다. 말 그대로 옛 사람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 생존을 넘어선 목적, 자신의 삶을 온통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일을 필요로 한다. 이상한 일이지. 인간에게는 자기 생존이 전부가 아니다. 돈 되는 일만 따라가는 것은 생존하고자 하는 유전자에 충실한 것이겠지만 이것만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은 이 옛 사람을 벗어나고자, 자기 생존보다 더 큰 목적을 추구해본다. 그래서 내 가족, 내 집단, 내 종교, 내 국가에 힘쓴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내 종교 때문에 구교와 신교 사람들이 서로를 원수보듯 했고, 국가주의에 빠져서 유럽 전체가 쑥대밭이 되지 않았는가? 내 가족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선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나. 이른바 로얄 패밀리라는 재벌들은 남쪽을 쥐락펴락하고, 김씨 일家는 북쪽을 쥐락펴락하니 말이다. (김정일 유언에 통일은 "우리 '가문'의 사명이다" 라 쓰인 것을 보고 식겁) 자기 생존보다 더 큰 목적이 있음은 분명하거니와, 그 궁극에 목적까지 이르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옛 사람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바른 지향은 무엇인가? 옛 사람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흔들리지 않는 북극성은 무엇인가? '무엇'이라 하면 안되겠다. 인격의 인간은 무생물을 목표로 살 수 없으니까. 인격은 인격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그'라 한다. '그'가 우리가 생존을 넘어서 바라고 나아가야 할 바로 '그 분'이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데오스라 부르는, 중국에서는 상제라 부르는, 이스라엘에서는 아도나이라 부르는, 여기 조선 땅에서는 하나님이라 부르는 바로 그 분 말이다. 그 분이 궁극적 목표시다. 우리는 그 분을 만나야 한다. 이 갈망이 우리 맘 깊은 곳에 누구나 있다. 허나 옛 사람에게는 그 분이 안보인다. 그 궁극적 목적을 보지 못함은, 자기의 눈이 궁극적이지 않은 목적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한 분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사람'은 그 분을 본다. 생존을 넘어 계시는 그 분을 보는 사람이 새 사람이다. 첫 새 사람은 예수다. 모든 인류가 돌아가야 할 한 분을 '아버지'라 불렀던 그 분 말이다.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박혔습니다 : 예수가 왜 죽었는지를 살펴보면 뜻이 드러난다. 예수가 죽임당했던 것은 각 집단들의 생존 때문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죽일 공모를 벌였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헤롯파, 바리새파, 사두개파들도 이 공동의 적을 죽이는 일에는 서로 협력했던 것이다. 헤롯파는 헤롯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죽여야 했고, 바리새파는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어야 했으며, 사두개파는 로마의 지배 아래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여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신성모독이라는 말로 뒤집어 씌워서 예수를 고발했다. 어디에? 로마에.
로마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집단이다. 황제숭배를 구심점으로 해서 서로 다른 민족들을 규합시키고,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 싸운다지만, 사실 내 밑에 다 꿇어라지 평화는 무슨. 그리고 평화를 위한 그 싸움은 그친 일이 없어,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내내 무수한 아버지들과 청년들은 전장에서 죽어나갔다. 국경은 넓어지고 차출해야 할 남자들이 모자르니까, 나중에는 해외용병들에게 국경 수비대를 맡긴 것이 로마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이 로마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넘긴다? 이것은 충격적인 것이다.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소리치던 지도자들이,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앞에서 '이 예수가 자기가 왕이래요'하고 넘겼다. 이 말은 유대 지도자들이 로마 황제를 왕이라 인정하지 않으면 하지 못할 소리였다. 서로 잡아먹을 듯 하던, 이스라엘 내 파당들이 힘을 모으더니, 이제는 로마와도 힘을 합하려는 것이다. 한 사람 죽이는 일 때문에.
로마는 그런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마땅한 이유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재판을 맡았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폭동을 두려워했다. 황제 중심의 팍스 로마나를 주장하던 로마는, 점령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동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래서 만일 폭동이 일어날 경우,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책임자에게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갈등하던 빌라도는 그 허울뿐인 평화를 위해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다른 것 아니다. 자기 생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침묵하던 무수한 사람들. 그들의 침묵은 무엇 때문인가? 생존 아닌가! 이렇듯 이 사람, 저 사람의 자기 생존이 모여서,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의 정체다. 예수 자신은 이러한 죽음이 마땅히 당해야 할 죽음인 줄 아는 사람마냥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와 같이 순순히 십자가 끌고 해골 언덕을 올라갔다. 어느 신학자는 이 장면이 오히려 폭력의 인류를 십자가로 앞장서서 끌고가는 왕의 행진이라 표현했다. 예수는 그렇게 죽었다. 옛 사람들 앞에서 옛 사람마냥 자기 생존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새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자기 생존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고, 그의 죽음 앞에서 그 무언가가 여실히 드러났다. 온 우주의 창조자. 새 사람을 낳으시는 아버지. 인격의 근원. 그 분이 새 사람 예수로 인해 이 땅에 드러났다. 영광.
