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 카리스마타 : 번역어를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카리스는 '은혜'요, 카리스마타는 '은사'다. 생각같아서는 "'차원을 가로 질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거저주심'을 따라, '그렇게 거저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너무 길잖아. 하여간 의미는 그러하다. 하늘로부터 이 땅에 돌입하는 하나님의 '거저'. 그 차원에 엊걸린 거저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나열되는 일의 목록들은, 선물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하게 받은 것으로 한 몸을 섬긴다. 공동체다.
*믿음의 이치를 따르는 예언 : '예언'은 오늘날 '설교'다. 아무 설교나 다 예언 아니다. 소망을 밝히고 미래를 제시하는 설교가 예언이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소망을 제시할 수 없다. 믿음의 이치 위에서 예언하는 것이다. 예전에 '투수'로 설명한 적이 있다. 믿음은 하반신, 상반신을 힘껏 휘둘러 미래를 던진다. 이러한 설교가 곧 예언이다.
따라서 믿음은 '과거'와 상관이 있다. 예수의 역사적 사실들이다. 예언은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 이 과거와 미래의 일관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믿고 소망하는 자의 삶이다.
또한 이 예언은 공동체에 속한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설교는 '목사안수'라는 제한을 받지 않는다. 믿음의 이치 위에서 한 몸에 속한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나님 주신 '선물'이다.
*'여러 국면이 하나로 꿰뚫림' 속에서 하는 나누어줌 : 희랍어로 '하플루스'. 기본적인 의미는 '함께 접어놓음'이다. '단순함'이라 푼다. 이 '단순함'에 대해서 불과 지난 주에 수업을 들었다. 라틴어로 simplicitas. 여러 국면들이 접혀 있지만, 그 여러 국면들을 관통하는 '하나'가 단순함이다. '단순함'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좀 길지만 풀어놓았다. '여러 국면이 하나로 꿰뚫림' 이 속에서 '나누어줌'이 있다.
사람마다 처지는 다르고, 환경은 다르지만, 모두가 나누어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시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인데, 그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한 분. 그래서 모두가 필요한 한 분. 그 한 분을 따라 나누어줌.
*억눌려 지치는 고됨 : 이 말은 바울이 현대인들에게 건내는 말이 아닌가? 삶을 망가뜨리도록 고되게 일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좋으신 하나님 안에 굳게 붙어 있으면, 억눌려 지치도록 고되게 살지 않아도, 나눌 수 있고 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이건 앞서 말한 '하나를 추구함 속에 나누어갖음' 없이는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오늘날 현대 교회에게 주는 일침이 아닌가?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가?
*좋으신 하나님 : '선(善)'을 이렇게 풀었다. 본래 '헤가.데오스(좋으신 하나님)'에서 '아가토스'가 왔고, 이것이 善이라 번역되었다. 따라서 선의 본래 뜻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영어의 good도 그 고어 형태가 god이며, 따라서 God is good은 동어 반복과 다름 없다.
*주께 종노릇 하여 : 앞에서 나온 '디아코니아'도 섬김으로 되어있고, '둘레이오'도 섬김으로 번역되어 있어, 이 둘을 구분하고자 한다. 디아코니아는 맡은 바 일함이다. 직무다. '둘레이오'는 종이 되어 섬김이다. 교황들의 서한에는 맨 아래에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바울서신에서 인용한 글을 쓴다. 이 때의 '종'이 '둘레이오'다. 그런데 교황만 둘레이오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종이다. 그래서 배우고 가르치고 섬기고 나눈다. 곧 주의 종의 삶은 인간다운 삶이다. 좋으신 하나님을 닮는 삶이다.
*기도로 가온을 단디 붙잡아 : 사도행전 2장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 함께 기도하면서, '카르디스(심장)'를 확고히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로마서에서도 같은 표현이 있다니! '프로스.카르테레오'라는 단어를 쓴다. 그렇다면, '기도'는 그 마음을 확고히, 단단히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도다. 그래서 숨을 구한다. 믿게 된 바, 이것을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길 수 있도록,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숨결의 힘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다.
*씻어난이... 낯선이 : 씻어난 이는, 하나님 숨결을 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 곧 '성도'다. 세례를 통해 씻어 새로 났다는 의미를 살리고자, 류영모 선생을 따라 '씻어난 이'로 풀었다. 바울은 "씻어난 이들끼리는 쓸 것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 '나눈다'는 말이 '코이노네오'라는 동사로, 명사가 되면 '코이노니아'다. 공동체다. 교회다. 억눌려 지치는 고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끼리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낯선이, 즉 코이노니아 식구가 아닌 사람들을 대접하는데도 힘쓰기 때문이다. 안으로 밖으로 섬긴다. 그렇게 코이노니아의 섬김은 막이 있으면서도 그 막은 단절과 폐쇄의 담벼락이 아니다. 소통과 섬김의 막. 마치 세포벽같이. 섬김을 내어주고 사람을 얻는 교환이 끊임없이 이뤄진다.
11477日. D-Day.
앞에는 한 분이, 뒤에는 완전한 분이.
내 사사로움이 죽기만하면 하나와 완전이 만나 영원을 이룰 수 있다.
예수는 '이어+수'. 만물을 잇는 능력. 아, 사사로움이 죽는게 아니다.
그 분의 사사로움은 곧 전체를 위함이었다. 내 사사로움(4)이 세상(4)을 위한 것이어야.