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은 '정치'에 관련된 본문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정치만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아? 이 본문의 시작은 '숨쉬는 모든 생명'이다. '숨쉬는 모든 사람'은 '푸쉬케'에 대한 번역어다. '프네우마'는 숨이고, '푸쉬케'는 그 '숨을 쉬는 개체'다. 그래서 푸쉬케를 '생동감있는 생명체'로 읽는다. 개역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렇다면 왜 '안뜨로포스'를 안썼을까? 다스림의 문제는 그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숨쉬는 모든 것들의 문제이다. 아담에게 명하셨던 다스림은 사람살이의 정치를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조화와 가꿈이다.
창조세계의 조화와 가꿈. 인간은 이 창조세계를 올바로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짊어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따라서 '다스림'은 단지 인간 사이의 정치와 계급의 문제가 아니다. 혹은 아무런 목적도 없으면서, '나는 그저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게 싫어' 따위 철부지 소리를 듣자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곧 하늘 아래 모든 영역의 다스림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한 각자의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서로 소통하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할 때, 결코 홀로 이룰 수 없는 신적 사명을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다.
'권세'는 그러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자리요 힘이다. 어떤 자리인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리다. 어떤 힘인가? 그 목소리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이다. 이 자리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물론 본인이 잘나서, 혹은 하나님이 그들을 더 이뻐해서 그들이 그런 자리에 힘을 가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배치하심은 창조세계를 조화롭게 가꾸기 위함이다. 생명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곧 창조를 완전히 이루기 위함이다.(아직 창조는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권세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배치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권세를 인정하라. 그러한 자리와 힘이 필요함을 인정하라. 하나님이 그렇게 두셨다. 그렇다면 이 말은 정치인들의 작태에 무조건 수긍하라는 말인가? 어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나? 오히려 정반대다. 그들의 자리와 힘이, 올바른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소리쳐라! 다만 자기 자신에게 물어라. 정말 이것이 정치권력을 깨울 수 있는 올바른 목소리인가? 만약 그저 권세 자체를 싫어하고, 누군가의 몰락을 기대하는 마음이라면,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좌우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나라. 삶은 그렇게 단조롭지 않다. 니 편, 내 편이 아닌 좌우의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을 보라! 그리고 사람을 보라!
[2]
하나님 닮은 일을 할 때에는 그 다스리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악한 일을 할 때에나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까?
그럼 하나님 닮은 일을 행하세요.
그러면 (오히려) 그 권세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력은 당신에게 있어 하나님 닮음을 이루는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악을 행한다면, 권력을 두려워하십시오.
권력이 달리 공권력을 가진게 아니니 말입니다.
즉 권력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기 위해
(범죄에 처벌로) 갚아주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위에 '하나님 닮은 일'이라고 풀어놓은 것이 '선(善)'이다. 선에 대한 설명은 나올 때마다 다시 해도 좋다. '선'의 의미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아가토스라는 희랍어는, 본래 형태가 '헤가.데오스'다. God is good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좋은 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요, 선이다. 곧 절대선이다.
그 하나님 닮은 일을 할 떄는 그 다스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보전하는 일은 두려움은 커녕 마음에 불이 붙는다. 그저 자기 생존을 위한 루틴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맘이나 속의 불이 꺼지는 것이다. 누구나 올바른 일을 하고 싶어하고, 그 올바름이란 하나님께 닿음이다. 요한이 말한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요일 4:18)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힘이 있고, 우리는 그들의 힘이 얼마나 제멋대로 쓰이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대항하는 순간 우리의 생활이 곤란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대한민국에서도 이럴진데, 로마제국이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한 A.D. 1세기에는 오죽했을까? 그 시절 바울이 말한다. "여러분이 그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까?"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 닮은 일을 행하세요."