*아무 소용없는 상태로 남겨두다 : '카타.아르게오'. '아르게오'는 게으른, 쓸모없는 이고, 카타는 '아래'. 1. 소용없는 상태로 남겨두다 2. 폐지하다 3. 멈추다.
유전자든, 뭐가 되었든, 이제 몸이 소리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상태로 남겨둔다는 말이다. 우리의 인격이 자기 생존의 욕구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는 새 사람이고, 첫 사람이다. 더이상 자기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종이 아닌 것이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 그래서 출애굽이다! 자유다! 본래 단어는 '디카이오우'로 '의롭다 하다'. 죄인이 예수와 함께 자기 생존의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 이것은 출애굽의 그림이다. 이집트의 노예들이 어린 양 죽음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자유인으로서 여행을 떠나는 그림이다. 그래서 자유다. 하나님 앞에서 새 사람이다.
*죽은 적이 없고 : '우케티'의 번역 때문에. ouk은 부정이고, eti는 특정 시간의 강조다. 영어로는 ever. 그래서 ouketi는 never.
*주가 될 수 없다 : '퀴리에우오'. '다스리다, 지배하다'의 동사를 썼다. 이것을 '주가 될 수 없다'고 풀어놓은 것은, '퀴리오스'라는 명사가 '주the Lord, 땅의 주인'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일상 속에서 '주'라 말하는 인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로마 황제다. 당시에는 로마 황제만을 '주'라고 부를 수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기에 마땅한 사람'이라는 의미. 그런데 초대교회 안에서부터 체제 전복적인 새로운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로마 황제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는 의미다. 왜 로마가 300만의 사람들을 죽여서까지 그토록 기독교를 말살하려했는지 알겠는가? 예수를 왕이라 선언하는 것은, 모든 독재자들이 심기를 뒤틀리게 하는 표현이었다.(오늘날은 어떠한가?) 세상 권력을 손에 쥔 로마 황제가 주가 아니다. 여기 부당하게 모두를 위해서 죽는 한 사람이 진짜 주다.
*단번에 : '어떤 일을 단번에 했다'고 말하면, 그 일을 손쉽게 처리한 듯한 어감을 주지만, 여기서의 '단번에'는 only for all의 의미다. 모두를 위해서 단 한 번. 죽음을 깨뜨리는 단 한번의 죽음과 부활.
과학 얘기로 시작했으니, 과학 얘기로 마무리하자. 이렇게 단번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과학적 접근이 가능한가? 과학적 접근의 순서는 이러하다. 1 먼저 가설을 세운다. 2 세운 가설에 대한 반복적인 실험과 관찰 3 가설이 들어맞으면 '과학법칙'이 된다 아니면, 그 가설은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보라. 뉴턴의 가설이, 반복적 실험 관찰을 통해 증명되고, 우리는 이제 그것을 법칙이라 부른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단 한 번 벌어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어떠한가? 누군가는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반복적인 관찰과 실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역사적 사실은 실험 관찰로 접근해서 법칙화할 수 없다. 이순신을 오늘날 실험할수가 있나? 전해오는 기록들과 진술들을 믿어 그를 재구성 하는 것이지.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보라. 과학 수사를 벌였으나,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직전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범인을 잡기 위해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 법칙인가?
기록이다. 목격자다. 그 사건에 대한 목격자의 인격을 믿고, 그의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 의심이 학문의 미덕이고, 서로 의심하는 것이 일상인 오늘날에도 법정에서는 목격자의 증언이 가장 중요한, 믿을만한 진술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목격자들을 알고 있다. 그들이 목숨 걸어 적었던 글들이 우리 손에 있다.(지금 우리가 읽는 로마서도 그 중 하나다) 그러니 어거스틴에게 들렸던 아이들의 노래와 같이, "읽어라 읽어라" 자기 생존에서 벗어난 한 사람의 이야기로 들어오라. 소설 읽듯, 결코 읽고 느끼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읽고서 그 내용을 받아들이면 이 죽지 않은 한 사람의 인격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 목격자들이 그렇게 증언한다. 나 역시 그렇게 증언한다. 함께 새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