하나님 닮은 일에는 버리는 것이 없다. 그 분은 재활용 전문가. 그 분의 재활용이 '사랑'이다. 모든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사람을 건실하게 세운다. "죄인도, 원수도 모두 친구로 변한다". 이것이 하나님 닮은 일이다. 이 일을 하겠다는데, 감히 어느 정치권력이 이것을 막아 서겠는가? 오히려 국가가 이 일을 돕겠다고 하고, 잘 했다고 상 주고 할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 복지다. 제도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한가운데를 관통함이다. 예전에 크리스마스때 외국인 노동자들만 도와주시는 어느 분이 나오더라. 국가가 나중에 알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인데, 해주니 고맙다고 지원금이 나오더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행하는 게 악이라면, (악이 별거인가? 생명을 죽이면 악이다. 누군가를 소외시키면 악이다. 나만 잘되고 싶으면 악이다) 국가의 공권력은 당신을 가로 막을 것이다. 악을 벌이고 있는 당신은 국가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국가권력을 통해서 인간의 삐뚤어짐에 제재를 가하시고 계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국가는 하나님의 사역자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문제는 국가가 생명을 소멸하는 일에 앞장 설때다. 이름을 나열해본다. 이사야,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세례요한, 윌리엄 윌버포스, 본회퍼, 유관순, 함석헌, 장준하. 줄기차게 소리치던 광야의 외침들이다. 그들은 국가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소리쳐 외치되, 권력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권력이 잘못을 깨닫고 제대로 기능하길 바랐다. 더불어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옳은 일을 하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 분 스승의 삶을 충실히 따랐던 제자들이다.
[3]
그러므로 단지 처벌 때문만이 아니라,
'한 마음' 때문이라도 그 아래 놓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금을 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을 위해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그들 각자에게 줄 것을 납부하되,
세금을 걷는 이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관세를 걷는 이에게 관세를 납부하십시오.
두려워할 이를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이를 존경하십시오.
처음 등장했던 동사가 이쯤에 다시 등장한다. "그 아래 놓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무정부보단 타락한 정부가 낫습니다" 는 의미겠다. 국가 체제를 놓으신데에는 이유가 있고, 분명한 유익이 있다. 국가가 범죄를 처벌한다는 유익, 또한 누군가를 처벌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에 속한 모두 사람이 '한 마음' 품기 위해서도 국가라는 울타리는 필요한 것이다. '한 마음'이라 풀어놓은 것은 '쉰.에이데시스'란 단어인데, '쉰'은 '함께'고 '에이데시스'는 '보다'다. 그러니까 함께 보는 것이다. 생각같아서는 '같은 세계관'으로 라고 풀고 싶은데, 세계관이란 말이 본문 안에서 이질적이란 생각이 들어 '한 마음'으로 했다.
그럼 그 한 마음은 어떤 한 마음일까? 위에서 말한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창조세계에 대한 목적. 사람을 일으키고, 생명을 풍성히 하자는 분명한 믿음, 그렇게 인간과 세계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분명한 소망. 그리고 이 믿음과 소망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믿음. 오늘날 이것을 위해서 국가 공무원들이 나와 함께 마음을 쏟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철자를 배우고, 여러 지식들을 배우며,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갖춰진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가 같은 철자로, 같은 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친다.
핵심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은 국가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국가를 끌어안고 같이 간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거대한 목적 안에 모든 것들이 놓여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을 할 때, 국가를 두려워하거나, 국가를 배제하지 말라는 말이다.
세금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버스 요금을 생각해보라.(어제 이런 얘기를 잠깐 나눴다) 물론 기름값이 오르고 버스 요금도 오르고, 한 달에 교통비로만 10만원을 쓰는 나로서도 버스 요금은 괴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청소년 요금을 내고 싶지는 않다. 왜? 내가 낸 돈이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다닐 수 있는 교통 시스템 운영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 요금 인상에 대해서 비판할수도 있고, 버스 운영에 대해서 한 소리 할 수도 있으나, 1) 버스 자체를 없애자고 말해서는 안되고, 그 아래 놓여야 한다. 그리고 2) 버스가 잘 돌아가도록 나 역시 모두가 모두를 위해 부담하는 그 금액을 기꺼이 부담해야 한다. 버스를 통해 얻는 유익이 하나님의 전체 목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고 아담한 몸을 가지고 있더라도. '성인'이라면, 체중과 체적에 관계 없이.
성인(成人)은 곧 '이루려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무엇을 이루려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당신은 무엇을 이루려는가? 모든 제도와 환경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꿰뚫어 보며, 그 뜻을 이뤄나가자. 성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